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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백부장의 믿음 (눅 7: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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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부장의 믿음 (눅 7:1-10)

  현대사회를 가리켜 ‘외모지상주의’라고 부릅니다. 미국의 뉴욕타임지는 2000년에 인종, 성별, 종교, 이념에 이어 차별을 두는 새로운 요소로 외모를 뽑았습니다. 현대는 외모가 개인의 성공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외모지상주의를 ‘루키즘’(Lookism)이라고 부르는데 한국에도 예외 없이 들어와 성행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 이전만 해도 우리는 당장 먹고사는 것을 걱정할 때라 외모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좀 살만하니까 남들이 어떻게 보는가에 관심을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요즘 강남에는 성형외과가 수없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여자는 물론이고 이젠 남자까지 성형을 합니다. 그러다보니 부작용도 많이 생겨 성형 잘못해서 얼굴만이 아니라 인생 끝내는 사람도 많이 생겼습니다. 요즘 연예인 중에 성형하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다고 합니다. 모든 여자들이 여건과 기회만 되면 성형을 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요즘 천국에도 원본과 대조하느라고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농담까지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중요시 여깁니다.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외모를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은 중심이요, 마음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 외형보다는 내면, 겉보다는 속을 보시고, 드러나는 것보다 숨겨진 것을 보십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아들 중에서 왕을 삼으려고 할 때 보기에 괜찮은 엘리압에게 기름을 부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을 보실까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 주님이 보는 가장 중요한 관점은 ‘믿음’입니다. 중심과 믿음이 같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인간의 몸을 입으신 주님은 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의미에서 믿음을 보십니다.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시던 말씀이 믿음입니다. 주님 앞에 나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믿음이 없고 적은 것을 책망하셨고, 믿음이 크고 놀라운 것을 칭찬하셨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백부장이 그런 사람입니다. 주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 있는 행동과 모습을 보면서 칭찬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주님은 믿음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도 백부장처럼 칭찬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백부장은 어떤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인정을 받았을까요? 백부장의 믿음은 과연 어떤 믿음일까요? 본문을 통해 그의 믿음을 2가지로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돌아보는 믿음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사람들이 살기가 그리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총체적으로 힘들고 어려운 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 돌아보고 살피기가 무척 힘들었습니다. 당장 자기문제, 자기 일에 몰두해도 될까 말까 하는 상황입니다. 이렇게 살기가 힘든 때에 이 사람이 지금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귀한 믿음입니다.

  또한 그가 돌아본 다른 사람은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 어쩌면 먼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백부장은 백 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로마부대의 군관입니다. 공식적으로 이 정도의 사람을 다스리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훨씬 많은 사람이 그의 수하에 있습니다. 특히 당시는 노예제도와 종의 제도가 합법적으로 되어 있는 때라서 그의 마음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많은 사람을 거느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이 정도가 되면 그가 총애하는 몇 사람,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들만 가까이하고 나머지는 관심을 잘 주지 못합니다. 그들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돌아보되 먼 사람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부장은 지금 낮은 사람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가 돌아보는 사람은 종, 하인입니다. 당시 종은 사람이지만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버려도 괜찮고, 팔아도 문제가 없었고, 심지어는 죽여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던 때입니다. 당시 종이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로마인의 이야기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농업에 쓰여 지는 도구는 3가지가 있다. 하나는 소리 없는 도구이고, 둘째는 언어가 없는 도구이고, 셋째는 말하는 도구이다.” 소리 없는 도구는 수레나 짐을 끌고 가는 기구를 말하고, 언어가 없는 도구는 동물로서 낙타나 소나 말을 가리킵니다. 말하는 도구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종이요, 노예요, 하인입니다. 종은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쓰다가 버려도, 팔아도, 내던져도 되는 도구에 불과한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이런 종, 하인을 돌아보고 있습니다. 참 귀한 사람입니다. 참 귀한 믿음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분 인줄 알았고, 주님이 이 땅에 무엇을 위해 오셨는가를 알았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믿고 섬긴 사람이요, 주님의 사랑을 신실히 실천했던 뛰어난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돌아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주님도 그렇게 사셨고, 하나님도 늘 우리를 돌아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를 돌아보시는 분으로 강조합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늘 하나님은 백성을 돌아보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고통의 시간을 보낼 때 하나님은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이곳에서 옮겨 갈대아인의 땅에 이르게 한 유다 포로를 이 좋은 무화과 같이 잘 돌볼 것이라 내가 그들을 돌아보아 좋게 하여 다시 이 땅으로 인도하여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겠고 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렘24:5-7)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잉태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이렇게 그녀의 믿음을 기도로 표현했습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눅1:46-50)

  히브리서의 저자는 마지막 때를 사는 성도들에게 권면합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페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10:24-25)

  여러분, 돌아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도는 돌아보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백부장처럼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주님의 심정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고아와 과부와 같은 어려운 사람들, 병든 자들, 노인들, 어린아이들, 궁핍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 말고도 배우자, 가족, 형제, 친구, 성도, 이웃, 심지어는 교역자까지도 돌아보아야 한다고 성경은 강조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이것이 앞서간 성도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가진 마음입니다. 특히 가장 많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한 사도바울의 삶입니다. 그는 여러 환란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형제와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 게으르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11:28)

  나는 교회를 돌아보고 있습니까? 교회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계십니까? 교회의 발전과 장래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까? 교회건축에 대하여 어떤 심정으로 대하고 계십니까? 교회를 돌아보는 마음에서 진정 교회를 위한 헌신이 나옵니다. 나 말고도 누군가 하겠지, 성도가 아니면 교역자가 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시지는 않습니까? 교회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 교회는 바로 우리의 교회요, 내가 사는 동안 영적터전과 삶의 복을 누리는 원천이요,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돌아보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감동을 주는 믿음입니다. 오늘 성경에 백부장이란 이방인이 기록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있다면 그는 당시 감동을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가 감동을 준 대상은 크게 2부류의 사람입니다. 먼저는 유대사람들입니다. 당시 이방인이던 백부장이 주님을 만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백부장의 하인이 병에 들어 백방으로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 애쓴다는 소식이 당시 마을에 살던 유대장로들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장로들은 이 병은 예수님이면 고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청하려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오시게 되었습니다. 장로들은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기 위해 쏜살같이 예수님께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백부장을 위해 간절히 탄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를 고쳐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고, 백부장이 유대민족을 사랑하였다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중에도 유대인을 위해 회당을 지어준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꼭 백부장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백부장 본인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의 장로들이, 마을사람들이 이토록 간절하게 백부장의 소원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그들이 백부장을 통해 감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사이에는 그리 좋은 감정을 갖지 못했습니다. 특히 로마 군인들에게 대해서는 더욱 안 좋았습니다. 자기나라를 지배하고, 억압하여 누르고 있는 사람들인데 좋은 감정을 가질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을마다 로마인과 유대인사이에는 충돌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좋은 감정을 갖기가 쉽지 않은 때입니다. 설령 좋은 감정을 갖고 대한다고 해도 서로를 추천하거나 도와주는 일은 더욱 힘든 상황입니다. 그런데 여기 장로들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사이가 좋은 것은 물론이고, 백부장을 위해 간청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백부장을 통해 유대인들이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이런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백부장은 자기주변의 사람들, 비록 이방인의 땅이지만 자기를 적대하고 멀리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던 것입니다.

  또한 백부장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입니다. 본문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강조합니다. 유대장로들의 간절한 탄원을 들으신 주님께서 백부장의 하인을 고치기 위해 그 집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접하고 길까지 마중 나온 백부장은 자기 집에 오시려는 주님을 붙잡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봅니다.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수고하지 마옵소서, 말씀만 하옵소서’ 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하는 백부장을 보시고 그를 ‘기이히’ 여겼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이겠습니까? 주님은 큰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의 놀라운 믿음을 크게 칭찬하며 하인의 병은 물론이고, 백부장에게 큰 축복을 내리신 것을 봅니다.

  이처럼 백부장은 사람을 감동시킨 사람이요, 또한 주님을 감동시킨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사람을 감동시키고, 주님을 감동시키는 일보다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는 은혜, 사람들로부터 받는 사랑은 모두 감동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물론 감동이 없어도 은혜와 사랑은 받겠지만, 감동을 주면 그 은혜와 축복은 더 놀랍게 임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우리가 사랑과 복을 받는 길은 감동을 주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딸아이가 해마다 아빠, 엄마 생일이 되면 카드를 보냅니다. 카드를 보내니까 해마다 무슨 내용을 담고 있나가 늘 궁금합니다. 이번에도 엄마 생일에 아이가 정확하게 맞춰 카드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엄마, 몸 건강하고 손자 손녀 결혼시킬 때까지 오래오래 살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별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내는 감동을 받고 카드를 오래 동안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녀의 카드가 이렇게 부모를 감동시킵니다. 그러니까 아이한테 섭섭한 거 다 잊어버립니다. 아이에게 핀잔 받은 거 다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기왕해주는 건데 더 잘 해주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모든 부모의 마음이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심정일 것입니다.

  부모를 감동시키면 더 주고 싶고, 더 사랑하고 싶은 게 인간인데, 하물며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감동시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가만히 보면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한 시대를 살면서 크신 은혜와 축복을 누리며 산 것은 모두가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역사는 바로 그것을 소개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을 감동시킨 모습을,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을 실망시킨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성경의 기록입니다. 거기에 아브라함이 있고, 다윗이 있으며, 바울과 요한이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을 감동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몇 배나 더 받았습니다. 그 능력으로 한 시대를 빛내고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한번 우리를 돌아보십시오. 한해가 마무리 되는 이 귀한 시점에서 지난 나의 시간과 삶을 점검해 보십시오. 나는 감동을 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까? 나를 영원히 사랑하는 주님께 감동을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실망을 주고 있는 것입니까?

  백부장의 믿음은 돌아보는 믿음이요, 감동을 주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이 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늘 돌아보는 사람으로, 사람과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으로 한 주간을 살고 남은 생애를 사는 신앙인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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