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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엘(내가 그 하나님이라) (창 4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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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엘(내가 그 하나님이라) (창 46:1-7)

I. 단위가 달라진다

1940년대 뉴질랜드 젊은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Edmund Hilary)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에베레스트 정복에 나섰다가 실패합니다. 그는 실패하고 내려오는 길에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산아, 너는 자라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자라날 것이다. 나의 기술도, 나의 힘도, 나의 경험도 나의 장비도 자랄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온다. 기어이 너를 정복할 것이다." 10년후 1953년 5월 29일 그날은 제가 이 땅에 태어나던 날이었습니다. 다른 산악인 두 명과 함께 역사상 처음으로 에베레스트 산 정상을 정복했습니다.

꿈은 자라납니다. 꿈은 한톨 겨자씨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숲을 보는 눈입니다. 그 숲속에서 노래하는 많은 새들이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 귀입니다. 저는 꿈 꿀 수 없는 산간 벽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어린시절 예배당에 나가 말씀을 들으며 꿈을 꾸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시골 거창고등학교에서 꿈꾸고 그 꿈을 이루어 가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 꿈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꿈, 하나님이 주신 꿈입니다. 민족을 섬기고 교회가 부흥되는 꿈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기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 꿈은 마귀가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세상이 찢을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꿈은 더 커져만 갔고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소년 요셉의 꿈은 자라났습니다. 이제 그 단위가 달라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는 족장이라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구속사를 이끄시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국가를 통하여 구속사의 새로운 단위로 사용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야곱의 가족이 요셉이 있는 애굽으로 오늘 집단 이민을 가고 있습니다. 이제 가나안 시대는 막이 내려지고 애굽시대라는 새로운 막이 오르고 있습니다. 가나안은 약속의 땅입니다. 이곳에서 족장들은 하나님을 만났고 말씀을 들었고 믿음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지금 흉년으로 인한 약탈과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 단위를 달리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릇이 커져야 될 필요가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꿈꾸는 하나님의 백성은 믿음의 단위가 달라집니다. 기도의 단위가 달라집니다. 헌신과 충성의 단위가 달라집니다. 축복의 그릇 그 단위가 달라집니다.

II. 그때는 예배해야 할 때이다

야곱은 지금 모든 식솔과 우양떼를 이끌고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총리로 있는 애굽으로 가고 있습니다. 가나안 접경 브엘세바에 이르러 여행 행렬을 멈추고 양을 잡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창세기 46장 1절 "이스라엘이 모든 소유를 이끌고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니" 이 짤막한 한 절 속에 많은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우선 본문은 야곱을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민 행렬은 한 가문 야곱집안의 이동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이동으로 성경은 이해하고 싶은 것입니다.

브엘세바는 어떤 곳입니까? 조부 아브라함이 블레셋과 평화조약을 맺은 자리입니다. 아버지 이삭이 아비멜렉과 평화조약을 맺은 곳입니다. 본문은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제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며 야곱이 애굽 왕 바로와 평화롭게 잘 지내야 할텐데 라는 생각을 왜 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 제사는 애굽과의 평화를 간구하는 제사였습니다.

가나안을 떠나고자 할때 그동안 자기 가문을 불러주신 하나님, 그동안 가나안에서 지켜주신 하나님, 함께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솟아올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감사의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가 갖는 또다른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고난이 있다고 바로와 요셉의 초청이 있다고 이처럼 쉽게 가나안을 떠나도 좋은가?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가나안으로 갈 것이 아니라 이제 요셉이 가나안으로 들어와야 옳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지요.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여러번 가나안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야곱은 가나안 경계선 브엘세바에서 확실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었습니다. 옳습니다. 바로 이 순간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본문 속에 하나님께 올린 야곱의 기도가 생략되어 있지만 우리는 어렵잖게 야곱이 드린 기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요셉은 내 생명처럼 소중한 존재입니다. 지금 그가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우리 가문의 절대절명의 위기 속에서 우리를 초대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내 아들 요셉이 아무리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땅 가나안 보다는 귀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금 이곳 가나안을 떠나면 하나님의 약속은 깨지는 것입니까? 우리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우리 모두가 죽을지언정 애굽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여 주소서. 응답하소서. 돌아가오리까? 이곳에 멈추오리까? 애굽으로 내려가오리까?"

그렇습니다. 이때는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업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 제일 먼저 포기하는 것이 뭡니까? 예배입니다. 기도를 멈춥니다. 찬양을 쉬게 됩니다. 아닙니다. 그때는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야곱은 인생의 위기때마다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다음 자리로 나아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찍이 야곱은 배고픈 형 에서에게서 장자의 명분을 빼앗고 눈먼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가로챕니다. 외삼촌 라반에게로 도망을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28장 루스 광야세서 홀로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집을 떠났을 때 하나님 곁을 떠나 혼자 버려진 줄 알았습니다. 그 밤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나 혼자 도망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구나. 이 빈들판에 나 혼자 누워있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이곳에 임재해 계시는 구나. 사닥다리가 하늘에서 내려와 자기에게 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 사닥다리는 야곱이 하나님을 붙들기 위해서 버둥대고 올라가는 사다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기 위해서 내려오시는 임재의 사다리였습니다. 책망받아야 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야곱아 염려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돌아올 때까지 내가 너를 지키고 보호하여 줄 것이다. 그곳 루스 - 분리라는 땅이었습니다. 자기는 아버지와 분리되어지고 고향과 분리되어지고 꿈과 분리되어지고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아갈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밧단아람 외삼촌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나는 너를 떠난 적이 없다. 한번도 눈길을 뗀 적이 없다. 내가 지금까지 모든 것을 지켜 보았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 혼자 외롭게 사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지켜 보고 계셨습니다. 내게서 눈을 떼신 적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길목 하나님과 또다른 결정적 만남이 창세기 32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족들과 많은 재산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목 얍복강 나루터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형 에서를 만나는 것이 두려워서 자기의 모든 가족을 강을 건너게 합니다. 모든 우양떼를 다 건너가게 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은 그곳에서 건너가지 못하고 혼자 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강조합니다. "야곱이 홀로 남았더니" 야곱이 홀로 남은 그 밤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씨름을 걸어옵니다. 성경을 조심스럽게 읽어보면 성경의 주어가 그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씨름은 야곱이 하나님을 붙드는 씨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야곱을 바꾸어 주는 씨름, 하나님의 임재의 싸움이었다고 하는 것이지요. 성경은 야곱이 이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환도뼈가 부러져서 야곱은 완전 녹다운되었습니다. 이제는 일어설 수도 없는 비참한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승리라고 얘기하는 것입니까? 지금까지 이 사람의 이름은 야곱이었습니다. 약탈자였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다. 나는 둘째로 태어났지만 내가 원하기만 하면 나는 장자가 될 수 있다. 나는 미인을 얻을 수 있어. 빈 손으로 갔지만 나는 많은 재산을 이끌 수 있어. 나는 내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어. 약탈자 야곱이었습니다. 씨름이 끝난 다음 이름이 바뀌어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하나님이 간섭하시겠다. 하나님이 지금부터 너를 다스리겠다. 하나님이 너를 지배하겠다. 하나님이 통치하겠다. 이스라엘로 바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승리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밤새도록 씨름하고 눈을 떠 보니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바라보던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아침이면 솟아오르는 태양이었지만 어제의 태양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태양은 자기를 감시하는 태양,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태양 속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브니엘이라 이름을 짓게 되는 것이지요. 이곳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담대히 당당하게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서 얍복강을 건너오게 되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야곱과 같은 자리에 있다면 지금은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홀로 도망가듯 아무도 당신과 함께 하지 않는다고 외로움을 느끼십니까? 그때는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에 파묻혀 가나안의 꿈을 잊어버리고 비전과 삶의 목적을 잃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을 살며 지루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지금은 당신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강을 건너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까? 지금 당신은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이 길은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신가? 내가 가야 할 길인가? 멈춰야 할 길인가? 내가 지금 놀라운 계획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꿈꾸고 시작하려고 하는데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 하고 있는 일 조차도 내가 어려움을 겪지나 않을 것인가? 나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이 어려운 문제 속에서 나는 어찌해야 된 단 말인가? 선택의 갈 길을 알지 못하여 방황하며 답답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지금은 당신이 하나님을 만나야 할 때입니다. 지금 당신 예배해야 할 때입니다.

III.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이다

야곱의 브엘세바 예배는 외로움과 두려움속에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의 예배는 아니었습니다. 얍복강 나루터 예배와는 상당히 차원이 다른 예배였습니다.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묻는 성숙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가나안을 떠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불순종은 아닌지요? 늘그막에 신앙적 패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영적인 후퇴나 침체는 아닐는지요?"

그밤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십니다. "야곱아, 야곱아" 야곱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 찾아오셨군요. 하나님 나를 만나주시는 군요. 내게 응답하셨군요. 너무 반가워 하나님을 맞으러 나가는 응답이었습니다. 예.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절대 순종하겠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순종할 거예요. 하나님, 물론 나는 요셉에게 가고 싶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혀를 깨물고 가나안으로 돌아갈 거예요. 하나님 말씀해 주세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응답했습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응답했습니다.
루터가 하나님을 만나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응답했습니다.

나아가 본문 3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야곱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보여주던 얼굴과는 또 다른 얼굴을 계시해 주시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창세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은 대부분 엘로힘이었습니다. 엘, 하나님의 복수형입니다. 장엄복수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양식이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인간이 가진 언어로 표현할 길이 없어서 복수 하나님, 엘로힘 - 장엄하신 하나님을 엘로힘이라 얘기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끝나는 자리에서 찾아오신 하나님은 엘 샤다이 - 전능자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미 며칠 전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하나님이 새롭게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엘샤다이 - 전능자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은 엘로힘도 아니고 엘샤다이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말로 "나는 하나님이라"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문에 "하엘"

하는 The. 엘은 God. 하엘 = 그 하나님! 내가 바로 그 하나님이다!
네가 아비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나를 불렀지. 내가 바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낸 그 하나님이다. 아브라함과 함께 하고 이삭과 함께 했던 바로 그 하나님이다. 지금까지 네가 인생의 고비마다 만났던 그 하나님이다. 외삼촌 집으로 도망갈 때 너를 만나주던 그 하나님이 나다. 얍복 나루터에서 너와 씨름하며 네게 큰 민족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던 바로 그 하나님이다. 이제 내가 대답한다. 가나안을 떠나 가라. 애굽으로 내려 가라.

그러면서 몇 가지 소중한 약속을 야곱에게 하십니다.

첫 번째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라.
둘째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셋째 너 혼자 애굽에 가는 것이 아니다. 너만 보내고 나는 가나안에 남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다. 나 혼자 내려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함께 내려가겠다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가나안 땅에 두고 나 혼자 애굽으로 내려가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애굽으로 같이 내려가시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당당하고 든든했을까요?

마지막으로 네가 애굽에 내려가면 네 조부 아브라함 네 아버지 이삭에게 보여주었던 꿈을 애굽에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그 꿈을 이루지 못하면 어떡하나? 염려할 때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이 명쾌한 대답에 얼마나 통쾌하고 시원했을까요? 갈까요 말까요? 망설일 때 이 음성을 들었을 때 얼마나 그 발걸음이 가벼웠을까요?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때 어려운 말씀이 없습니다. 모를 말씀도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 4절에 난해귀 한절이 나옵니다.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임종을 지켜보며 마지막 눈을 감겨준다는 단순한 뜻도 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이상의 깊은 뜻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애굽으로 내려가서 꿈을 이루지 못하면 어떡하나? 족장으로서의 내 삶을 잘 감당하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나님의 비전을 온전히 이루어 드리지 못하면 어떡하나? 이곳에서 죽어야 될 것인가? 내 뼈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인가? 많은 착찹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는 순간은 "족장 이 취임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네 눈으로 그 비전을 다 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요셉이 그 꿈을 이루어 줄 것이다. 염려하지 말아라. 마지막 후반절 남은 생애를 멋지게 잘 준비하려무나. 이런 뜻입니다. 과연 야곱은 축복하는 사람으로서의 후반전을 참 보람있게 보내게 됩니다.

90권이 넘는 책을 저술한 우리시대의 저술가요 선교사요 목회자인 세실 머피가 최근에 쓴 책 가운데 「후반전의 지혜」라는 책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늙어가도록 계획하셨다면 늙어감을 두려움이 아닌 긍정적으로 해석하라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덕을 남길 기회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나이듦의 얼굴은 나이듦의 성품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20대엔 타고난 얼굴로 살고, 40대가 넘어서면 늙은 후엔 어떤 얼굴로 살 것인가 대략적인 그림이 나타나게 된다. 60대가 되면 평생을 산 증인이 내 얼굴이 될 것이다. 푸근한 인격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으니까 젊을 때부터 잘 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이웃들과 더불어 사는 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을 일이 있으면 받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평생 하나님께서 부어주시고 쌓아주신 것이 있으면 그것을 움켜쥐지 말고 섬기고 베풀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남을 고치려고 하지 말라는 챕터가 있습니다. 자식을 내 힘으로 바꾸려하지 말아라. 세상을 네가 고치려하지 말아라. 너는 너 자신도 못 고치며 살지 않았느냐. 오히려 자식을 고치려 하지 말고 자식들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열어 보아라. 세상을 원망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세상으로부터 귀를 열어라. 입을 많이 열지 말고 귀를 많이 열라고 조언합니다. 속도를 늦추어 사는 것을 즐기라고 말합니다. 평생을 살며 달려왔던 조깅코스도 달리지 말고 조용히 걸으며 보지 못했던 자연을 즐기고 부딪히는 사람들과도 눈웃음으로 그들을 축복해라. 하나님께서 네게 지금까지 동행하셨던 삶에 대하여 감사하고 만나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는 마지막 때 축복의 권세를 마음껏 누리도록 조언합니다. 네가 가지고 있던 사역을 다음 세대를 위해서 조용히 넘길 준비를 해라. 멋있게 넘기는 사람이 멋있는 인생의 갈무리다 라고 얘기합니다.

IV. 복덩어리가 가나안을 떠나다

오늘 본문 창세기 46장 초반부 무대는 브엘세바입니다. 1절에도 브엘세바가 나옵니다. 5절에도 브엘세바가 나옵니다. 요약하면 "야곱이 브엘세바에 이르러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하나님 내려갈까요 말까요? 하나님께서 담대히 내려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이 가나안 땅 브엘세바를 떠나 애굽으로 기쁨으로 내려갔다는 얘기입니다." 성경 배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 가나안은 430년 동안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복덩어리가 가나안 땅을 떠나니 이때부터 가나안은 영적 암흑기에 빠져들게 되지요.

430년 후 역사 무대에 새롭게 등장할 때 가나안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멸망당하고 정복당하고 짓밟히기 위해서 등장할 뿐이지요. 하나님의 촛대가 옮겨진 땅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 것입니다.

저는 어린 시절 시골에서 신앙생활하다가 복음의 바톤에 관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님들로부터 전도사님들로부터 부흥사들로부터 복음의 바톤은 예루살렘 좁은 마을에서 시작하여 아시아를 휘감아 돌더니 유럽으로 건너갔다는 것입니다. 유럽에서 다시 미국으로 복음의 바톤이 건너가자 촛대가 미국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이 땅의 복음의 주자는 복음 바톤의 주자는 한민족, 한국교회, 한국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의 바톤을 땅끝까지 전하는 일을 우리가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아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그 일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쓰임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고 얼마나 기쁜 일인가? 그때 저는 목사가 되기로 결단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가 놀랄만큼 놀라운 부흥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참으로 희망이 없는 그 시대에 민족의 희망이요 등불이 되었습니다. 배고프고 가난한 시절 한국교회는 한국백성들에게 꿈이 되어져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만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피흘려 지켜왔던 이 교회를 잘 섬기지 못했습니다.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 전역에서 지금 놀라운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습니다. 남미에서 놀라운 부흥의 물결이 넘실대며 세계를 강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도처에서 새로운 부흥의 물결이 넘실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어려움에 빠져들고 있고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들을 보면서 지금부터 7년 8년전 나는 그 땅에서 엎드려 하나님께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날 밤 자지 못하고 "하나님 이 민족을 버리시는 것입니까? 한국교회를 쓰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이제는 없어진 것입니까? 내 백성을 버리지 마시옵소서. 주여 이 민족에게 주셨던 사명을 빼앗아 가지 마시옵소서. 제가 죽어 한국교회가 살수 있고 민족이 살수 있다면 흔쾌히 제물이 되겠습니다. 제가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가 민족부흥의 중심에 서기를 원합니다. 주여 마음껏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성령님을 환영합니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겠습니다. 제가 사모하겠습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겠습니다. 주여 당신의 역사를 제한하지 않겠습니다. 어떻게 쓰시든지 마음껏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7년전 저는 그 기도를 드린 다음에 단 하루도 이 기도를 멈춰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전에 이 기도를 먼저 하지 않고 다른 기도를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이 기도를 먼저 했습니다.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쓰실 때까지, 이 민족 교회를 쓰실 때까지, 주여 촛대를 옮기지 마시옵소서. 촛대를 옮긴 에베소 교회가 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촛대가 떠난 가나안 땅이 되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땅이 부흥에 중심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V. 하엘(The God)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셨습니다.
하엘 The God. 그분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구요. 내 인생에 아버지가 되신다고 예수님은 제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야곱과 요셉이 살던 가나안 땅 사람들은 어떤 초월적인 신적인 존재를 "엘(神)"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께서 막연한 神이 아니라 하엘 The God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엘 - The God. 내가 그 하나님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일까요?
나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한 하엘 - 그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요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할 하엘 그 하나님이다.
나는 요셉에게 꿈을 주고 그 꿈을 성취하는 하엘 - 그 하나님이다.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너를 선택하고 불러서 나의 자녀 삼은 바로 그 하나님이니라.
나는 너를 구원하고 세상 끝날까지 너를 지키고 동행할 하엘 그 하나님이니라.
나는 오늘 야곱의 예배에 응답했듯이 네가 나에게 나아와 기도할 때마다 예배할 때마다 네게 응답하고 기름부어줄 하엘 그 하나님이니라. 할렐루야.

성경에 가득한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구약의 백성을 인도하신 그분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신약의 교회를 세우시고 역사하셨던 그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야곱과 일평생 함께 하셨던 그분이 당신과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요셉의 꿈을 한톨도 찢지 아니하고 꼼꼼히 이루어 주셨듯이 우리의 꿈과 우리의 소원과 비전을 이루어 주실 그 분이 하엘 The God 나는 너의 하나님이니라.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하나님 한번도 우리를 버린 적이 없으십니다.
언제나 신실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떠날 때도 하나님은 아파하며 나를 바라보시며 하나님은 나를 따라오셨습니다. 내가 두려움을 가지고 애굽에 내려갈 때에 나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아니하신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우리의 손을 붙들고 함께 내려오셨던 분이셨습니다. 고난의 현장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 하는 처절한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곳에 나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분이 하엘 -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 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 없네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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