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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웃사를 통해서 주시는 법궤 교훈 (삼하 6: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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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사를 통해서 주시는 법궤 교훈 (삼하 6:1-15)

‘디자인하지 않으면 죽는다(Design or die)’. 최근 뉴질랜드 정부 산하 디자인 진흥기관이 발행한 안내 책자의 제목입니다. “디자인하지 않으려면 사퇴하라(Design or resign)”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말을 무색하게 하는 이 주장은 디자인산업이 일부 선진국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득 증대와 구매력 향상에 따라 제품 경쟁력의 초점이 가격이나 품질에서 디자인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품을 구매할 때 디자인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젊은 세대일수록 더욱 더 디자인에 민감합니다. 세계적 추세를 살펴볼 때도 디자인은 한 나라의 산업경쟁력과 문화와 사회적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있습니다. 디자인 산업은 모든 산업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디자인을 하면, 번영하리라(Design, then prosper)'라고 말합니다. 디자인은 물건이나 산업 부분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생각, 얼굴, 인격, 언어, 신앙에 이르기까지 너무도 중요합니다. 잘못되고 구태적인 디자인을 새롭게 바꾸면 놀라운 변화와 가치 상승과 감격과 행복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너무 늦어서, 귀찮아서, 용기가 없어서, 남의 시선이 두려워서 실패와 버팀의 삶으로 계속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용기를 가지고 새롭게 삶을 디자인하세요.

  다윗은 참으로 현명하고 신실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시고 기뻐하셨습니다. 다윗은 통일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고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정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데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방치되었던 하나님의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다윗의 모습입니다. 법궤를 옮기면서 생각지 않았던 사건이 벌어짐으로 충격과 깨달음을 강하게 주고 있습니다. 법궤를 통하여 주시는 영적인 교훈이 우리 모두에게 큰 변화와 은혜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깨달아야 합니다

  본문 3절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법궤는 모세가 주문해서 제작한 직사각형 상자입니다. 높이가 119cm, 폭이 70cm 정도니까 그다지 큰 편도 아닙니다. 법궤 안에는 만나가 담긴 황금항아리와 싹이 돋은 아론의 지팡이, 하나님이 손수 새겨 주신 돌판이 들어 있습니다. 속죄소라고 부르는 무거운 금판이 궤의 뚜껑 구실을 합니다. 금으로 만든 그룹 둘이 날개를 활짝 핀 형상으로 얼굴을 마주한 채 속죄소를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법궤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대제사장이 법궤가 있는 지성소로 들어갑니다.

전례에 따라서 발목에는 기다란 밧줄을 묶습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의 임재와 충돌해서 죽게 되면 밧줄을 당겨 시신을 끌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놀랍게도 법궤는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11km쯤 떨어진 제사장 아비나답의 집에 30년이 넘도록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신경 쓰는 이가 없어서 존재조차 묻힐 판이었습니다. 다윗은 왕좌에 오르자마자 법궤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국가의 보물을 예루살렘으로 모셔오는 역사적인 날을 기념해서 행진을 벌이기로 하고 3만 명에 이르는 백성을 초대했습니다. 다윗은 준비가 완벽하고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옮기는 데 사용할 멋진 ‘새 수레’를 준비하였습니다. 수레를 끌 황소도 준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새 수레가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궤는 소가 끄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들이 어깨에 메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레를 사용하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 족속의 관습입니다.

  우리는 다윗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선한 동기와 순수한 열심, 좋은 목적을 가졌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하게 됩니다. 그것은 눈을 감고 넘어지지 않거나 가시밭길을 걸어가면서 찔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무모한 일입니다. 현대는 인간 위주와 편리주의가 삶의 전 영역에 걸쳐 고도로 발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무지와 편리주의가 신앙과 교회 안에도 깊숙이 파고들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들이 법궤를 ‘어깨에 메는’ 것을 비효율적이라 간주하여 ‘새 수레’를 사용하려고 합니다. ‘제사장’이 아닌 ‘황소’로 대치하려고 합니다. 편리하고 빠르고 즉흥적으로 처리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무지와 고집은 반드시 실패하며 하나님의 재앙에 봉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좋아보여도 ‘새 수레’와 ‘황소’를 버려야 합니다. 고집을 포기해야 합니다. 버리지 않으면 죽고 멸망당합니다. 오늘 우리만의 ‘새 수레’와 ‘황소’는 무엇입니까? 깨닫고 회개하는 큰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 12-13절 "혹이 다윗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올라갈쌔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

  아비나답의 집 앞에 수많은 군중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제사장의 두 아들 웃사와 아효가 수송 임무를 맡았습니다. 황소가 끄는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드디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나팔이 울리고, 합창단은 노래를 부릅니다. 3킬로미터쯤까지는 모든 게 순조로웠습니다. 그런데 험한 길을 만나 황소가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수레가 흔들리고 언약궤가 기우뚱 기울어졌습니다. 땅바닥에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라고 생각한 웃사는 황망히 손을 내밀어 붙잡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그를 치셨습니다. 성경은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었습니다”(삼하6:7)라고 전합니다. 웃사의 비극적인 죽음에도 교훈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그분의 거룩한 뜻에 따라 임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언약궤를 보살피시고 나르는 일과 관련해서 아주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습니다. 오직 제사장들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먼저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나서야 가능했습니다(레위기 16장). 맨손으로 들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반드시 아카시아나무를 만든 채를 써야 했습니다.

  “고핫 자손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지니 죽을까 하노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 … 고핫 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민 4:15,7:9)”

  웃사는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아론의 후손, 고핫 족속에 속한 제사장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동안 언약궤는 자신의 아버지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니 웃사는 줄곧 언약궤 곁에서 자라났다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만하면 언약궤를 옮기던 날 보여 준 웃사의 행동이 어떤 마음가짐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으십니까? 왕이 언약궤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웃사는 거들먹거리며 말합니다.

  “예, 가져다 드리고말고요. 창고 한쪽에 넣어 두었잖아요. 그까짓 거 얼른 꺼내다 싣지요, 뭐.”

  법궤를 흔하디흔한 상자 취급한 것입니다. 성물(聖物)을 평범한 화물쯤으로 여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대신 편리를 쫓았습니다. 멜채가 아니라 수레를 썼고, 제사장이 메지 않고 황소가 끌게 했습니다. 순종도 없고 제사도 없었습니다. 오직 편리함만을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편리’의 수레에 실리는 것도, 말 못하는 짐승들이 이끄는 것도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찾아오십니다. 하지만 오직 그분의 거룩한 뜻에 따라 임하십니다. 계명을 지키고, 마음을 청결히 하고, 온전한 고백이 이뤄졌을 때, 그제야 비로소 하나님은 임재하십니다. 하지만 석 달 뒤, 왕은 다시 언약궤를 가지러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이전과 전혀 다른 예전에 따라 행진이 시작되었습니다. 황소가 끄는 수레에 싣지 않고 제사장들이 직접 언약궤를 짊어졌습니다. 편리함을 따르는 대신 희생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 사람들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케 하고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대상 15:14-15).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행하매 다윗이 소와 살진 것으로 제사를 드리고”(삼하 6:13).

  하나님이 이번에는 노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다윗은 희생물을 바쳤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인간적인 ‘새 수레’와 ‘황소’를 버리고 법궤를 어깨에 멘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철저하게 하나님 말씀과 방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불순종한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순종한 베드로는 깊은 곳에서 많은 고기를, 순종한 하인들은 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순종한 나아만은 문둥병의 깨끗함을, 순종했을 때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순종하여 놋뱀을 쳐다 본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 받았고, 양의 피를 칠한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았던 것처럼 순종으로 구원과 천국과 면류관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기뻐해야 합니다

  본문 14-15절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때에 베 에봇을 입었더라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오니라"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힘껏 춤을 추었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에는 다윗이 원을 그리며 빙글빙글 돌아가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장면들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세마포 예복이 벗겨지는 것도 모를 정도로 기쁨의 춤을 추었습니다. 시쳇말로 ‘안 봐도 비디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꾸짖거나 불쾌해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경멸하는 미갈을 저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과 함께 기뻐하셨고 마음껏 춤을 추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성경을 다 뒤져 봐도 여기 말고는 다윗이 춤췄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골리앗을 죽이고도 춤추지 않았습니다. 임금이 된 게 너무 기뻐서 왈츠를 췄다는 얘기도 없습니다. 예루살렘을 차지한 뒤에도 춤판을 벌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순간만큼은 잠잠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주님의 가장 큰 선물은 그분 자신입니다. 검붉게 타오르는 노을은 숨 막히게 아름답습니다. 푸르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넋이 나갈 지경입니다. 막 태어난 아기를 보다 보면 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변치 않는 사랑은 삶을 보석처럼 빛나게 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사라진다고 해봅시다. 석양과 바다, 옹알거리는 아기와 따듯한 마음까지 다 사라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남은 것이라곤 황량한 사막뿐입니다. 그래도 우리에겐 모래 위에서 춤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녀들에게 이 진리를 알려 주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주님이 동행하십니다.

  주님은 자녀들을 사랑하시므로 절대 혼자 남겨 두시지 않으십니다. 두려움과 근심, 질병, 죽음에 두려워 떨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잔치를 벌이고 마음껏 뛰놀며 기뻐하십시오. 다윗은 “번제와 화목제 드리기를 마치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에게 축복하고 모든 백성 곧 온 이스라엘 무리의 무론 남녀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 덩이씩 나눠”(삼하 6:18-19)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안에 계시니, 기뻐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지 않습니까? 웃사는 이걸 놓친 것 같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이 궤짝 하나에 담길 만큼 조그만, 그래서 균형을 잡도록 도와주어야 할 분으로 보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맞을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분의 임재 앞에서 서기 전에 스스로 청결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제사도 드리지 않았고, 계명을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회개니 순종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생략하고 수레 뒤에 언약궤를 싣고 신나게 출발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을 사랑하며, 치유해 주시고, 도와주시며, 간섭해 주시는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경건한 마음을 가진 자만이 춤추는 발도 소유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경건과 춤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춤을 추는 마음으로 섬깁시다. 놀라운 변화와 기적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과 신앙을 말씀과 하나님께 맞도록 다시 디자인합시다. 이것만이 번영하는 축복의 길입니다. 깨닫고 순종하고 기뻐하는 축복의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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