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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다리는 사람들 (빌 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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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들 (빌 4:4-9)

기차를 타고 여행할 때 자신의 목적지에 가까이 오면 짐을 챙기고 내릴 준비를 한다. 점점 가까이 오면 짐을 들고 출입구 쪽으로 나가서 줄을 선다. 만약 졸거나 딴 생각에 빠져 있다가 자신이 내릴 역을 지나치게 되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특별히 낯선 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은 항상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우리 인생도 여행하는 나그네와 같다. 하루 앞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인생의 종점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만약 그때를 알고 있다면 자신의 인생을 방탕하게 함부로 살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인생살이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벧전 2: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우리 인간은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적인 종말의 때가 있는가하면 또 한 가지의 종말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키는 우주적 종말의 때가 있다. 우리 개인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또한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셨다.

(마 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마 24:43)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주의 재림 때를 기다리는 성도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만 되는가에 대하여 명령하고 있다.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기뻐하라, 둘째는 관용하라. 셋째는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 가지씩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기뻐하라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예수 믿으면서도 얼굴 표정이 무거운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참된 믿음은 기쁨이 수반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렇게 명령하고 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주 안에 있는데 슬플 이유가 없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 “기쁜 일이 있어야 기뻐하지..” 그러나 그 이치를 깨닫게 되면 이런 대답이 얼마나 잘못되고 불신앙적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외쳤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바울은 엡1:4 이하에서 성도들이 받은 복을 세고 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자녀됨, 죄사함, 하나님의 기업이 됨, 하늘의 비밀을 알게 됨, 성령으로 인치심등... 성도들이 받은 복을 생각하며 감격해 하는 것이다.

성도에게 기쁨이 없다 함은 자신이 주님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증거다. 모든 것 다 잃었다 할지라도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기뻐할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가 이렇게 노래했다.

(합 3: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 3: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지금 습하고 어두운 로마의 지하 감옥에서 이 서신을 쓰고 있다. 범죄자로서 감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다 감옥에 갇힌 상태다. 그의 육신이 비록 사슬에 매여 있는 고통의 상황에 놓여 있다할지라도 주님이 그와 함께 계시기에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도리어 그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기뻐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빌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쁜 일이 있을 때만 기뻐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항상 기뻐해야 한다. 이유는 내 안에 구주가 되시는 예수께서 성령으로 내주하고 계시고, 장차 재림의 날, 그 주님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고, 한 식탁에 마주 앉게 될 날을 소망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2.관용하라
(빌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관대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을 너그럽게 용납하는 태도를 가르킨다. 그렇다고 불의 부당한 일에 대하여서도 용납하라는 뜻은 아니다.

여러분 다툼이 일어나는 원인이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볼 때 상대방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이 좁아져서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앞서서 2절 말씀에 빌립보교회 안에서 다투는 두 여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빌 4: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여기 소개되고 있는 두 여인은 빌립보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일꾼들이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서로 의견이 충돌하여 관계가 나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주의 일에 열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하고 양보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다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권할 일이 못된다.

관용이란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덮어준다는 의미가 있다. 허물은 덮어줄 때 덮어진다. 예)대선 후보들 보며 기쁨이 사라진다. 두 번째 의미는 세워준다는 뜻이 있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해 주면 서로 힘을 얻게 된다. 이것을 윈윈이라 한다. 서로 세워주면 멋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고 기쁨을 공유할 수 있다.

미국의 유명한 코미디언 중에 밥 호프라는 사람이 있다.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월남에서 돌아온 부상군인들을 위한 공연이 준비되고 있었는데 행사 총책임자가 밥 호프를 초청했다. 그러나 그는 너무 바빠서 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밥 호프가 빠진 행사는 불가능하다 생각하고 간곡히 부탁해서 참석했는데 조건이 있었다. 5분 정도 얼굴만 보이고 내려오는 것이었다. 주최측은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서 공연을 진행했다.

그런데 5분 약속하고 올라간 밥 호프가 10분, 20분, 30분이 지나도 내려오지 않았다. 40분이 다 되어서야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진행 감독이 놀라 영문을 물었다. 그 때 밥 호프가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 앞줄에
있는 두 친구 때문에 그렇습니다.“ 감독이 되물었다. ”두 친구가 어떻게 했길래 그렇습니까?“ 감독이 궁금해서 가 보니 맨 앞 줄에 상이 군인 두 사람이 열심히 박수치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오른팔, 한 사람은 왼팔을 잃은 군인이었다. 두 사람이 남아 있는 팔로 한 사람처럼 박수를 치고 있었다. 밥 호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두 사람은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한 팔을 잃어버린 두 사람이 힘을 합하여 함께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참된 기쁨을 배웠습니다.“

슬픔과 고통, 다툼과 갈등이 많은 세상에서 기뻐하는 삶을 원하는가?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고 그들을 세워주라. 관대한 마음, 관용의 정신을 배우라. 그리고 그 관용을 이웃에게 베풀 수 있기를 바란다. 말세의 특징은 개인주의 이기주의, 사랑이 식어지는 시대다. 이 험악한 시대에 성도들의 관용이 필요하다. 마음을 넓히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라. 그리고 세워주라.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두 번째 태도이다.


3.기도하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사도 바울은 염려하는 대신에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염려는 기쁨을 빼앗는 원인이 된다. 그러면 왜 염려가 생기는가? 하나님을 떠나 세상으로 마음이 기울어지기 때문이다.

주석가 이상근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필요와 위험을 느낄 때 그것이 세상을 향하면 염려가 되고, 하나님을 향하게 되면 기도가 된다. 신앙이란? 염려에서 기도로 돌아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염려하는 것을 경계하셨다.

(마 6: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예수님께서는 세상 일들로 인해 염려가 생길 때 능력의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가르치셨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염려가 생길 때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염려할 시간 있으면 기도하라.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어떻게 기도하는가?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나의 처한 환경에 대하여 불평 원망하지 말고 내 모습 이대로 나에게 허락하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인생의 근심은 하나님의 평강이 해독제가 된다. 시대의 종말이 가까울 수록 세상은 불안해진다. 그 불안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 세콤으로, 전자장치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강으로 해결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불안”이라 할 수 있다. 불안은 근심과 염려를 동반하게 된다. 몰려오는 불안과 근심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 앞에 구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길 바란다.

말세의 특징 중 또 하나는 부도덕이다. 사람들의 염치가 없어지고 몰인정해 진다.
(마 24:12)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성도들의 광법위한 도덕적 태도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빌 4: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1)참될 것 - 진실함
2)경건할 것 - 신앙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태도
3)옳을 것 -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
4)정결할 것 - 도덕적으로 깨끗할 것. 순결함.
5)사랑할만 할 것 -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을 만한 태도.
6)칭찬할 만 할 것 - 사람들로부터 칭찬들을 만한 높은 수준의 인격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소유할 것을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8절 마지막 부분에서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단순히 생각하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깊이 마음에 두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대한 도덕적 기대는 대단히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저녁에 거리를 돌아다녀 보면 시내 상가들과 아파트 단지마다 온통 성탄 장식으로 화려하다. 그러나 그곳엔 평강이 없다. 왜냐하면 성탄 장식은 있어도 예수님을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2000년 전, 예수께서 오셨을 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이 이렇게 노래했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님이 계신 곳에 기쁨이 있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 평화가 있다. 그러나 기쁨이 없는 곳에는 예수님도 안 계시고, 다툼과 근심만 있는 곳에는 예수님도 안 계신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 속에 정말 평강이 있는가? 평화가 있는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하고 있다.

(빌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미 우리에게 주신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관용을 나타내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그리고 염려하기보다는 먼저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는 성도가 되길 바란다. 그래서 나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의 평강이 충만해 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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