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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눅 13: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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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 맺지 않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눅 13:6-9)

(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8) 대답하여 가로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포도원에 심긴 무화과나무

비유가 좀 이상합니다. 포도원에는 포도나무를 심어야 합니다. 그런데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사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흔했습니다. 포도원에 포도나무만 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과일 나무들도 섞어 심었습니다. 주님께서 오늘 비유 말씀을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열매를 맺지 못했다 하여 ‘열매 맺지 못하는 포도나무의 비유’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고 비유를 들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원래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선택받은 것에 대한 비유라 할 것입니다.

포도원은 원래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불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심겨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정통 이스라엘이 아니라 버림받은 죄인과 세리들이 심겨졌습니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이 그 자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현상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감람나무에 비유하여 설명합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여졌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 되었은즉”(롬11:17) 이스라엘은 참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그 가지가 꺾이고 돌감람나무가 대신 접붙임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돌감람나무는 이방인들을 상징합니다.

이런 비유들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격이 없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우리들이 끝까지 싸워야 할 것은 당연하다는 의식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서게 된 것도, 내가 누리게 된 특권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원망이 생깁니다. 기대한 만큼 채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연의 반대는 감사입니다. 감사는 모든 것이 은혜라는 의식입니다. 거저 주어졌다는 의식입니다. 원래 내 자리가 아닌데 이 좋은 곳에 심겨졌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감사가 있어야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우리는 최선을 다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보다 5-6배 정도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양분도 더 많이 흡수합니다. 7절에 주인이 “어찌 땅만 버리느냐”고 한탄하는데 사실 무화과나무는 다른 어떤 나무보다 많은 양분을 빨아들인다고 합니다. 다른 나무들이 먹을 양식을 더 먹고 자랍니다. 이는 마치 우리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나’라는 나무가 자라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부모님들의 희생, 주위 친구들과 사람들, 사회가 아낌없는 투자를 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의식입니다. 내가 많이 받았다고 생각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다시 희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받은 것에 비하면 나오는 것이 너무 적습니다. 지금 무화과나무가 당면한 문제가 바로 우리의 문제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그림 중에 독일의 화가 뒤러가 그린 <기도하는 손>(1500년대)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손 마다마디가 뒤틀리고 불거진 매우 거친 노동하는 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손에는 유명한 일화가 담겨 있습니다. 뒤러와 그의 친구 한스는 유명한 화가가 되는 꿈을 안고 도시로 갔습니다. 그러나 둘은 가난했으며 그들은 돈벌이를 하면서 그림을 배워야 했기에 제대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한스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뒤러, 네가 먼저 그림을 배워라. 내가 돈을 벌어서 너를 돕겠다. 나중에 네가 성공해서 그림이 잘 팔리면 나는 그때 그림 공부를 하도록 할께.”

뒤러는 그럴 수 없다고 거절했지만, 한스는 진심으로 권했고, 뒤러는 그림 공부에만 전념했습니다. 한스는 고생 고생을 해가며 돈을 벌어서 뒤러의 학비를 댔습니다. 공부에 전념한 뒤러가 학교를 마칠 때쯤, 그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뒤러가 한스를 위해 뒷바라지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연락 없이 한스를 찾아간 뒤러는 한스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제 친구 뒤러가 공부를 마치고 그림이 팔리는 화가가 되게 해주신 것에 감사 드립니다. 저의 손은 노동으로 마디가 뒤틀려버려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지만, 뒤러는 앞으로도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해주세요.”

한스의 이 기도를 들은 뒤러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뒤러는 노동으로 마디가 뒤틀렸지만 자신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한스의 손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저 <기도하는 손>은 다름 아니라 친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한스의 손이었습니다.

두 친구의 눈물겨운 우정을 그린 일화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습니다.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있기까지는 우리를 위해 희생하는 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흥한 대신 그들의 손은 뒤틀리고 거칠어졌습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엄청난 희생과 사랑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죄일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그 손이 못에 박혔고, 그 고귀한 희생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런 정성과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셨는데 우리는 지금 무슨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삼년을 구하되

주인이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자라는 데 보통 3-4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그때 이후가 되면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열매가 나올만한 때쯤 갔는데 열매가 없습니다. 내년에는 열리겠지 하고 다음 해에 갔는데 역시 열매가 없습니다. 이렇게 3년이 흘렀지만 열매가 없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과원지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7절입니다. “과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실과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

주인은 열매를 구합니다. 열매를 기다리며 오랜 시간을 참았고, 투자를 했고, 여러 희생을 감수했습니다. 우리가 오랜 시간 교육을 받고, 시행착오를 거친 이유는 이 열매를 맺기 위해서입니다. 때가 되면 그에 맞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터 위에 심겨졌습니다. 주님께서 오랜 시간 말씀을 주시고 성령을 주시고 시간을 드리며 인내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에 맞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린 묘목 단계인 것처럼 여전히 은혜만 바라는 분들이 있습니다. 꽃에 취해 자기만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연조가 깊으면 그만큼 뿌리도 깊어야 합니다. 그 나무에서 사람들이 기대할만한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대한 세상의 비판이 심한 이유는 그에 합당한 열매를 잘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구의 4분의 1이 믿는다고 하면, 그 역사가 120년이 넘어간다고 하면 그에 합당한 열매가 열려야 합니다. 물질보다는 사람 사랑의 열매, 부패보다는 정직의 열매, 분열과 불화보다는 평화의 열매, 불평과 탄식보다는 감사의 열매, 이기적인 욕망보다는 나눔과 섬김의 열매가 맺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자기 축복만 구하고 나누는 데는 인색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국 크리스천과 일본 크리스천이 만나서 자가 나라의 신앙열에 대하여 자랑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크리스천이 먼저 이렇게 자랑합니다. “우리는 선교 역사가 12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전 인구의 25%가 크리스천입니다. 당신네는 선교 역사가 5백년이 넘어가는데 어째서 1%를 넘기지 못합니까?” 가만히 듣고 있던 일본 크리스천이 이렇게 반반문합니다. “그러면 한국은 이미 천국이 되었겠군요?”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 바닷물에 들어 있는 소금은 3.5%밖에 되지 않지만 엄청 짜고 바다의 부패를 방지합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지금 어떤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열매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회에 주신 비전의 말씀들이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들입니다. 아직은 3년이 되지 않아 주님께서 참고 계신데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열매들이 보이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생각하실 것입니다.

찍어내어 버리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그만큼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대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열매를 맺기까지 참고 인내하십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3년을 참았다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은 더 많은 시간을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가 무한정 계속되지는 않습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이미 심판은 내렸습니다. 주인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내어 버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자 과원지기가 이렇게 말씀합니다. 8절과 9절입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실과가 열면 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금년 한 해만 더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름을 더 많이 주는 특단의 조치를 할 터이니 그래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때 찍어버리라고 간청합니다.

우리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뿌리에 이미 도끼가 놓여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열매 맺지 못하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눅3:9) 우리들의 현재의 삶은 집행유예의 인생입니다. 형이 일시 면제 되고 지켜보고 있는 삶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긴장감이 있습니까? 하나님 말씀이 힘든 이유는 우리의 현실을 똑똑히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진실은 괴롭고 불편합니다. 주님의 비유 중에는 이처럼 심판의 비유들이 많이 있습니다. 심판이라는 극단적인 현실 앞에서 우리의 삶을 회개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집행유예의 삶은 덤으로 사는 삶입니다. 이미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 한 번 더 참으시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덤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심각하기도 하지만 신나기도 할 것입니다. 물건을 사고 팔 때 덤으로 주는 것처럼 신나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한 번씩은 죽음의 위기를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누구는 암으로, 죽을 병으로, 심한 교통사고에서 살아났습니다. 저만 해도 큰 교통사고가 날 뻔 했습니다. 호남고속도로 상에서 3중 추돌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때 이미 죽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할 일이 있어서 살려놓으셨습니다. 뒤에 달려들던 트럭을 소형차로 바꾸어놓으심으로써 제 생명을 연장시키셨을는지 모릅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은 덤으로 사는 삶입니다. 덤이라고 생각한다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정신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그 모습으로 천국에 오면 부끄러우니까 좀 더 열매를 맺고 오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덤으로 더 산다고 하여 반드시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히스기야의 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의 대표적인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병에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하여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왕하20:1)고 최후의 통첩을 보냅니다. 그러자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심히 통곡하며 살려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생명을 15년을 연장시켜주십니다. 15년을 덤으로 더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장된 생명은 단순히 죽음을 연기시켜 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더 보람 있게 살도록 허락된 15년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가 이 15년의 삶을 더 살면서 행했던 일들이 그렇게 아름답지 않습니다.

히스기야가 다시 덤으로 산 사건이 열왕기하 2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20장 후반부에는 히스기야가 행한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하나는 히스기야가 병들었을 때 바벨론에서 사신을 보낸 사건입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자신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자기 왕궁에 있는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장차 임할 재앙에 대해서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날이 이르리니 무릇 왕궁의 모든 것과 왕의 열조가 오늘까지 쌓아 두었던 것을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하나도 남지 아니할 것이요 또 왕의 몸에서 날 아들 중에서 사로잡혀 바벨론 왕궁의 환관이 되리라 하셨나이다”(왕하20:17,18) 결국 이 예언대로 바벨론에 의해 이스라엘이 완전히 망하고 포로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 일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바벨론은 히스기야를 문병 온 것이 아니라 정탐하러 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히스기야가 자기의 국력을 자랑하기 위해 교만의 어리석음을 보인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런 선포를 들은 후에 히스기야는 또 눈물로 기도하기보다는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당신의 전한 바 여호와의 말씀이 선하니이다 하고 또 가로되 만일 나의 사는 날에 태평과 진실이 있을진대 어찌 선하지 아니하리요” 내 대에만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미래를 바라보지 못하는 히스기야의 어리석음이 이스라엘을 패망으로 이끕니다.

둘째는 20장 21절의 므낫세를 낳고 그를 왕위에 오르게 한 사건입니다. 열왕기하 21장 1절에서 므낫세가 왕위에 오를 때가 12세라고 하였으니 므낫세는 히스기야가 15년 생명을 연장 받은 기간 중에 나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므낫세 왕은 이스라엘 역대 왕들 중에 가장 악한 왕으로 기록이 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55년을 통치했는데 일월성신을 비롯한 모든 우상들을 다 섬겼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에 아세라 목상을 세웠으며 자기 아들을 불로 태우는 번제를 행하는 사술을 행했다고 합니다. 이런 므낫세의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하게 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 성경을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일이 유다에 임함은 곧 여호와의 명하신 바로 저희를 자기 앞에서 물리치고자 하심이니 이는 므낫세의 지은 모든 죄로 인함이며 또 저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그 피로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였음이라”(왕하24:3-4)

물론 15년의 목숨을 더 산다는 것 자체가 귀합니다. 생명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덤으로 산다고해서 아름다운 열매를 남기는 것은 아닙니다. 히스기야의 경우가 그렇다 할 것입니다. 옛 습성을 끊어내지 못하면 우리는 1년 더 연장된다 할지라도 여전히 열매 없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 나무의 습성이 어디로 가겠습니까? 각고의 노력과 자기 부인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덤으로 사는 인생들입니다. 누구나 한 번쯤 죽음의 위기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그만큼 현명해졌는가? 아닙니다. 더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전과 똑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찍어 버리라는 주인의 명령에 과원지기는 1년만 더 연장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설득합니다. 8절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과원지기는 무화과나무 주위를 파고 거름을 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겠다고 합니다. 회사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투자한 것에 대해서 성과가 없으면 잘 평가해보아야 합니다. 그 일을 폐기 하든지 지속하려면 그 일을 살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가 필요합니다.

몇 년 전 베스트셀러 였던 책중에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 저) 란 책이 있습니다. 두 마리 생쥐와 두 명의 꼬마 아이(헴과 허) 어렵게 해매다 치즈 창고를 발견합니다. 그 치즈를 먹으며 행복하게 살던 그들에게 위기가 닥칩니다. 치즈가 점점 없어져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위기를 재빨리 알아차린 생쥐들은 다시 치즈를 찾아나섰습니다. 문제는 인간들입니다. 인간들은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합니다. 헴이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 마침내 그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시뻘게진 얼굴로 화를 내기 시작합니다.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지!” 원망하다가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치즈를 훔쳐갔다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서 “나는 이곳이 좋아, 편해. 다른 곳은 몰라. 다른 곳은 위험해.” 하고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습니다. 나머지 한 명(허)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치즈를 찾아 떠납니다. 치즈에 대한 미련을 버릴수록 새 치즈를 빨리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 위에 놓여 있다고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단지 1년의 시간이 유예되어 있을 뿐입니다. 3년 동안 열매맺지 못했는데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열매가 맺혀지겠습니까? 변화해야 합니다. 비상수단을 써야 합니다. 희망이 없는 가지는 잘라내고 땅을 파고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저는 우리 믿음의 성도들에게 세 가지 거름을 줄 것을 요구하고 싶습니다.

첫째는 말씀의 거름입니다. 더욱 더 열심히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은 내 인생을 변화시키고 우리가 어떻게 나가야 할지 방향을 가리켜 줍니다. 말씀 속에 희망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매일 2-3장씩 읽었다면 더 많이 읽으십시오.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대해서 무어라 말씀하시는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읽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성루의 높은 망대에 올가갔습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합2:1) 이런 불퇴전의 자세로 나아갔을 때 하나님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유명한 말씀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둘째는 기도의 거름입니다. 기도하면서 우리는 새 힘을 공급받습니다.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됩니다. 그냥 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금식기도가 필요합니다. 작정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기도들은 배수진의 기도라 할 것입니다. 야곱이 얍복 강에서 더 이상 물러 설 수 없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던 그 간절한 기도가 있을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셋째는 헌신의 거름입니다. 헌신해야 합니다. 자기를 투자한 만큼 열매가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옥합을 깨는 헌신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 어떤 한 여인이 주님께 찾아와서는 순전한 향유를 가지고 와서는 그 옥합을 깨뜨리고 주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모든 일에는 이런 헌신이 있어야 일이 됩니다. 누군가 희생하고 자기 땀과 눈물을 바칠 때 그것을 기초로 하나의 기업이 서고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사실 기업하시는 분들을 볼 때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쏟아 붓습니다. 실패하면 셋방살이 할 각오를 합니다. 이런 헌신이 있기에 큰 기업을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옥합을 깨는 헌신이 있을 때 열매가 나타납니다.

우리 주위를 두루 파고 이 말씀과 기도와 헌신의 거름을 부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유예시켜 주신 그 기간에 우리 교회와 우리 인생에서아름다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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