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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망을 이루는 신앙 (롬 8: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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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롬 8 : 24 - 30
제 목 : 소망 중에 거하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가 물입니다. 물이 없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먹을 것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물이  없다면, 무용지물인 것입니다.  왜요?  먹다가 목 맥혀 죽기 때문에....

또 중요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공기지요.  물과 마찬가지로, 공기에 없으면 사람이 살 수가 없습니다.  단 5분간만 공기를 마시지 않더라도, 우리의 뇌는 죽어 버립니다.  뇌사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공기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잡을 수도 없는 것이지만, 이것이 없으면 이 땅에 생명은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기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 인생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삶만큼, 불행한 삶이 없습니다.

여러분 소망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가 이루고 싶은 일이라든지, 또 자기가 소유하고 싶은 것을 얻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소망인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는 가진 것이 없지만, 장래에 충만하게 얻을 것을 기대하는 마음, 다시 말해, 내일에 대한 기대가 바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소망이 없이, 그저 민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이 살아간다면, 그 인생에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 인생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많이 가졌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재산을 남들보다 많이 가지고 있고, 명예와 권세가 남들보다 높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한 삶을 살아가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서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단순히 그렇게 생각할 뿐인 것입니다.  그들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행복하지 못한 것을 보게 된다는 거지요. 

오늘날 이 현대 사회에 일어나는 병폐 중 하나가 무엇입니까?  자살입니다. 
그런데 자살을 하는 사람들의 경제적인 레벨을 조사해 보니까, 경제적으로 상위 층에 있는 사람들이 자살률이 훨씬 더 높더라는 겁니다. 
특이한 것은, 인테리일수록, 자살률이 높다는 겁니다. 
우리나라 사망자 100명 당 4명이, 자살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OECD 29개 국가 중에, 자살률이 4위라는 사실,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경제 대국으로 부러워하는 일본은, 자살률이 세계 2위라고 하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경제적으로 나은 환경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일까? 

여러분,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이유 없습니다.
그들이 인생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렸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볼 때는,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에게는  내일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에, 그 공허함을 이겨내지를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 보면, 참 세상은 요지경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돈이 없어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살아가는데, 돈을 재 놓고 사는 부유한 사람들은, 스스로 죽는 세상입니다.  배운 것이 없어, 사람들에게 무시당해 억울해 죽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멀쩡히 살아가는데, 많이 배우고 의사요, 학 박사 된 사람들은, 삶을 고민하면서 자살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니 이런 모습들이 얼마나 아이러니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에 있어 공기나 물처럼 중요한 것이, 바로 소망인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곧 소망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멀쩡히 살아있어도 죽게 되지만, 인생에 소망이 있는  사람은, 죽을 지경에 처해 있을지라도, 다시금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미국의 유명한 암 전문의 가운데, 버니시걸 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이 돌보는 암 환자들에게, 몇 가지 꼭 묻는 질문이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이 무엇인가 하면, “당신은 100살까지 살고 싶습니까?” 라는 질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던져보면, 환자들 가운데 누가 병마를 이기고 회복할 수 있는 사람이고, 또 누가 도중에 포기하고 결국 죽게 될 사람인지를,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다고 합니다. 

이 질문에 분명한 소망을 가지고 “예, 저는 100살까지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생존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지 못한 환자들은, 대부분이 병실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 성도들은 참으로 복된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지 않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소망의 근원을 알지 못하기에, 인생에 어려움을 당하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황해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인생의 소망에 대한 분명한  근원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 근원이 어디입니까?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이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왜 복된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날마다 하늘 소망을 공급받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사람들, 특별히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과 같은 사람들은,  늘 그 인생이 소망으로 충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예배하는 성도들이, 소망이 충만할 수밖에 없는가? 
이 예배 시간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우리에게 소망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는 끝난 인생이 아니야.  너는 세상을 살아야 할 충분한 가치가 있어.  너의 인생에 가장 좋은 때는, 아직 오지 않았어.”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를 끊임없이 위로하시며, 용기를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렘 29 : 11절에서 말씀하지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함이라.”  믿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실제는 어떻습니까?  이런 소망의 말씀을 늘 접하는  성도라 할지라도, 세상을 살다보면, 때때로 인생이 힘들고 어려워지는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기운이 빠지고, 힘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서도, 이런 감정 가지면서, 이 2008년도를 맞이하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인생의 위기의 때에, 그런 인생의 절망의 때에, 우리는 신앙인답게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해야 하는데, 그 마음이  너무나도 낙심되고 절망되었기 때문인지, 교회에 나오는 것을 주저하고, 심지어는 싫어하는 경향까지도 있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저 만사가 귀찮으니까,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것까지도, 귀찮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40대 중년 그리스도인이, 고향의 늙으신 어머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최근에 교회가 가기 싫어졌다는 겁니다.  그는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고, 둘째는 요즘 장로님들의 기도가 너무 길어서 짜증스럽고, 셋째는 예배 봉사자들이 준비 없이 봉사하는 바람에, 예배의 전체 분위기가, 은혜롭지 못해서 교회에 가기가 싫다는 것입니다.

이 편지를 받은 그의 노모가,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아들아, 그래도 교회는 가야 한다.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선택이 아니고 필수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네가 선택할 일이 아니다.  셋째는, 그래도 네가 교회의 담임목사인데, 교회 가야지 안가면 어떡하겠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는 교회의 목사도, 심지어는 담임목사님도 교회가기 싫을 때가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우리 교회 담임목사님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들어도 잘 들어야 하는데, 꼭 반 틈만 듣고 말 옮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게가 보면, 그 사람은 조 집사일 때가 많아요. 조 집사, 설교 시간에 꾸벅꾸벅 조는 집사를 조 집사라 그럽니다. 
아예 설교 시간에 주무시는 집사는요?  주 집사....  그러니까 설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신 차리고 잘 들어야 되요.

어쨌든 목회자들도 일반 성도들과 같이, 삶에 권태와 탈진, 낙심을 경험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그러니, 일반 성도들인 여러분들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오늘 여러분 가운데, 혹시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과 낙심에 빠진 분이 계십니까?

세상을 살다보면, 기운을 잃을 수도 있고, 낙심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이 인생의 위기를 잘 극복하고 넘어 가야 하는데, 어떻게 이 위기를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까? 
답은 한 가집니다.  언제나 한가지예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하나님을 향해 다시금 소망을 가질 때, 우리는 인생에 닥친 위기를, 극복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에이, 목사님, 실제로 그렇게 잘 안 됩니다.  목사님도 그런 위기 당해보세요.” 예, 맞습니다.  맞고요...  이런 인생의 위기 중에, 더군다나 갑작스럽게 닥친 인생의 위기 중에, 소망을 가지며 다시금 일어선다는 것이, 사실 말처럼 참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실제로 불이 나면, 119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런데 실제로 불이 나는 상황이 닥치면, 당황해서 어디다 전화를 해야 하는지를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114에 전화해 불났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잖아요?  모두가 생각은 뻔하지만, 실제적인 삶 속에서는 잘 안되는 것이, 바로 이 소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지요?  왜 우리의 실제적인 삶에서는, 이처럼 소망을 가지기가 어려운 것인가?  왜 그런 줄 아십니까?  사람들이 소망이 너무 멀리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신앙적 소망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흔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권면하지요?
“성도님, 소망을 가지세요.  하나님이 분명 도와주실 겁니다.”
참 위로가 되는 소리인데,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권면이 마치 뜬 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권면이 고맙기는 하지만, 실제적인 삶에서는,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의 신앙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적어도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이런 잘못된 신앙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인생에 어떤 위기와 환난과 고난이 닥쳐온다 할지라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만 소망하며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진정한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신앙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인생의 위기를 당할 때, “호랑이에 잡혀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고 하는데,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호랑이와 같은 인생의 위기 시에도, 오히려 호랑이 등에 업혀 더 빨리 달려가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살아가는데, 신앙을 가진 우리 성도들, 믿음을 가진 우리 성도들이, 이런 세상 사람들보다 못해서야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할렐루야!!!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셨습니다.  그런데 그 배가 출발하고 얼마 되지 않아, 큰 풍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배에 물이 들어오고, 배가 거의 깨어질 것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배가 깨어지지 않고, 결국 안전하게 건너편으로 건너가게 되었던 것이,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주님이 그 배에 함께 계셨기 때문에, 아멘!!! 
주님은 출발하시기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누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  “우리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라고 말씀하지지 않았습니다.  “내가” 라고 했으면, 우리는 걱정해야 합니다.
왜입니까?  그 상황은 주님만 안전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 말씀하시길, “우리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 말씀대로, 그 배에 있던 사람 전체가, 다 안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으시고, 변개함이 없으신 줄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니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 마음에 그대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마음에 믿게 되어질 때,  그 말씀대로, 우리의 삶에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살전 2 : 13절 말씀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할렐루야!!!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한다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과 내 생각을 일치시킬 때, 그 때에 역사함이 나타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생각을, 곧 나의 생각으로 받아들이고, 그 생각대로  삶 속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때, 비로소 우리가 소망한대로 이루어지는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소망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소망은 곧, 장래에 대한 나의 생각인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것이, 신앙 안에서 내가 가진 생각대로,  결국은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물을 마셨습니다.  나이아가라 폭포가 어느 나라에 있는지 아십니까?  북미 캐나다에 있습니다. 
이 폭포에서 물을 마시고, 고개를 돌려 옆을 보니까, 영어로 “POISON” 이라고 써 있는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여러분, 포이즌이 무슨 뜻입니까?  독약이라는 뜻입니다.  그 물이 독약이라는 겁니다.
그 표지판을 본 순간, 갑자기 배가 아프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원으로 달려가면서 이제 곧 창자가 녹아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급하게 병원을 찾아가서 의사를 만났는데, 의사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는 껄껄 웃더라는 겁니다.  의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라고 진정을 시키고서는, 자기가 웃은 이유를 설명을 해 줍니다.

선생님, “POISON” 이란 말은, 영어로는 독약이라는 말이지만, 불어로는 낚시 금지라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오해하신 겁니다.  캐다나는 영어보다 불어를  더 많이 쓴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이 그의 배를 아프게 했습니까?  독약이 그의 배를 아프게 한 것입니까?  그는 독약을 마시지도 아니했습니다.  그의 배를 아프게 한 것은, 단순한 그의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가 포이즌을 독약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결국 그 믿음대로,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스스로 괜찮구나 생각했기 때문에, 다시금 살아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 자기 생각대로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인생이 이와 같을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실제적인 상황과는 상관없이, 다 자기 생각 때문에 망하고 죽는 것입니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함이라.” 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마음에 믿고, 하나님의 생각을 내 생각처럼 믿고 살아가야 하는데, 우리는 스스로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대로 살아가다가 결국에는 망하고 죽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여러분의 생각이 일치합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소망이 있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이 시간을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시키십시오.  그리고 항상 생각을 크게 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의 틀을 바꾸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실 때, 먼저 그 사람의 생각부터 바꾸시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말하기를,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까지도 바뀐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철학자도 이러한 진리를 깨닫고 있는데, 하늘의 진리의 말씀을 대하는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면, 어찌 진정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인생을 소망 중에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생각을 바꾸십시오.  그 생각이 여러분의 삶을 바꾸고, 장래에 대한 운명을 바꾸게 될 줄로 믿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아멘!!!  하나님의 생각과, 여러분의 생각을 일치 시키십시오.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축복의 계획이, 머지않은 장래에, 여러분의 삶에 온전히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의 인생에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반드시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결혼을 했는데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남편은 자식이 귀한 집에 자랐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자식을 낳는 것이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했는데도, 아내가 아이를 못 낳습니다.  낙심이 됩니다.
그래서 다그치지요.  왜 당신은 아이를 못 낳는 거요?  다른 집 여자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잘만 낳는데, 왜 당신은 아이를 못 낳는 거요?

그런데 아내는, 도무지 그런 남편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남편을 설득을  해 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잘못되었다고 하고, 남편은 아내가 잘못 되었다고 합니다.  누구의 잘못일까요?  이야기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남편이 잘 못되었다고 말을 합니다.  왜입니까? 
이 부부는 결혼한 지, 이제 두 달 밖에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스개 소리입니다만, 자칫 우리가 가진 소망이, 이러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자식을 보는 것이 소망이었지만, 꿈에도 소원이지만, 아이를 얻기 까지는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열 달이 지나야 아이를 낳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 때까지는, 인내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 성도들이 소망을 품고 살아가면서도, 소망이 안 이루어진다고 불평합니까?  인내하질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를 못하고, 자꾸만  내 때를 고집합니다.  그리고는 이루어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향해, 잘못 되었다고 불평합니다.  나아가 원망하기까지 합니다.  잘못된 신앙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신앙이, 이와 같을 때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래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하나님께 기도한 것에 대한 응답의 소원이 있습니까?  그 소망, 반드시 이루어질 질로 믿습니다.
그 기도, 반드시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그 소망이 이루이지기까지, 여러분의 기도가 응답이 되기까지, 좀 더 인내하고 기다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24절, 25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믿습니까? 

화랑에 가 보신 적 있습니까?  저는 그림에는 별로 취미가 없기 때문에 일부러 가지는 않습니다만, 어쩌다가 친구 따라 한번 가 본 일이 있습니다.
화랑에 들어가 보면, 여러 가지 작품들이 벽에 걸려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볼 때마다 저는 깜짝 놀랍니다.  왜입니까?  저것도 그림인가? 제가 그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솔직히 그 그림을 보면,  별로 잘 그렸다는 생각이 안 듭니다.  “저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드는 그림도 있다는 거지요.

그런데요, 그 그림을 보면서, 제가 더 깜짝 놀라는 것은, 그 밑에 적혀져 있는 가격 때문입니다.  별로 잘 그린 것 같지도 않은 그림이, 수 백 만원, 수 천 만원 합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저 돈이면, 탕수육이 몇 그릇이고, 피자가 몇 판이냐?  쌀이 몇 포대냐? 

그런데, 그 작품에 대한 소개를 해 놓은, 팜플렛을 보면서, 이런 저의 무지함과, 무례함이 깨뜨려졌습니다.  무엇을 보고서입니까?  그 그림을 그리는데 소요된 기간 때문입니다.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데, 적어도 1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되었다는 겁니다.  어떤 그림은, 3년이 걸린 그림도 있습니다. 
그 긴 기간동안을 작업을 하면서, 작가의 혼이 담아내고, 정성을 담아 놓았기에, 그렇게 좋은 작품으로 인정받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세상의 그림 하나도, 그 그림이 작품으로 완성되기 까지 걸리는 시간이 있다면, 오늘 우리의 소망이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왜 없겠습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우리 성도들을 귀하게 여기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소망을, 가장 아름답게 이루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고 계시는 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시간에,  주의 뜻 이뤄지길 기다려,  하루 하루 살동안
주님 인도하시니,  주 뜻 이룰 때까지,  기다려
  주의 뜻 이뤄질 때 우리들의 모든 것,  아름답게 변하리,  기다려”
기다리시길 바랍니다.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은을 깨끗하게 세공해서 아주 값비싸게 파는 세공업자들은, 먼저 뜨거운 풀무 불에 은을 집어넣습니다. 
뜨거운 열을 가하면, 은이 녹아서, 은 속에 포함된 불순물둘이 다 빠져버리지요.  그러나 불순물이 다 빠져 버렸다고 해서, 또 곧 바로 건져내질 않습니다. 

은을 건져내는 데도, 때가 있다는 겁니다.  너무 빨리 은을 건져도 안 됩니다.  또 너무 늦게 건져도 안 됩니다.  불순물이 다 빠져버려도, 은이 너무 깨끗해서 얼굴이 비춰질 정도의 깨끗한 모습이 되었을 때, 그 때 얼른 끄집어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시간을 놓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프로는 그 시간을 기가 막히게 안다는 겁니다.  그래서 프로급인 세공업자들은, 풀무 불 속에 있는 그 은에, 항상 시선을 고정시키고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 때를,  정말 순수하고, 깨끗한 은으로 거듭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성도들이 살아가면서, 때로는 인생에 고통을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풀무 불과 같은 극심한 고난에 빠져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라도, 우리는 절대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입니까?  그 때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게 닥쳐진 그 고난이, 당장은 고통이지만, 우리가 순은과 같이, 또는 정금과 같이 세상에 존귀한 자로 세워지기 위해서는, 이런 고난과 시련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우리들을, 그냥 내 버려두질 않습니다. 
우리에게 항상 시선을 고정시키시고 바라보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아무개 집사를 이 고난 가운데 더 두어야 하나?  아니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나?”  하나님은 그것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가장 적절한 시간에,  하나님은 그 뜨거운 고난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내 주십니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하게 되고,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 존귀한 자가 되고, 세상에 강한 자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을 언제나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인내하면서, 저와 여러분의 간절한 소망을, 이 2008년도에도 온전히 성취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여러분의 인생에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기도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는 매개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어도, 이 기도가 없다면, 결코 그 소망은 이루어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감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감나무 밑에 누워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때가 되면 감이 떨어지겠지요?  그러나 떨어진 그 감이 온전하겠습니까?  떨어진들, 제대로 받아먹기나 하겠습니까?  입만 더러워지고, 옷만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결실의 계절이 되어 감이 잘 익었어도, 장대를 들고 감을 조심 스럽게 따야, 그 감이 온전히 보전되어지고, 또 감의 맛을 온전히 맛볼 수 있는 것이지, 그냥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기다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도 마찬가집니다.  우리의 소망을 이루는 능력이 어디에서 나옵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줄 믿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가 가진 소망이 하나님께 알려지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을 이루시기 위해, 그 기도를 받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어떤 나이 많은 어부가, 젊은 어부에게 노를 맡겼습니다.
그 젊은 어부는 두 손으로 노를 젓다가, 한쪽 노에는 “기도하라”  또 다른 쪽 노에는 “일하라” 라고, 쓰여진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젊은 어부가 물었습니다.  “영감님, 사람이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 기도는 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 소리를 들은 나이 많은 어부는, 아무 소리 없이 “기도하라” 고 쓰여진 노는 묶어 두고, “일하라” 라고 쓰여진 노만, 젊은 어부에게 젓게 했습니다. 
그러니 배가 어찌 되겠습니까?  배가 앞으로 나가질 않고, 제 자리에서만  뱅글뱅글 원을 그리면서 돌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나이 많은 어부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게 젊은이, 기도하지 않고 일만 하게 되면, 이렇게 전진이 없다네.  인생에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다네.  또한 일은 안하고 기도만 해도 안 되는 것은, 그 또한 아무 것도 이룰 수가 없기 때문이라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망만 가지고 기도하지 않는 인생은, 언제나 그 인생이 제자리를 맴 돌 뿐입니다.  왜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귀한 소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세상에서는 발전이 없이, 여전히 무능력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성도들이 기도하질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배 시간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통해, 인생에 새로운 소망은 가지는데,  그 이후에, 그 소망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이어지는 기도의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 버립니다.  감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소망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니, 내가 소망을 잃지 않고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어 주실 거야”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얼핏 보면, 이런 사람, 대단히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여 지는데, 실상은 요행을 바라는 신앙이 게으른 성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최선을 다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언제나 최선을 다하는 성도들을 기뻐하시고,  그런 성도들에게 아낌없이 은혜와 축복을 허락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에 보세요.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여러분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내가 기도하지 않고 있는데, 성령님이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는 말입니까?  결코 그런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피곤하고 힘이 없어 기도하지 못할 때, 성령께서 내 마음의 소원을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고, 이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절대 하나님은, 가만히 있는 성도들을 도우시지 않습니다.
예수원에 가보면, 성전에 이런 글이 써져 있다고 하지요?  “기도는 일이다.”
여러분 믿으십니까?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 기도는, 일인 것입니다. 
그냥 일이 아니지요?  최선을 다해 일하는 것이, 바로 기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소망을 가지고, 또한 자신이 가진 재능과 능력을 발휘하여  세상에서 수고하고 노력해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는 최선을 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체험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을 근거로 한 속담인데, 우리가 어떻게 해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스스로 기도하는 성도들을 도우신다고, 해석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2008년도 한 해에, 여러분의 간절한 소망들이, 여러분의 인생 가운데,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십니까?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기도하십시오.  스스로 시간을 내어, 하나님에 나와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성경에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의 철칙입니다.  심는 수고를 하지 않은 자가, 먹을 것을 거둘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은 자는, 장래의 소망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정말 기도하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마다 세상에서 더 피곤하고 지친 가운데, 소망이 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영적 침체의 시기에라도, 우리 성천교회 성도들이 소망을 가지고, 기도하며, 세상을 신앙으로 살아가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눈에 띠이는 자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고, 그래서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유복하고 유능한 실력자로, 이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망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지름길입니다.
기도는, 우리 인생의 배를 소망의 항구로 이끄는 돛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기도함으로 신앙생활에 최선을 다하시고,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고, 여러분의 간절한 소망들이 온전하게 다 이루어지는, 복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 28절 말씀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과 일치시키며, 내 때가 아닌, 하나님의 때에 가장 아름답게 내 소망이 이루어질 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되,
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는, 최선을 다하는 인생을 살아갈 때,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될 것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이 세 가지를 항상 기억하고 붙드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소망을 잃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또한 소망을 가지고 있지만, 소망을 이루지 못하고 살아가는,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참다운 소망의 신앙이 무엇인지 학실하게 보여주며, 소망이 없는 저들에게 소망을 주고, 도전을 주고, 감동을 줄 수 있는, 우리 성천교회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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