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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삼상 11:14 -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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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삼상 11 : 14 - 15
제 목 :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보면, 어떤 계기로 인해 중요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할 때가 있습니다.  영어로 “터닝 포인트” 라고 하지요?  저마다 바쁘게 인생을 살아가지만, 마냥 달려가지 않고 어느 시점에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새롭게 인생을 설계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터닝 포인트를 통해, 우리는 더욱 성숙해 지고, 좀더 나은 인생, 좀더 바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인생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찾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평생에 이런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인생을 한번 돌아볼 여유도 없이, 그냥 바쁘게 살아가다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만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성도들의 인생은, 이와는 분명 다른 줄 압니다.  왜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 때문에, 하나님에 의해서 강권적으로라도, 이런 전환의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잘 알지 못합니다.  내가 가는 이 인생길이 바른 길인지, 잘못된 길인지, 잘 알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아신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때로는 그릇된 길로 갈수도 있지만,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이 이렇게 고백하지요?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또 고백하기를, “그가 내 길을  감찰하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길을 주목하시고,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오직 순종함으로 따를 때에, 바른  인생을 살아가게 되고, 또한 그 인생에 참된 만족을 누리며,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과연 어떤 방법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에게 이런 인생의 전환의 기회를 주시는가?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기도의 시간을 통해,  이런 전환의 기회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이 원치 않는 잘못된 길, 얼마든지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 사회를 보세요.  이 땅에 기독교 인구가 얼마입니까? 
천만이 넘는다고 하는데, 과연 그 분들이 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사회가 이처럼 암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듣지도 아니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는 것이지요.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진 지 이미 오래이고, 성도들의 세상에 미치는 영향력도, 미미하기 그지없다는 것입니다.  영향력을 미치기는커녕,  오히려 세상의 영향을 받고 있는 실정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예요.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인데, 이런 한국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과연 나는 여기에 속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가운데 얼마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이와 같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누구도 이에 대해 자신할 수 없을 줄로 압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원치도 않고, 기뻐하지도 않는, 이런 잘못된 인생길을 걸어가는 것일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신앙생활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온전히 듣지를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연륜이 깊고, 직분이 높은 성도라고 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누구를 막론하고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들만이, 들을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 보세요. 제사장의 직분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엘리 제사장이지요?  그는 세 번씩이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 주셨는데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음성을 누구 들었습니까?  어린 사무엘이 들었다는 겁니다.

제사장도 듣지 못한 하나님의 음성을, 어찌 그 어린 사무엘이 들을 수 있었을까?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삼상 3 : 2 - 4절 말씀을 보세요.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소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엘리 제사장은 어디에 있었다고 했습니까?  자기 처소에 누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다고 했습니다.  이 장소의 차이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못 듣고를,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바른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거하는 주된 장소가 교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장소에 있지를 아니하고, 저마다 자기 처소에 누워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하기를 힘쓰지 않습니다.  교회에 나와 기도하기를 힘쓰지  않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하니, 저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피곤할 수밖에 없지요.  힘들고 지칠 수밖에 없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세상의 이리 떼에 쫓겨 다니는 신세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잡혀 먹히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성도들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때로는 망하게 되는 것이예요. 

여러분, 엘리 제사장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였습니까?  성전이지 않습니까? 
그 시대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아니한 때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는 제사장의 입장에서, 더욱 더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지 말아야 했으며, 더욱 더 하나님 앞에서, 기도에 힘써야 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성전에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더 더욱 그리했어야 옳았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엘리는 자기 처소에 머물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누웠다고 했지요. 잤다는 이야깁니다.  참 하나님 보시기에, 기가 막힐 모습 아닙니까?  그런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러할 때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것이예요. 

여러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던 엘리 제사장의 가정이,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야말로 망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두 아들이 하나님 앞에 패역함으로 인해, 징계를 받아 전쟁터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엘리 자신도, 그 충격으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에 그치지 않고, 그 가정에 재앙이 계속되는데, 며느리가 아이를 낳다가 죽게 되는, 그야말로 그 가정이 풍비박산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가정만 그리된 것이 아니지요?  나라 전체가 전쟁에 휩싸여 재앙을 겪게 되는데, 그 전쟁으로 인해 죽은 자가 삼만이라고 했습니다.  더군다나 가장 중요한  여호와의 법궤마저 빼앗기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상 4 : 22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 여러분,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그러나 이 떠났던 영광이, 다시금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되는데, 누구를 통해서 입니까? 
바로 성전에서 기도하던, 사무엘을 통해서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장차 선지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 어린 사무엘이,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성전에서의 기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성전에서 기도함이,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후 사무엘은 기도를 통한 이런 전환의 기회를, 그가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자주 활용하였던 것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삼상 7장에,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며, 그들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기 위해 내세운 슬로건이 무엇이었습니까? 
미스바에 모여 기도하자였습니다.  삼상 7 : 5 - 6절을 보세요.
“사무엘이 가로되 온 이스라엘은 미스바로 모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리라 하매, 그들이 미스바에 모여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그 날에 금식하고, 거기서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라.” 이스라엘의 회복과 부흥을 위해 내 세운 것이, 바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이 전체가 부르짖는 기도가, 또한 이스라엘 역사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습니까? 

이 기도를 통해 어떤 역사가 일어났습니까?  여호와의 영광이 떠났을 때 패할 수밖에 없었던 블레셋 군대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승리로 인해 무엇이 세워집니까?  “에벤에셀” 의 돌이 세워지게 됩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할렐루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도, 이런 에벤에셀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후에 또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고 자기 소견대로 행하게 되지 않습니까?  이때 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고난과 고통의 모습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사무엘이 또 다시 이스라엘 역사에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새로운 슬로건을 제시하게 되는데, 그 슬로건이 무엇입니까?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라는 슬로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또 다시 백성들을 이끌고 길갈로 가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며, 온 백성들과 함께 기도할 때에, 이스라엘에 새로운 역사가 또 다시 시작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을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 땅의 모든 성도들을 사랑하시지만, 특별히 우리 성천 교회 성도들을, 하나님은 더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왜 제가 이런 말을 합니까?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도,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허락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계기가 무엇입니까?  바로 내일부터 시작되는, 세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인 줄 믿습니다.  이 기회를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보통 때와 같이, 그저 개인이 나와 힘쓰는, 그런 기도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미스바로 모이라 했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또 오늘 본문에도,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라고 했을 때, 또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로 가서 회목제를 드리며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성도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를 맞이해야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전 성도들이 다 이 성전에 모여서, 하나님을 향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이레 동안, 모든 성도들이 마음에  작정을 하고, 전심으로 기도에 힘쓰게 될 때에, 하나님은 여러분 모두에게  이 기도회가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게 해 주시고, 우리 성천 교회 또한,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수 있는, 귀한 전환점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이번 특별 새벽 기도회를 통해, 저와 여러분의 가정이 새로워지고, 여러분의  사업이 새로워지고, 우리 벧엘 교회가 새롭게 건설되어지고, 부흥하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우리 가운데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런 은혜와 축복을, 우리 가운데 예비해 놓으셨다는 거예요.
이런 좋은 기회를 우리가 놓쳐서야 되겠습니까?  어른 말 잘 들으면, 자다가도 뭐가 생긴다고 했습니까?  떡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전적으로 순종하시고,  내일부터 다 새벽기도회에 나오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새로운 역사를 함께 이루어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은 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길갈로 가자고 했을까?
그 이유를, 우리가 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장소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길갈로 가자고 했을까?  길갈에 대한 영적인 배경은, 여호수아 5장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요, 수 5 : 8 - 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필하매, 백성이 진중 각 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 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길갈에서 무엇을 행했다고 했습니까?  할례를 행했다고 했습니다.

모세가 이끈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생활 40년 동안 다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광야에서 태어난 출애굽 2세대들을 이끌고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들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거룩한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백성들의 성결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명하여, 모든 백성들이 할례를 받게 만들었다는 것이예요. 이 할례가 모든 백성들에게 마쳐질 때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무엇을 행하셨습니까?  애굽의 수치를 물러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그들이 애굽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심적으로나 영적으로  자유함을 누리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 만나가 그치고, 가나안의 소산을 먹기 시작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할렐루야!!!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40년 동안 만나를 먹었습니다. 

만나를 주신 것, 분명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은혜라기 보다는 징계에 더 가깝습니다.  원래 그들이 먹어야 할 양식은, 만나가 아니  었습니다.  만나는 원래 비상식량이었어요.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까지 먹는, 일시적인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40년 동안을 이 만나를 먹어야 했습니까?  그들의 원망과 불평 때문에, 몇 달만 먹어야 될 만나가, 40년 동안의 양식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리도록 먹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죄수가 감옥에서 먹는 콩밥이 무슨 맛이 있겠습니까?  그냥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먹어야 할 양식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먹은 만나가 바로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호수아가 이끈 출애굽 2세대들은, 길갈에서 할례를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성결케 되어지고, 또 그 할례로 인해 애굽의 수치를 벗어버리고, 이제는 명실상부한, 가나안의 축복의 성취자가 되어졌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길갈로 가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새로운 축복의 역사,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를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제는 우리 성도들이 광야생활을 끝내고, 하나님이 원래 약속하신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이 세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를 허락해 주시고,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영적인 길갈로 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명령에, 우리 모두가 따라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이번 특별 새벽 기도회 동안에, 무엇을 힘써야 하겠습니까?  무슨 목적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겠습니까?  그 목적이, 오늘 본문 15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이 말씀을 근거해서, 두 가지의 목적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줄로 압니다.  그 첫 번째 목적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금 내 인생에 왕으로 삼고, 그 분의 통치를 받는 신앙의 회복의 목적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신앙의 회복을, 우리는 첫 번째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길갈로 가서 처음 행한 일이 무엇입니까?
사울을 왕으로 삼는 일이었습니다.  사사시대가 끝이 나고, 이제는 왕정시대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사사와는 달리, 왕에게는 엄청난 권세가 주어졌습니다.  그 권세가 무엇입니까?  그의 말이 곧 법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제는 누구도 왕의 말을 거역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왕의 말을 거역하는 자는 어찌 됩니까?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시대와 왕정시대의 차이점인 것이예요.  이런 차이점이 있었고, 또 그에 대한 백성들의 부담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을 이끌, 강력한 리더쉽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그들의 생각은, 철저한 인본주의적인 생각이었지요. 하나님은 결코 그들 가운데 왕이 세워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아직 시기상조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대로 왕을 세움으로, 그 백성이 하나 되어지고,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좋은 것이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바램은 무엇입니까?  이제 사울의 통치 속에서, 더욱 더 강력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세운 왕은, 결국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그르치게 되었고, 나중에 하나님이 친히 세우신 왕인 다윗을 통해,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 가운데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까지 우리가 섬겼던 세상의 왕을 내리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세워 주신 그리스도를, 다시금 내 인생의 왕으로 세우는 목적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을 다시금 내 인생의 왕으로 삼고, 그 분이 강력하게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실 수 있도록, 내 자신을 내어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저와 여러분의 왕이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은 나의 인생을 다스리고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세웠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매일 주시는 그 말씀에, 우리가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분의 다스림에 전적으로 따를 때에, 우리 인생에 새로운 역사가, 축복과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주님의 말씀이 곧 법입니다.  믿습니까?  이제는 내 뜻과 내 방식대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예요.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여전히 내 뜻대로,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면, 우리는 왕의 진노를 면치 못하게 될 줄로 압니다.

눅 19 : 26 - 27절에 보세요.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열 종을 불러 은 한 므나씩을 주며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은 한 므나를 수건에 그대로 싸 두었다가, 왕위를 받아온 주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왕으로 다시 온 주인이 그 종을 향해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나의 왕 됨을 원치 않는 원수” 라고 했습니다. 주인의 말에 순종하지 않는 자는, 원수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 주인이 누구  입니까?  왕입니다.  왕의 말은 곧 법입니다.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말을 무시하고, 자기 뜻대로 행했다면, 왕의 입장에서 그를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원수라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친히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이번 세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주님이 나의 인생에 왕 되심을 고백  하시고, 다시금 주님의 통치아래에 자신을 두며, 전적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다짐 속에,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왕이신 주님이 다섯  고을을 맡겨 주시고, 더 나아가 열 고을도 맡겨 주셔서, 주님과 함께 이 땅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런 귀한 축복이,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를 통하여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넘쳐 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이제 우리가 두 번째로, 목적을 삼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이번 세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 기간 중에, 화목제로 하나님께 드리기를 소원하는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화목제가 무엇입니까? 
영어로는, “Peace Offering” 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생에 화평을 얻기 위해, 인생에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얻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 바로 화목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화목제를,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 15절 말씀에, “모든 백성이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라고 했습니다. 
화목제는 여러 가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세 가지의 의미가 있는데요, 감사제, 서원제, 낙헌제, 이렇게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감사제는, 말 그대로 받은 은혜에 감사해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서원제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리고 낙헌제는, 이런 저런 목적 없이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드리는 제사가 낙헌제입니다.

이 세 가지의 화목제를, 이번 새벽기도회 기간 중에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화목제를,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려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 4 : 6절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먼저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화목제라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소원하는 기도의 제목들이 많이 있지만, 이전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이나, 감사함이 없이, 무조건 소원만 아뢰는 기도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기도를 먼저 드릴 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또 다시 감사가 넘쳐 날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또 하나의 화목제라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이 기도가 참 중요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이 어떤  기도를 가장 원하시겠습니까?  당신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고, 작정하는 기도, 이런 기도를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어떤 목적을 걸고 기도하는데, 그 목적이 나를 위한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목적이라면, 하나님이 그 기도 안 들어 주시겠습니까? 
그냥 하나님께 물질 축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물질의 충만한 축복을 주시면, 교회를 건축하는데 사용하겠습니다.”  또는 “선교하는데  사용하겠습니다.” 또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사용하겠습니다.” 
그러나 뜬 구름 잡는 막연한 기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비전을 가지고, 헌신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 꼼짝없이 들어주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이런 서원 기도를 드려서, 인생에 수지맞은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누구입니까?  바로 야곱입니다.  그가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은 후 집에서 도망치다시피 나오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 때 벧엘에서 그가 하나님께 서원하여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창 28 : 20 - 22절 말씀을 보세요.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하나님이 지금 나를 도와주시면, 나에게 필요한 양식과 옷을 주시고, 내 가는 길을 안전하게 지켜 주시면, 내가 돌아오는 길에, 이 곳에 성전을 건축할 것이요, 하나님께 십일조를 반드시 드리겠다고 하는, 서원의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야곱이 먼저 조건을 걸고, 하나님이 거기에 응답해 주시면, 당신을 위해 일생을 헌신하겠다고 하는, 선 응답, 후 헌신의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거래로 치면 일종의 외상입니다.  물건부터 받고, 돈은 나중에 주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기도가 과연 하나님 앞에 먹히겠느냐?  의심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일단 그 마음 중심에, 정말 헌신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확인하셨다면, 그 중심만 보시고도, 그에게 소원대로 미리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신용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잖아요?  정말 내가 그 사람을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사업을 할 때도 물건 먼저 주지 않습니까?  외상으로 주지 않습니까? 

야곱의 서원 기도가 꼭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서원의 기도를, 우리도  화목제로 이번 특별 새벽기도회 시간에,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실 풍성한 축복을 소망하시되, 이런 주님을 향한 선한 비전들을  제시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또 매일 새벽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나와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억지로 일어나서, 그저 졸린 눈으로 왔다가 가지 마시고, “매일 새벽이 새롭도다.” 매일 새벽에 주시는 주의 은혜를 기대하면서, 날마다 새벽을 깨우며, 기쁜 마음으로 주 앞에 나오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드릴 수 있는 화목제, 곧 낙헌제인 것입니다.  이렇게 새벽기도회를 준비하시고, 나오시는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축복이, 매일 새벽마다 넘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내일부터 시작되는 이번 세 이레 특별 새벽기도회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특별한 은혜의 기회입니다.
“오라!  우리가 길갈로 가서 나라를 새롭게 하자” 
이번 기도회가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기도회라는 사실을, 마음에 믿으면서, 또한 우리 성천 교회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기도회라는  사실을 마음에 믿으면서, 새벽을 깨우며 주 앞에 나와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드린 모든 기도, 하나님이 흠향하여 주시고, 우리 가운데 역사해  주셔서, 우리의 가정에, 또 직장과 사업에 새로운 축복이 임하고, 우리 성천  교회가 주의 은혜로 부흥케 되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귀한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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