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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둘람 굴 사람들 (시 5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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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아둘람 굴 사람들 (시 57:1-11)

교회가 1000명이 모이고 10,000명이 모이더라도
    영혼을 구원해야겠다는 선교적 책임과
    병든 사회를 바로 잡아 보겠다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교회로서의 기능과 사명을 다 하는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0명이 모이고 100명이 모이더라도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병든 사회를 고치겠다고
    이 시대를 향해 꿈이 있고 뜻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면
        그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건강한 교회인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이런 뜻을 가지고 모인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가 하면
시57편의 배경이 되는 삼상22:1-2덜 에 나오는 아둘람 굴입니다.
오늘 아둘람 굴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비전에 눈이 뜨여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시578편의 배경을 살펴보면
1.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해 보세요(참조/표절 삼상22:1-2절)
먼저 표절에 기록되어 있듯이
[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 라고 합니다.
이 굴은 바로 삼상22:1절에 나오는 아둘람 굴입니다.
아둘람 굴은
다윗이 임금이 되기 전에 사울 왕을 피하여 피신하여 숨었던 곳입니다.
다윗이 사울왕의 칼을 피해 다닐 때 아둘람 굴에 숨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 왔는데 삼상22:2절에 보니
[ 환란 당한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 400명가량이 모였다 ]고 합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이지만
    이 사람들 역시 그 무엇에 쫓겨 지금 다윗이 숨어 있는
    아둘람 굴에 피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적어도 당시 실권을 잡고 있는 사울 왕이 보기에는           
그렇고 그런 별 볼일 없는 사람들입니다.
지금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 별 볼일 없는 사람들 같이 봅니다.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하나님 백성에 대해 무어라고 표현합니까?
    가시떨기, 싯딤나무, 보리떡 같은 존재,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지렁이 같은 야곱, 화석류나무라 합니다.
김진홍 목사 <새벽을 깨우리로다>라는 책에 보면
청개천에서 활빈교회를 개척했는데
거기에는 개성파 지성파 교인들이 다 모였더라는 것입니다.
성격이 개 같은 사람, 성격이 지랄 같은 사람.
이 사람들이 제직회 하다가도 한 판 붙고 들어오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사람들입니다.
2. 아둘람 굴 사람들이 왜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사람들입니까?(1-2절)
왜 귀한 사람들인냐?
비록 삶에 쫓겨,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 굴 속에 모인 것 같지마는
    주님께 피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1. 1절「하나님이여 나를 궁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여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가기 까지 피하리이다.」
  성경 고고학자-아둘람 굴 400명이 겨우 들어 갈 만한 굴이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피신하는 굴이 아니라 주의 날개 그늘 이라 합니다.
  다윗과 400명의 사람들은 아둘람 굴을 주의 날개 그늘 아래인 줄 알고
      피난처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피난처로 삼고 주게 피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습니다.
시17:7-8 [ 주께 피하는 자를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아래 감추신다 ] 합니다.
만약 이 사람들 모여서 신세타령, 불평, 자신들의 살 궁리 했더라면
    정말 별 볼일 없는 사람들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최악의 조건 가운데 쫓기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께 피하였던 것입니다. 
시33:12절 [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 합니다.
교회는 이런 면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세상 어떤 공동체보다 귀한 곳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피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왜 아둘람 굴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사람들입니까?
2) 2절 [ 내가 지극히 놓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
다윗은 자신의 역경 가운데서도 하나님께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지면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교인 하나님 보시기에 귀한 자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진리 한 가지를 발견해야 합니다.
3.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체험한 은혜가 무엇입니까?(3-6절)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 광야로 쫓겨 다니는 신세입니다.
다윗은 광야생활 속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될 수 있는
    깊은 진리를 체험하게 됩니다. 
광야생활 속에서 특히 아둘람 굴을 거처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진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거룩의 역사입니다.                   
지금 광야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광야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뛴다고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때 다윗은 아둘람 굴에 들어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하면서 기다립니다.
그럴 때 다윗에게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싹이 텄던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이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졌다는 사실은
3-5절 까지 말씀에서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이 지금 얼마나 절박한 상황아래 놓여 있는지
4절 [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이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 합니다.
의역한다면                                   
[ 내가 사람을 잡아먹는 사자들 가운데 누워있어 보니
  그들의 이빨은 창끝과 같고 화살촉과 같고
  그들의 혀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 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러한 경겁한 상황 가운데서도
3절에서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사자를 보내어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구해주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5절에 [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놓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 라고 찬송합니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이러한 고백이 나오고 찬송이 터져 나올 수 있습니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될 사람은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진다는 사실입니다.
광야 굴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둘람 굴 사람들이 거기 모여서
현 정권에 불평만 하고 자신들 신세타령만 했더라면
이 사람들 결국 반정부 인사로 처형되던지 아니면 산도적떼가 되었을 텐데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져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위엄을 찬송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는 다윗의 시편 여러군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펴적으로 시22편에도
[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4>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
[ 이스라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
얼마나 고난이 극심했던 상황이었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 엘리 엘리 라박사박다니 ] 라고 이 구절을 인용하였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극심한 고난 중에 있지마는
비록 내 기도는 응답받지 못한다 할지라도 주는 거룩하시니이다.
우리는 광야를 만나거든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하는 영성을 회복하는 기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윗이 광야 동굴에서 거룩에 대해 눈이 뜨여졌다는 증거는
신학자 <유진 피터슨>이 쓴 다윗 - 현실에 뿌리 밖은 영성이란 책에 보면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졌다는 증거가 한 가지 있습니다.
다윗이 동굴 안에 피해 있을 때
    다윗을 쫓던 사울 왕이 동굴 안에 들어와 변을 보게 됩니다.
    그때 다윗이 가만히 사울이 겉옷자락을 벱니다.
    그러나 다윗의 마음이 찔려 하는 말이
    [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신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 고 하고는
    부하들에게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 <피터슨>은
옥좌에 앉아 있어야 할 왕이 등을 보인채 쭈구리고 앉아 변을 보고 있을 때
당신도 별 수 없는 인간이구나 하면서 원수 갚을 수 있는 절호의 찬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왕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 우리가 광야에서 배울 수 있는 깊은 진리는 바로 하나님의 거룩에 대해
  눈이 뜨여진다는 것이다 ] 라고 합니다.
다윗은 광야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 졌기 때문에
    원수 갚을 궁리를 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의지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6절
[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
사울이 다윗을 해할려고 온작 모함과 궤계를 부렸지마는
      도리어 사울이 그 웅덩이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 우리도 광야같은 고난 당하거든 하나님께 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 보호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지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4.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지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반응이 무엇입니까?(7-8절)
우리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하나님께 피하면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지고
그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새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그때 나타나는 우리의 반응이 바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7절「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로다」
다윗과 아둘람 굴 사람들 마음을 확정했습니다.
마음에 뜻을 확실히 정했습니다.
신앙의 의지를 굳게 세우기로 마음 먹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 고전 가운데
윌리암 로우의 <경건한 삶을 위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기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이고 제일 되는 원리는
  모든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이다.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식해서나 연약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삶을 살려는 의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오늘 다윗은 비록 최악의 환경에 처해 있지마는
그러한 곤경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에 눈이 뜨여져
    마음에 뜻을 확실히 정했던 것입니다.
꿈은 이렇게 역경 속에서 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이 환경과 여건이 맞아야만 이 마음을 확정하는 것 아닙니다.
고통 속에서 만이 진주같이 빛나는 영롱한 꿈을 꿀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마음속에 확정한 것이 있습니까?
마음을 확실히 정한 것이 있습니까?                   
나의 신앙생활을 통해 내 마음에 확정한 것이 있습니까?
혹 확정한 마음이 식어졌다면 오늘 다시 불이 붙기를 축원합니다.
비록 큰 뜻이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마음을 확정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840년 런던 옷가게 일하던 <조지 윌리엄> 청년이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고전15:2절  [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 헛되이 믿지아니하면 ~!
예수 헛되이 믿지아니하면 나도 쓰임을 받을 수 있구나
그래서 이 청년은 이때부터 동료 몇 명을 데리고
주말마다 모임을 갖기 시작 했는데 이것이 YMCA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뜻을 정한 청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다윗과 아둘람 굴의 사람들이 마음에 무엇을 확정했을까요?   
    어떤 뜻을 확실히 정했습니까?
8절[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
새벽을 깨우기로 마음에 확정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먼저
왜 영광아 깰지어다. 라고 하는가?
성경학자들은 문맥상으로 보아 영광아 깰찌어다 라는 말은
        영혼아 깰찌어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합니다.
공동번역에는 `내 영혼아 잠을 깨어라.  비파야, 거문고야 잠을 깨어라. 
          잠든 새벽을 흔들어 깨우리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다윗이 새벽을 깨우기 전에 내 영혼아 깰찌어다. 라고 노래하는가?
그것은
내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지 아니하고는 새벽을 깨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뜻을 정하고 마음이 확정되기 위하여는
    자신이 먼저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자신의 무능한 삶을 깨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냥두면 인생의 낙오자 밖에 될 수없는 아둘람굴 사람들         
      환난당한 자, 빗진 자, 마음에 원통한 자들이
      만약 저들이 깨어나지 아니한다면 잠꼬대 같은 소리만 하다가
      결국은 산 도적떼나 되고 아니면 잡혀서 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마음을 확정했습니다.
    내가 먼저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야 되겠다.
    그래서 새벽을 깨우는 자가 되어야 겠다.
저들이 이런 결단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저들이 자신들의 무능한 삶을 통감하고
신앙의 잠에서 깨어나기로 결단했기 때문에
나중에 이들이 다윗왕국에서 제사장 되고 장관되고 장군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잠에서 깨어나야
      꿈이 보이고 비전이 보이는 것입니다.
영혼이 깬 성도들은 어떠한 극한 상황 가운데서도             
    비파야 깰찌어다 수금아 깰찌어다
        찬송을 부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8절 [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영광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
희망적 내일을 바라보며 감사와 찬송을 드릴 수 있는 자
    바로 마음이 확정된 자의 특징인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과 아둘람 굴 사람들 새벽을 깨우겠다고 확정했습니다.   
새벽을 깨우겠다는 말
1. 먼저 문자 그대로 받아드려도 좋겠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다윗은 침상 위에 걸어 놓은 수금이
    새벽에 불어오는 북풍에 의해서 저절로 소리를 낼 때 깨어나서
    율법을 소리 내어 낭독하며 여호와께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다윗은 바로 새벽의 사람이었습니다.
새벽에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시119:147절에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시46:5절 [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
성경에 보면 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에 애굽 군대를 홍해 가운데서 어지럽게 하시고
  새벽에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고
  새벽에 여리고 성이 무너졌고
  새벽에 옥문이 열려 베드로가 풀려 났고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도 먼저 내 영혼이 깨어나기 위해서 새벽을 깨우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회가 살아 역사하는 교회가 됩시다.
사실 새벽제단을 쌓는다는 것은 삶이 하나님 중심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새벽기도 신자는 모든 삶이 그기에 맞추어 살아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삶이 하나님 중심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수년 전에 빌리 그래함 목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내가 세계를 순회하면서 카나다에 간 일이 있다. 
  아침에 숲속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나는 캐나다가 자연의 아름다운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일본에 갔다. 
공장이 요란한 엔진소리와 출근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에 아침을 깨었다. 
일본은 산업의 나라요 경제의 나라임을 알았다. 
나는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 갔다.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챠임벨 소리에 잠을 깼다. 
그리고 한국은 주님이 지키시는 나라임을 알게 되었다 ] 고 했습니다.

우리 내일교회 새벽을 깨우는 교회가 됩시다.
새벽에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는 교회가 됩시다.
나도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에 확정합시다.
마음을 먹을 때 하나님이 도와 주실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2. 다윗이 새벽을 깨우겠다는 말                       
단순히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겠다는 말만이 아닙니다.
사울의 폭정으로 어두워진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결심의 말입니다.
병든 사회를 병든 나라를 새롭게 고쳐보겠다는 결심의 말입니다.
세상에 무서운 사람 두 사람이 있습니다.
1) 각오한 사람입니다.
2) 비젼을 가진 사람입니다.
만약 비전에 헌신을 각오한 사람이라면 더 무서운 사람입니다.
비전을 가진 사람, 무서운 사람, 위대한 사람입니다.
만약 아둘람 굴 사람들 이런 비전 안 가졌다 생각해 보세요.
    산도적 떼, 불한 당, 아니면 잡혀서 평생 노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비록 별 볼일 없는 그렇고 그런 사람들 같았지마는
    마음을 확정하고 뜻을 정했던 것입니다.
잠29:18절 [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
이 말씀의 뜻은 그대로
[ 비젼이 없으면 망할 짓만 골라 한다 ] 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도 이렇게 마음에 확정이 있어
    비전을 가지고 교회생활을 하면 꼭 무언가 이루어 놓습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
뜻을 정하고 마음을 확정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들은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는 비젼을 가지고
    「새벽을 깨우리로다」하며 유다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이 역사의식이 결여된 신앙인은 건전한 신앙을 가졌다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던말든
대구가 우상의 도시로 전락하던 말든
교회내에 청소년들이 다 떠나가도
자신의 안일에 빠져 신앙의 잠만 자고 있다면
진정한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계를 한국을 못 깨운다 할지라도
내가 살고 있는 대구를 깨우겠다는 비전을 가진 교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눈이 뜨여지면  무엇을 보게 될까요
5.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눈이 뜨여지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됩니가?(9-11절)
9-11절 까지 보면       
주의 인자, 주의 진리, 주의 영광이란 말이 나옵니다.
즉 이 말은 주님에 눈이 뜨여지게 되고 내 영혼이 밝아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215장 3절 내가 주를 바라보니 나의 영혼 밝아져
  내 영혼의 눈이 밝아져
  주의 인자를 보고 주의 진리를 보고
      주의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유대 탈무드에 보면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랍비 개가 견생을 깊이 연구한 결과 자기 행복이 꼬리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꼬리를 잡을려고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잡힐듯 잡힐듯 하면서 꼬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드디어 랍비 개는 힘이 다하여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늙은 개가 옆에서 보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자네처럼 행복을 찾기 위하여 열심히 돌고 돌았지마는
  결국 잡지 못하고 한 가지 사실만을 깨달았다네.
  꼬리를 잡으려고 열심히 돌면 어지러울 뿐이지만
  내가 한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달려가니 그 꼬리는 나를 따라 오더라네」
의미 있는 이야기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 속에 마음을 확정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야망만 쫓아 가다가 결국은 남는 것이 없는 헛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일교우 여러분                                   
신앙생활을 해도 뜻을 정하고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마음을 확정하는
아둘람 굴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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