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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탕자의 형 이야기 (눅 15:25-32)

  • 잡초 잡초
  •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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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의 형 이야기 (눅 15:25-32)

(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이 말씀은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에 이어지는 비유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났던 둘째 아들은 그곳에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맙니다. 급기야 돼지 쥐엄 열매로 배불리고자 하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은 정말 돼지만도 못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 탕자가 회개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합니다. 탕자가 돌아오는데 아버지는 먼발치에서는 자기 아들임을 알아보고 달려옵니다. 달려와서는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그리고는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이어서 살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이며 아들의 귀환을 즐거워합니다.

저가 노하여

여기까지 해서 이야기가 마치면 한 편의 아름다운 귀환이야기라 할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 품을 떠났던 인류가 회개하고 아버지 품속으로 돌아오는 인류사를 보는듯합니다. 한 인간이 가출, 여행, 고난, 깨달음, 귀환에 이르며 성숙해 가는 전형적인 성장 드라마의 하나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 뒷면에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입니다. 둘째 아들의 귀환이나 한 인간의 성장에 대해서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맏아들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 속 한 번 썩이지 않았던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맏아들의 인생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탕자인 둘째가 돌아오면서 맏아들의 인생은 갑자기 문제가 많은 인생처럼 헝클어지고 말았습니다.

25절에 보니 맏아들은 밭에서 열심히 일하다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자기 집에서 흥겨운 풍류와 춤추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맏아들은 종을 불러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종이 대답합니다. 27절입니다.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이 소리를 듣자 맏아들의 안색이 싹 바뀌고 맙니다. 28절에 성경은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만약 형의 입장이었다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 것 같습니까? 이런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아 내 동생이 돌아왔구나. 기쁘구나. 빨리 가서 얼굴 좀 보자.” 이래야 형으로서 당연한 반응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성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형의 태도는 매우 솔직합니다. 형은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있는 동생 때문에 매우 기분 나빠합니다. 이는 단지 동생에 대한 비난의 마음 때문만은 아닙니다. 방탕한 생활을 하고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환대하는 것에 대한 분노만이 아닙니다. 형이 더 화가 나는 것은 아버지가 그동안 자신을 대했던 태도입니다. 그것은 29절의 맏아들의 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동생에 대한 비난 이전에 동생이 환대받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가 나에게는 이렇게 환대해 주지 않았다는 섭섭함이 들었던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아버지 명을 어겨 본 적도 없고, 매일 성실하게 일한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라도 내어 그 친구들을 불러 잔치를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자신을 위해 잔치를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문제가 없었는데 이제 동생을 위한 잔치를 벌이는 모습을 보니까 기분이 나빠진 것입니다. 비교의식이 문제입니다. 사실 이런 반감은 이전부터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이 망나니 동생을 불쌍히 여기며싸고돌았기 때문입니다. 밥 먹을 때마다 눈물짓는 아버지를 보며 오히려 이런 반발의식이 커졌습니다. 아버지는 성실한 자기보다 망나니 동생을 더 사랑하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우리가 가진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데 우리의 문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 집을 가지고 있으면 감사해야 할 텐데 이웃집이나 친구들이 더 큰 집에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불만이 생깁니다. 우리  나라는 5,60년대의 절대빈곤으로부터 벗어낫습니다. 현재 느끼는 빈곤은 대부분 상대적 빈곤입니다. 남들은 해외 여행가고 좋은 차 타고 다니는데 나는 그렇지 않은 것 때문에 좌절감을 맛봅니다. 이런 비교의식 가운데 사는 인생은 불행합니다. 행복의 기준이 자기 안에 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하버드 대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남들이 2만 5천 달러 받을 때 자신은 5만 달러 받는 경우와, 남들이 20만 달러 받을 때 자신은 10만 달러 받는 경우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설문조사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온 줄 아십니까? 대다수의 학생들이 전자의 경우를 더 선호한다고 답했다. 월급은 좀 적더라도 상대방에 비해서 높은 수준을 누리는 것을 더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타워 펠리스나 강남에서 좀 가난하게 사느니 강북이나 다른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에서 살겠다는 것입니다.

비교의식은 질투심을 일으킵니다. 인류사에서 질투심은 인간의 기원만큼 오래되었습니다. 최초의 살인은 비교의식 곧 질투심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경우입니다. 가인이 형이고 아벨은 동생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를 지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렸고, 아벨은 양을 쳐서 양의 새끼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 제물을 열납하고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는지 정확히 그 이유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사에서는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이 더 잘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동등한 능력인데 그 사는 모습은 천양지차로 다를 때가 많습니다.

가인은 이 모습 때문에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그 분노를 다스리지 못한 결과 가인은 들에 있을 때 몰래 아벨을 쳐죽이고 맙니다. 질투심 때문입니다. 아우가 하나님의 사랑을 다 가져간다는 것이고 아우만 없으면 자기가 행복할 것 같아서였습니다. 이것이 질투심의 본질이고 질투심의 결말입니다. 질투는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몰 뿐만 아니라 자신도 불행으로 몰아가는 성질이 있습니다. 부러워하는 상대방을 미워하기 때문이요, 그렇게 되지 못하는 자신을 쪼며 몰아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비교의식, 질투심을 극복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질투심을 극복하는 방법은 첫째 보다 영원한 것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풀빵 몇 개 가지고 다투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소망을 두는 사람은 물질 명예 인정 등 이 세상의 작은 것 가지고 싸우지 않습니다.

둘째, 자기에 대한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자신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성공이나 다른 사람이 가진 것 때문에 위축되거나 분노하지 않습니다. 이 프라이드는 자기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 자기 인격에 대한 확신, 하나님께서 자기 삶을 인정하신다는 것에 대한 확신에서 나옵니다. 사람들이 명품에 쉽게 끌리는 이유중 하나는 자기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모습보다 남들이 바라보는 자기 모습에 더 신경을 씁니다. 옷이나 악세사리는 편하거나 자기 몸에 어울리면 됩니다. 자기라는 인격으로 자기를 드러내야 하지 명품으로 자신을 치장하려 하니 끊임없는 비교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명품으로 만드십시오.

셋째는 상대방의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갖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그 사람이 가진 무엇이나 포장되어 있는 겉모습보다 그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물질과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있는 그 영혼의 뒷면에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인정에 대한 욕구가 있습니다. 아니면 자기의 상처나 허물을 감추려고 더더욱 그렇게 자신을 포장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영혼은 우리가 사랑할만합니다. 영혼은 영원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에 반면에 영혼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이나 명예나 위치는 곧 사라지게 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이런 것들에 우리 시선이 팔릴수록 우리 또한 질투심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형은 온갖 진미의 잔치나 춤추는 소리보다는 돌아온 동생의 영혼이 겪었을 고통과 후회, 부끄러움과 감사를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기쁨에 즐거워하고 있는 그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 보려 했다면 맏아들은 이렇게까지 분노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맏아들이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맏아들을 사랑합니다. 실상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을 맏아들에게 주었습니다. 31절입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살진 송아지나 염소 새끼 한 마리가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의 전재산이 맏아들의 것입니다. 아버지는 오히려 둘째보다 맏아들을 신뢰하며 그를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와 항상 같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맏아들은 모릅니다. 아마 너무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형은 또 하나의 탕자입니다. 그는 집 안에 있지만 실상 마음은 아버지의 품에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탕자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문제는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 감사를 잊습니다. 마치 우리가 일상적으로 호흡하는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말입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결혼생활을 유지한 부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가 너무 익숙하고 당연한 관계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그 소중함은 둘 중 한 사람이 멀리 여행을 떠나거나 무덤 앞에 홀로 서서야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며 주님을 나의 주님이라 부르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것은 기적입니다. 죄 많고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이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 신앙은 죽고 감격이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서 탕자처럼 멀리 집을 떠나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또 조용히 새벽에 기도하며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의 은혜가 새롭게 다가온다면 우리 삶은 기적의 삶이 될 것입니다. 오직 감사를 드리는 자만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위에 머무릅니다.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

형은 동생에 대한 질투심과 함께 경멸에 대한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30절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형은 자기 동생을 향하여 동생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단지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부름으로써 자기와 관련성을 멀리하려 합니다. 그 동생에 대한 표현도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라 부름으로써 일말의 동정심도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멸의 대상처럼 여깁니다.

형은 동생의 삶의 양식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형은 보수적인 사람일지 모릅니다. 한 번도 아버지에게 대들어 본 적도 없습니다. 자기 위치에서 성실히 자기 일을 감당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동안 가정경제를 책임지며 이끌어 왔던 사람입니다. 반면에 동생은 충동적인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달라는 무례한 동생이었으며, 그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떠나는 대단히 모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또 사치하며 충동을 못 이기고 창녀와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러고도 집으로 돌아온 그 뻔뻔함이었습니다. 이런 동생을 보니 경멸감이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이런 동생을 두고 있었다면 우린들 그렇게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문제는 그런 동생을 아버지께서 받아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비유입니다. 이 비유에서 아버지로 상징되고 있는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판단하기에 이처럼 정말 개망나니 같은 존재도 그가 돌아오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제 문제는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를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의 문제입니다. 지금 맏아들은 이런 불합리한 아버지의 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이 맏아들의 입장이라면 어떤 태도를 취했을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바꾸려 하겠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을 바꾸려하겠습니까? 우리의 판단과 경험을 앞세우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판단의 마음을 내려놓으십시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얼마나 됩니까?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정말 오십보 백보입니다. 전쟁터에서 오십 보 달아난 사람이 백 보 달아난 사람을 보며 비겁하다고 나무라는 격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성실하고 불평을 터드려 본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을 의인처럼 착각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차라리 탕자처럼 죄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맏아들이었습니다.

또 우리는 어떤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초라해보여도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 누가 압니까? 돌아온 탕자가 그 아버지에게 어떤 소중한 존재가 될 지 또 장차 그 집안에 어떤 기둥 같은 존재가 될 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전반전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교훈 삼아 후반전을 멋지게 살아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직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그 인생을 태어나게 한 것도 자라게 한 것도 이제껏 인도해 온 것도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혼내고 나무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식을 나무라면 부모는 기분이 나쁩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어찌하여 당신이 판단하십니까? 로마서 14장 3,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하나님의 주인인데 우리가 남의 하인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문제 거리를 삼는다면 형의 삶의 태도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의 신앙은 전혀 모험하지 않는 신앙입니다. 안정된 것만 지키면 된다는 태도입니다. 그러면 물론 실수는 덜 하겠지요. 그러나 그의 삶에서는 감격이 없습니다. 아버지의 품속이 얼마나 따뜻한 품속인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죄 사함 받는 은총이 얼마나 기쁘며, 용서받고 인생을 새 출발 하는 맛을 알지 못합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빵의 가치의 소중함을 모릅니다.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그는 사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결국 그는 축제가 없고 지루하고 단조로운 삶을 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자신을 한계 상황 속으로 몰아가는 것이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특별히 성실한 사람들은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성실 때문에 우리가 딱딱한 율법주의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은 의롭고 자신의 기준에 비추어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사를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너무 소중한 것과 오래 생활하다가 그것이 당연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자신은 완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허물과 연약함을 긍휼히 볼 수 있는 눈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함께 즐거워하자

우리는 이제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23, 24절 보십시오.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32절도 보십시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는 무엇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분명히 둘째는 유산으로 준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재산상의 손실로 따지면 이렇게 기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잃어버린 재산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돌아온 아들이라는 한 인격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인생의 재물을 낭비할 수도 있습니다. 자기 달란트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 수도 있고 시간을 허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잃어버린 것들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라는 인격을 더 소중히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그런 과정을 통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고, 여러분 안에서 예수님을 닮은 인격이 자라간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더 기뻐하십니다.

우리도 이런 하나님의 마음과 기쁨을 소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것에 우리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는 것에 우리도 슬퍼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버지 품속에 있으면서도 이방인처럼 불평하는 종처럼 살아간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큰 아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이 아버지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렘브란트(1606-69)의 최후의 작품이며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탕자의 귀향” 이라는 그림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 그림에는 대표적인 세 인물이 나옵니다. 먼저 탕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 품에 얼굴을 묻은 채 그 뒷모습만 나오는데 머리를 완전히 박박 깎은 채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는 회개를 상징하면서 동시에 마치 어머니 품속에 안긴 어린 아기를 연상시킵니다. 옷은 다 낡았고 한 쪽 발은 신발이 없는데 상처 투성이입니다. 다른 발은 신발이 반쯤 헤어져 있습니다. 그가 겪었던 고난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은총의 빛이 환하게 그를 감싸고 있습니다.

그 탕자를 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매우 자애로운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눈은 거의 실명한 듯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는 눈이 멀기까지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줍니다. 인상적인 것은 그 두 손인데 두 손이 전혀 다릅니다. 왼손은 듬직한 아버지의 손처럼 보이고 오른손은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처럼 보입니다. 이는 부성과 모성의 조화를 이룬 하나님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그 옆에는 큰 아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이 탕자와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있습니다. 그 시선은 높은 데서 물끄러미 내려 보는 표정입니다. 얼굴에는 전혀 기쁨이 표정은 없고 비판자의 모습으로 곳곳이 서 있습니다. 

이 그림이 더 유명하게 된 것은 우리가 익힌 잘 아는 헨리 나우웬이라는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던 그림이기 때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1983년 가을 프랑스의 어느 친구 집무실에서 이 그림의 복사품을 보는 순간 그 그림에 그만 빨려들어 갔다고 합니다. 그 후 일부러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에 있는 원화를 보러 갔고 그 곳에서 4시간 동안 이 그림을 보며 감동에 젖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그림이 주었던 충격을 계기로 하버드 대학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인 사역에 뛰어들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 그림에서 받은 감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그림은 나에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설 수 있는 신비의 창이 되었다.”

헨리 나우웬은 그림에 나오는 탕자와 그의 형의 모습은 인간들의 두 본성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자기는 처음에는 탕자인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큰 아들의 모습을 많이 닮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 자신은  매우 책임감이 강하고 전통적이며 가정 중심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쩌면 그 모든 것과 함께 작은 아들 만큼이나 탕자로 살아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질투심, 나의 분노, 나의 성급함과 완고함과 무뚝뚝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은연중에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나의 독선을 보았다. 나는 분명 큰 아들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아주 열심히 일해 왔지만, 집에 거하는 그 기쁨을 전혀 맛보지 못했다. 내가 누렸던 그 모든 특권들을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불만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헨리 나우웬은 작은 아들도 아니고 큰 아들도 아니고 아버지의 따뜻한 마음을 닮자고 말합니다.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 그 자비로운 손길. 이제는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을 닮은 사람이 될 차례라고 말합니다.

“렘브란트는, 흐트러진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작은 아들에게서 허리를 구부린 노인 아버지에게로, 축복 받는 장소에서 축복하는 장소로 나를 인도했다. 내 자신의 나이든 손을 보면서, ‘이 손이야말로 고난 받는 모든 사람들을 향해 뻗으라고, 돌아온 모든 사람들의 어깨 위를 어루만져 주라고, 하나님의 광대한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축복을 베풀라고 나에게 주셨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의 한없는 사랑으로 우리가 영원한 아버지의 품속에서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우리가 이처럼 자애로운 아버지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 사람들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름에 온전히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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