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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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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비유 (마 18:21-35)

마태복음 18:21-35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베드로가 주님께 나아와 물었습니다. “형제가 자기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여러분 같으면 얼마나 용서할 수 있습니까? 자기에게 죄를 범했다는 것은 자기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불의한 일을 하거나 손해를 끼쳤다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 우리들이라면 한 번도 참지 못할 것입니다. 운전하다가 누가 자기 차 앞으로 끼어들거나 위험한 행동을 했을 때는 바로 크랙션을 누르거나 욕이 나오는 우리로서는 한 번 참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490번이라도 용서하라

당시 유대 랍비들은 세 번까지는 참으라고 교훈했습니다. 랍비 요세 벤 예후다는 “사람이 한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된다. 사람이 두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 된다. 사람이 세 번 과실을 범하면 용서된다. 그러나 네 번째는 용서되지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여기에 두 배를 곱하고 하나를 더해 일곱 번까지 참으리이까 하고 말한 것은 대단한 고백이라 할 것입니다. 이 정도 인내와 용서라면 그 사람은 가히 성인의 경지에 들어선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베드로를 향하여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즉 70×7=490번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3-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주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자기에게 불의한 일을 할지라도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하루 일곱 번씩이나 참을 수 있는 인내가 있습니까?

주님의 말씀은 도무지 실천하기 어려운 말씀처럼 보입니다. 우리에게서 가장 어려운 명령이 용서의 명령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각만해도 분노가 솟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잊혀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을 듣거나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속에서 분노가 올라오는 것을 보며 당황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설사 양보해서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녀들에 대해서 잘못을 행한 사람을 용서하기란 더 힘이 들 것입니다.

지난 1988년에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듀카키스 라는 민주당 후보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사형제폐지’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는 전국을 누비며 사형제도는 없애야 된다며 유세를 했는데 어느날 CNN의 토크쇼에 초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토크쇼의 앵커가 듀카키스를 앞에 놓고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사형제도를 폐지하라고 주장하신다죠?”
“네, 그렇습니다.”
“참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 질문하겠습니다. 선생님, 만약에 선생님의 아름다운 부인이 괴한에게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 후 살해당했다고 합시다. 나중에 그 범인이 잡혔을 때 선생님은 여전히 사형 제도를 폐지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받고서 듀카키스는 당황했습니다. 머뭇머뭇하다 말을 더듬기까지 했습니다. 수천 만 명의 시청자들이 이 장면을 지켜보았습니다. 사형제 폐지가 정작 자기 일로 닥치니 선뜻 대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토크쇼 때문에 듀카키스는 대선에서 패배했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용서는 이처럼 어렵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490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도대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고나 이런 명령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차라리 현실적으로 세 번까지만 참으라고 한다면 우리는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490번까지라니요? 이것은 단지 더 많은 인내와 용서를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여기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자세를 바꿀 것을 주님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오늘 비유 말씀을 통하여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이처럼 용서하라고 명령하시는지 우리는 어떻게 하면 그 용서를 행할 수 있는지 나누어 보았으면 합니다.

1만 달란트의 빚

먼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 무엇보다 용서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빚진 자들입니다. 그것도 1만 달란트라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 보면 어떤 종이 1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이 1만 달란트라는 것은 엄청난 액수의 돈입니다. 한 달란트가 6000 데나리온입니다. 또는 1만 데나리온이라는 분(예레미야스)도 있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옛날 노동력을 정확히 계산할 수 없지만 대충 1만원으로 계산해도 한 달란트는 6천만 원, 1만 달란트는 6천억 원에 해당하는 엄청난 액수입니다. 당시 헤롯 대왕의 한 해 세수입이 9백 달란트였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한 나라의 예산을 상회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빚입니다. 주인이 25절에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고 명령하지만 이렇게 자기 몸을 팔아도 도무지 갚을 수 없는 그런 빚입니다. 당시 노예 대금이 5백에서 2천 데나리온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추궁 앞에 그 종이 26절에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고 주인 앞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립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이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바로 엄청난 빚을 진 채무자임을 깨닫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빚을 졌습니다. 성경은 빚을 죄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갚아야 할 엄청난 빚, 곧 죄를 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도대체 내가 왜 죄인이냐? 설사 죄인이라 할지라도 1만 달란트라 빚질 정도로 죄인은 아니라고 항변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간 생명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빚입니다. 우주에 수많은 생명이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시고 자연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무상으로 땅을 공급받았고, 모든 능력과 함께 아름다움 인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서 전혀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불평불만합니다. 왜 자기를 더 반듯하게 만들지 않았느냐고, 차라리 태어나지 말게 할 것을 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를 위해서 이기적으로 다 탕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범하는 것이 곧 빚입니다. 일례로 거짓말을 한 번 들어봅시다. 여러분은 하루에 얼마나 거짓말을 하고 사나요? 워싱턴 타임즈 보도에 의하면 영국의 성인 2500명을 대상으로 하루 동안 얼마나 거짓말하는지 조사해보니 평균 4번 이상의 거짓말을 한다고 합니다. 이를 1년으로 계산하면 1460번, 60년을 더 산다고 가정하면 8만8천 번의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중에는 사소한 거짓말도 있을 것이지만 정말 심각한 거짓말도 있을 것입니다. 이만큼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는 존재로 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여기에 살인죄, 도둑질, 음란과 탐욕, 미워하고 시기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까지 합하면 우리의 빚은 엄청나게 증가할 것입니다. 우리가 더 죄인인 것은 이 같은 죄들에 대해서 “인간 사는 게 다 그렇지” 하며 합리화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 것도 죄입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 인구의 7분의1인 8억5천만 명이 심각한 영양실조에 있습니다. 2005년 기준으로 하루 10만 명이 굶주림으로 죽어갑니다. 10세 미만의 아동이 5초에 한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은 3분에 1명꼴입니다. 그런데 전세계에서 생산되는 곡물 생산량은 인구 120억 인구가 먹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현재 세계 인구는 65억 정도됩니다. 우리는 먹고도 남아돌아 버리기까지 하며 다이어트 한다고 살빼기 경쟁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죄인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오래 사는 만큼 우리의 죄는 더 크다 할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

그런데 1만 달란트나 되는 엄청난 빚을 그 주인이 탕감해줍니다. 27절입니다.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주인이 자비를 베푼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그 앞에 엎드려 애걸하고 있는 모습이 불쌍해서 입니다. 아무리 해도 갚지 못할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신용불량자의 악순환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항상 빚에 쪼들려 인간노릇 못하고 조바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그들인데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신용불량자와 같은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다 이루었다’는 말이 헬라 어로 ‘테텔레스타이’인데 이 뜻에는 ‘빚을 갚다. 지불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아들인 예수의 피로 우리 모든 빚을 다 갚아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우리 모든 빚이 탕감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시103:12)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용서의 체험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이 하나님께 지은 빚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양심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또한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의 한 단면입니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심으로 죄의 문제는 해결되었는데, 죄를 지은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고 있는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무위로 돌리는 행위입니다. 

어떤 목사가 있었습니다. 그 목사는 젊었을 때 자신이 생각하기에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지만 그 죄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자유하질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죄를 용서해 주셨는지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목사는 자신의 교인 중에 환상을 잘 보는 나이든 부인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환상 중에 그 부인은 가끔 주님과 대화도 한다고 했습니다. 어느 날 목사는 용기를 내어 부인을 찾아갔습니다.

“부인께서 때때로 환상을 보신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렇답니다.”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환상 중에 가끔은 주님과 대화한다는 것도 사실입니까?”
“그렇답니다.” 부인이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면 다음 번 환상 중에 주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면 저를 대신해서 한 가지 질문을 해주시겠습니까?”
부인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목사를 바라보았습니다. 한 번도 그런 부탁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뭘 여쭈어 드릴까요?”
“부인의 교구 목사가 젊었을 때 저질렀던 죄가 무엇이었는지 한 번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호기심에 가득 차서 부인은 그렇게 하겠다고 선뜻 약속했습니다.

몇 주 후 목사는 다시금 부인을 방문했습니다. 차 한 잔을 마신 후 목사는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최근에 환상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럼요.”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주님과 대화도 나누셨나요?”
“예.”
“그럼 제가 젊었을 때 저지른 죄에 대해 주님께 여쭈어 보셨습니까?”
“예, 물론이죠.”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긴장과 두려움에 가득 찬 채 잠시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부인은 목사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부드럽게 대답했다.
“주님께서는 기억이 안 난다고 말씀하셨어요.”

하나님은 우리 죄를 다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기억도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을 용서하라는 말은 자기 행동 하나 하나에 대해 변명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났건 못났건, 살아온 환경이야 어떻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 모습 이대로 사랑하십니다.

어떤 분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자기 인생에 대해서 아주 가혹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외모나 학벌 때문에 자학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우한 환경이나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지 못한 것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과거의 실수에 대해서, 어떤 일로 상처받은 것에 대해서 자신을 용납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그 아픔을 두고두고 곱씹으며 묵상합니다. 어떤 분은 가슴 속 깊은 곳에 꾹꾹 눌러 놓았다가도 그 밑바닥에 있는 상처가 어쩌다 올라오면 주체를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십시오. 과거 자신의 실수, 불우했던 환경, 상처들, 가혹했던 운명에 대해 용서를 선언하십시오. 과거는 흘러갔습니다. 흘러간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흘러간 과거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여러분의 태도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면, 그 과거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예정하셨던 섭리들로 가득찬 아름다운 시간들로 바뀔 것입니다. 아,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이렇게 빚기 위하여, 아, 하나님께서 주님을 만나게 하기 위하여 이렇게 아픈 상처들을 허락하셨구나!

그러나 여러분이 자신의 과거를 용서하지 않는다며, 그 과거는 두고두고 여러분을 괴롭힐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것도 싫은 데 이제 그 과거가 여러분의 현재와 미래마저도 불행하게 만들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제 자기를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과거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셨는데 감히 누가 정죄한단 말입니까? 우리의 판단보다 전능하시고 우리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판단이 더 올바르고,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니 자학하지 마십시오. 자학은 교만입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가 주인이라 주장하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드리지 않겠다는 자기중심적 태도입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의 대화를 한 번 이렇게 바꾸어 보십시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제가 과거에 많은 실수를 하였고, 아픈 상처들을 안고 있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1백 데나리온의 빚

우리들의 모습이 어떤지 말씀을 통해서 계속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28절입니다. 이 종이 이런 엄청난 은혜를 받고 밖으로 나가다 자기에게 1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곧 동료를 만났습니다. 1백 데나리온은 1만 달란트와 비교하면 60만분의 1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데 이 종이 동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으라고 요구합니다. 그 동료는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29) 하고 탄원을 하지만 듣지 않습니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두고 맙니다. 이를 본 동료들이 민망히 여겨 주인에게 모든 사실을 다 알립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 무자비한 종을 불러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32,33) 그리고는 그 무자비한 종을 옥에 가두고 1만 달란트 빚을 다 갚으라고 명령합니다.

이 1만 달란트 받은 종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그가 주인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주인이 자기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다른 사람을 향하여 자비의 눈을 갖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두 개의 다른 표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자신을 향한 표준은 매우 관대합니다. 자신의 잘못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나를 용서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엄격한 표준을 갖다 댑니다. 그의 의도는 악하고 그가 나에게 빚진 것은 남김없이 다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지금의 용서의 마라톤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바통을 받았습니다. 이 바통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 만약 그 일을 포기한다면 경기는 그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면 나에게 발부되었던 하나님의 사면장은 이제 기소장으로 바뀌고 말 것입니다. 35절에서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런 점에서 우리가 용서해야 될 이웃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를 용서함으로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용서가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기 위하여 굉장한 의지력을 동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을 돌이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이 나에게 어떠한 사랑을 부어주셨는지 기억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 의지는 스스로 작동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용서는 결코 윤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런 엄청난 은혜를 입고도 다른 사람을 용서해주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심히 가슴 아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답답하신 것은 네가 1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실을 기억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억하고 있다면 어찌하여 네 형제의 작은 잘못 하나 용서해 주지 못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를 용서하라는 새로운 윤리를 여러분에게 가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슴 속에 십자가의 은혜가 살아 있느냐, 그리스도의 사죄의 피가 너희 심장 속에 흐르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성숙된 인격이 나, 너그러운 인품에 기초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인격으로는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용서는 십자가 앞에 설 때만 가능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모질게 하고, 때리고,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그 십자가 앞에 설 때만, 동일하게 나에게 그런 상처를 가하는 형제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는 나의 피난처』라는 책을 썼던 코리텐붐 여사의 이야기입니다. 코리텐붐 여사는 네덜란드인입니다. 그녀와 그의 가족들은 유태인은 아니었지만 유태인들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습니다. 온 가족이 독일에서 2차대전이 끝날 때까지 ‘라벤스브룩’이라는 참혹한 수용소에 갇혀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의 가족들은 다 죽고 코리텐붐 여사만 기적적으로 생존해서 독일이 패전하면서 그 곳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여인에게 가혹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자기를 그렇게 잔혹하게 핍박했던 독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사명이었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들에게 용서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따라 독일의 마을과 도시를 찾아다니면서 간증 집회를 했습니다. 그녀의 간증을 통하여 수많은 독일인들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는 놀라운 은혜가 임하였습니다.

한 번은 코리텐붐 여사가 독일의 시골 도시에서 말씀을 전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사람들이 코리텐붐 여사와 악수하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코리텐붐 여사를 얼어붙게 했습니다.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원수였던 라벤스브룩 수용소의 간수가 거기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기 언니를 죽음으로 몰아갔으며 자신에게는 엄청난 모욕과 고통을 주었던 간수였습니다. 그 순간 코리 여사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코리텐붐 여사는 하나님께 마음속으로 말했습니다. “하나님 저 사람은 안돼요.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녀의 마음 가운데 계속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자 코리텐붐 여사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저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용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명령이라면 해보겠습니다.” 어느새 자기 눈앞에 다가온 그 사람을 향해서, 비록 자기 마음속에는 사랑의 느낌, 사랑의 감정은 하나도 없었지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늘의 사랑이 자기의 영혼 속으로 임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날 그녀는 미움을 사랑으로 승화 시키는 위대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어떤 것인가를 절실히 깨달았다고 후에 고백을 하였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는 살 수 없습니다. 분노는 날카로운 칼과 같습니다. 내가 미워하는 상대방을 찌르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을 찌르고 맙니다. 우리가 그를 미워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그의 노예가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십자가입니다. 나 또한 하나님의 분노를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는데 하나님께서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490번 넘게 잘못을 범했는데 하나님께서 다 용서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용서의 은혜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용서는 윤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에 대한 보답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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