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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상처 다루기 (딤후 4: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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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상처 다루기 (딤후 4:14-18)

어떤 목사님이 30년을 하루도 편한 날이 없이 상처만 받고 살았다는 사람과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가 물었습니다.
“목사님도 상처를 받으십니까?”
“어떻게 보이십니까?”라고 되묻자 그는 “목사님이야 무슨 상처가 있겠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제가 일생동안 목회하면서 받은 상처를 다 말한다면 삼국지 분량보다 더 많을 것이요. 다만 나는 그 상처들을 그때 그때 치유하고 떨쳐버리고 지우려고 노력하며 살아나왔을 뿐입니다. 어떤 상처를 받았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치유하였느냐 입니다”
그렇습니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상처 중에는 육체의 상처보다 마음의 상처가 더 아프고 깊게 생길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마음의 상처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욥 30:16절에 보면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녹으니 환난 날이 나를 잡음이라” 라고 했는데 마음이 녹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시 55:4절에서는 “내 마음이 내 속에서 심히 아파하며 사망의 위험이 내게 미쳤도다” 라고했습니다. 또한 시 143:4절에서는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상처를 받을 때 나타나는 현상들을 그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육체의 상처는 그 자국을 성형수술로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상처는 그 흔적을 제거하는 성형 수술을 할 수도 없습니다. 마음은 드러나지 않거나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첨단 MRI 컴퓨터 단층촬영기로도 찍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수에 찔리고 긁힌 상처는 없앨 수 있지만 마음의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 법입니다.
육신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어 해결됩니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쉽게 지워지지 않은 채 오래가는 것을 봅니다. 상처를 주지도 말아야 하지만 받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원하지 않는 상처를 받았을 때는 속히 그 상처를 고쳐야 합니다.
가시에 찔리든 칼에 베이든 아니면 넘어져서 깨어졌든지 몸에 난 상처는 깨긋이 소독하고 연고를 발라서 잘 아물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쉽게 났습니다. 몸에 난 상처는 잘 치료하고 고치지만 마음에 난 상처는 쉽게 치료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늘 위대한 전도자요 목회자였던 바울 사도바울에게도 상처가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면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구리 장색 알렉산더에 의해서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리 장색이란 알렉산더라는 사람의 직업을 의미하는 데 그것은 구리를 가공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즉 금속을 가지고 여러 가지 기구나 기계를 만드는 공장의 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해를 입혔는지는 설명이 없지만 “해를” 로 번역된 “카카” 의 원형인 형용사 카코스는 “괴로운, 고통을 주는 ” 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알렉산더가 어떤 이유에서든 악한 마음으로 바울을 괴롭혔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한 것을 보아 아마도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알렉산더가 직접적으로 방해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알렉산더로부터 깊은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입니다.
바울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갈 6장 17절에서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라고 했는데 “흔적”이란 상처를 입었다가 아물었지만 계속 남아있는 있는 상처의 흔적 즉 흉터를 의미합니다.
예수의 흔적이란 예수님을 위해 받았던 육체적 고통의 흔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받았던 상처의 종류 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육체의 상처입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에 보면 옥에 바울은 갖히기도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고 서른 아홉 번씩 다섯 차례를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았고 한번은 돌로 맞았습니다. 바다에서 배가 세 번씩이나 파선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일생 목회자로 살면서 복음을 전도자로서 온갖 상처를 다 받았던 것입니다. 아마도 바울의 얼굴이나 몸 전체에 여기 저기 흉한 흉터가 있었을 것입니다.

둘째는 마음의 상처입니다.
육체의 몸에 난 상처도 상처지만 바울에게는 그러한 육체적인 흔적보다도 마음의 상처가 더 컸습니다. 바울을 괴롭힌 것은 아물어버린 육체의 상처가 아니라 마음깊이 각인된 마음의 상처였습니다.
딤후 4:10절에 보면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늘 함께 있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자신을 떠나가는 배신을 격을 때 바울의 마음에 받은 상처를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를 버리고 .... ” 라는 표현을 하면서 그 마음의 상처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버림받은 상처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14절에 보면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 라고 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이 배신하고 곁을 떠날 때의 실망감은 그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특히 알렉산더는 본래 금세공업자입니다. 예수를 믿고 교인이 되어 교회를 섬겼는데 교회에서 말썽만 일으킨 탓으로 제명 된 사람입니다. 15절을 보면 디모데에게 “너도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며 대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로 인하여 바울은 마음에 많은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바울에겐 복음을 전하다가 흉기에 찔리고 매를 맞고 돌에 맞은 상처가 있었지만 그런 육체적인 상처보다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더 컸습니다. 특히 알렉산더에게 받은 마음의 상처는 정말 컸던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성경을 기록하면서 이름까지 거명하며 디모데에게 “너도 주의하라”고 권면했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바울은 그와 같은 마음의 상처를 처리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상처를 받았어도 스스로 치유법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마음의 상처를 처리하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마음의 상처 처리하기 ..

첫째는 상처받지 말라
상처를 입고 치유되는 것 보다 처음부터 상처 입지 않는 것이 가장 최선의 치료입니다. 상처 받은 후 치료를 위해 고생하지 말고 처음부터 상처 받지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합니다.
엡 6:13절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전신 갑주는 방어적인 무기를 말합니다.
누가 상처를 주어도 입혀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70년대에 어떤 흑인 병사가 서울역에서 의정부 까지 택시를 탔습니다.
한참을 가다가 택시가 신호등에서 서 있는데 다른 차선에도 택시한대가 섰습니다. 운전기사들이 서로 아는 사이였는지 창문을 내리고 서로 인사를 주고 받았습니다.
손님 몇 명이나 태웠어..?
응 연탄 두 장
미군 부대 주변에서 택시 기사들끼리 미군들이 한국말을 잘 못 알아 듣기 때문에 색깔이 까맣고 머리가 뽀글 뽀글인 흑인을 두고 말할 때 그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의정부까지 도착하여 흑인 병사가 부대 앞에서 택시에서 내리면서 요금이 얼마냐고 물었습니다. 기사가 미터기를 보니 그때 돈 만원이 나왔습니다.
기사가 “1만원입니다” 라고 말하자 흑인 병사는 400원만 주었습니다.
운전기사가 의아해서 말했습니다. “아니 손님 만원이라니까요” 그때 흑인 병사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연탄 두 장 값만 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왜 이야기를 했냐면 누군가가 자존심 건드리고 누군가가 성질 건드려도 열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 받아야 마음만 상합니다. 그냥 웃어 넘길 수 있는 마음, 예수님을 모신 사람의 마음은 정말 사소하고 자질구레한 세상 살이에 쉽게 열받고 상처 받지 않습니다.

마음의 상처를 말할 때 대부분 상처 입었다고 말하지 않고 상처 받았다라고 말합니다. 상처받았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누군가가 내게 상처를 던져 주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누군가 상처를 주어도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에 의해서 상처를 입었지만 내가 받지 않으면 그뿐입니다. 그래서 마음의 상처는 주는 사람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그것을 받는 나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합시다. 상처 안 받으면 됩니다.

둘째는 주님께 맡겨라
14절에 보면 대적자가 되어 괴롭히고 상처를 주었던 알렉산더에 대하여 바울은 “주께서 갚으시리라” 라고했습니다. 그의 처리를 주님께 맡긴 것입니다. 내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을 내가 처리하려하면 결코 상처가 치유되지 않습니다. 내게 상처를 입히는 사람들의 처리를 주님께 맡기는 사람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누가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십니까?
출 15:26절을 보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말 4:2절에서는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 4:23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쳤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아픔과 상처를 치료하십니다.
어떻게 치료받습니까? 믿고 모든 것을 털어놓고 맡겨야 합니다. 천주교는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지만 우리는 직접 주님께 자신의 속마음을 기도로 털어놓고 말씀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상처를 당신에게 맡기기를 바라십니다.
어렸을 적에 겪었던 모든 상처! 외면! 비웃음! 따돌림! 욕! 같은 것들이라도 다 그 분앞에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 깊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기도 생할을 시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은 절대 누설하지도 않으시고 비웃으시지도 않으십니다. 나무라지도 않으십니다. 믿음이 참 중요합니다. 신뢰감, 나와 가장 친밀하다는 믿음! 이 믿음이 있어야 다 꺼내놓을 수 있습니다.

셋째 적극적으로 용서하라
내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치료하기 위해서는 내게 상처를 입힌 사람을 적극적으로 용서하여야 합니다, 사실 용서하지 못하고 상처를 입힌 그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동안에 내 마음의 상처는 계속 곪아 터집니다. 요셉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아넘긴 형제들을 보았을 때 적극적으로 용서를 선포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판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된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오히려 형제들을 위로합니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입힌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그를 미워하는 나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입니다.
용서를 선포하면 놀라운 평화가 임합니다. 내가 먼저 손내밀고 내가 먼저 화해를 요청하면 즉 적극적인 용서를 선포하면 주님이 함게하십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마음의 상처가 치료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치유해 주시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덯게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해 주실까요?

첫째 말씀으로...
하나님은 상처받은 마음을 “격려와 위로의 말씀”으로 치료해 주십니다. 이 시간에도 여러분 들 중에 치료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행 27:23-24절에 보면 바울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에 하나님이 말씀으로 친히 위로해주셨습니다.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

둘째 어루 만져 주심으로
지친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심으로 ...
이세벨의 협박으로 상처받은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잠들었을 때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왕상 19:6-7절 두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어루만졌다는 말씀이 두 번이나 반복되어 사용되었습니다.
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셋째 좋은 사람들을 통하여 ...
상처를 주는 사람을 만나면 상처투성이의 사람이 됩니다. 환자끼리 만나면 신세한탄만 합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비결은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주는 좋은 사람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누가 좋은 사람입니까? 위로해 주고 감싸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입니다. 위로란 말이 없더라도 곁에 있어주는 것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아들을 잃은 어떤 목사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위로한다고 찾아와서 여러 가지 말들을 많이 하지만 한 마디도 귀에 들어오지 않더랍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해주고 갔지만 가장 큰 위로는 말없이 손잡고 울어주고 곁에 있어준 친구 목사님의 위로가 제일 컸다고 합니다.
바울에겐 비록 상처를 준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곁에 디모데와 같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싸매줄 만한 동역잗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가 또 좋은 사람들에 의해 치료되고 위로받는 것입니다.

어떤 글을 읽다가 이런 내용을 보았습니다.
제목은 “당신 옆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입니다.
삶이 너무나 고달파 모든 것을 포기하려 해도 딱 한 사람, 나를 의지하는 그 사람의 삶이 무너질 것 같아 일어나 내일을 향해 바로 섭니다. 속은 일이 하도 많아 이제는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딱 한 사람, 나를 믿어 주는 그 사람의 얼굴이 떠올라 그 동안 쌓인 의심을 걷어 내고 다시 모두 믿기로 합니다.
아프고 슬픈 일이 너무 많아 눈물만 흘리면서 살아갈 것 같지만 딱 한 사람,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그 사람의 해맑은 웃음이 떠올라 흐르는 눈물을 닦고 혼자 조용히 웃어 봅니다.
사람들의 멸시와 조롱 때문에 이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딱 한 사람, 나를 인정해 주고 격려해 주는 그 사람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아 다시 용기를 내어 새 일을 시작합니다.
세상을 향한 불평의 소리들이 높아 나도 같이 불평하면서 살고 싶지만 딱 한 사람, 늘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의 평화가 그리워 모든 불평을 잠재우고 다시 감사의 인사를 건넵니다.
진실로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요, 온 세상의 모든 사랑도 결국은 한 사람을 통해 찾아옵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옆에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당신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 옆에 그런 사람을 두고도 불평하십니까? 그러면 당신은 정말 불행한 사람입니다.
참말이지 그 사람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 그리고 내 곁에 있는 모두에게 바로 나였으면 좋겠습니다.

상처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 상처를 사람에게 드러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는 반드시 드러내어야 합니다. 의사에게 몸을 맡겨야 치료받을 수 있는 것처럼 주님께 믿고 맡기십시오. 주님께 맡기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위로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어루만져 주심으로 그리고 아주 좋은 사람들을 통해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료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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