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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 안에서 자라가라 (골 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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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 골 1 : 3 - 6
제 목 : 사랑 안에서 자라가라

연인에 대한 감정 표현을 사랑이라고 말 하듯이, 모든 관계에 있어 가장 아름다운 표현이 무엇이냐?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여러 언어들이 있지만, 이 ‘사랑’ 이라는 단어만큼 좋은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생사사”  무슨 말입니까?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다.

그러면, 왜 사랑이란 말이 이처럼, 사람의 마음을 감동케 하고, 즐겁게 하고,  흥분되게 만드는가?  이 세상에서 사랑만큼 고귀한 것은 없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헌신입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희생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자식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지 않습니까?  연인에 대한  사랑이, 서로에 대한 희생과 헌신이지 않습니까?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이 사랑이 많이 왜곡되고, 잘못 이해되고 있지만,  사랑은 원래 순수하고, 고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변질된 사랑이 만연된 오늘날 세상에서는, 사람들에게 이 사랑을 말하는 것 자체가 참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왜입니까?  그 의미가 잘못 전달 될까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이 사랑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사랑만이, 세상을 감동시키고, 세상을 바로  세워갈 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해 보지요.  우리가 말하는 이 사랑에 대한 정의를, 확실하게 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주님이 이 세상에서, 사랑을 가장 확실하게 증거 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통해, 그 사랑을 세상에 증거 하셨습니까?  바로 십자가이지요.  십자가의 희생,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신 그 사랑, 이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의 이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성도들은, 감히 세상의 뜻대로 살아가질 못하고,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갈 6 : 17절에 보면, 그가 이런 말을 하지요.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할렐루야!!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나를 괴롭게 말라.”  무슨 말입니까?  제발 좀 날 내버려 둬라.
내 마음대로 세상 살아갈 테니, 나를 자꾸 예수 믿으라고 강요하지 말라는 이야깁니까?  아니지요.  정 반대의 이야깁니다. 

오히려 나를 세상으로 끌고 가지 말라는 이야깁니다.  나는 이미 예수의 사람이 되어졌는데, 왜 나를 자꾸만 세속의 허황된 말로 나를 유혹하면서, 세상의  정욕대로 살아가도록 괴롭히고 있느냐?  나는 더 이상 예전의 사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주님 안에서, 새롭게 변화된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한 예수의 흔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예수의 흔적, 그리스도의 흔적,  스티그마타, 바로 주님과 같이 사십에 하나 감한 채찍을 맞아 난, 몸의 상처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십에 하나 감한 채찍, 여러분 그것이 어떤 형벌인지 아십니까? 

그 당시 형벌에 쓰였던 채찍은, 우리가 지금 상상하고 있는 그런 가죽 채찍이 아닙니다.  가죽 채찍인데, 그 채찍의 줄에 짐승의 뼈를 갈쿠리 모양으로  심어 넣는 채찍입니다.  그런 채찍으로 맨살을 때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한 대 때릴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 채찍을 서른아홉 대나 맞았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몸이 온전할 리 있겠습니까?  끔찍하지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심문을 당할 때, 자신이 로마 시민권자라는 사실을 밝혔으면 이런 채찍 형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왜입니까?  그리스도의 희생을, 자신도 체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그 분이, 자신을 위해 억울하게 붙들려 심문을 당하시면서 맞았던 그 채찍, 사십에 하나 감한 채찍질을 당하시며 느끼셨던 그 고통을,  자신도 체험해 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몸에 난 상처를, 자랑스럽게 자랑하며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우리도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오늘날까지의 신앙생활 가운데, 바울과 같이 주님을 닮은 흔적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에 주님을 닮은 흔적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고, 또 그 분의 삶을 진정으로 본받기를  원한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흔적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어디 가서 매를 맞고 오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주님의 희생, 아무런 대가없는 희생, 그저 남을 살리기 위해 말없이 고난 받으며, 그 모든 고통을 감수하셨던 그 희생, 이런 주님에 대한 희생이,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보면, 이런 모습을 참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너무나도 이기적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 두 손에 못 박히셨음을 찬양하면서도, 우리는 주님을 위해, 손가락 하나도 까닥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두 발에 못 박히셨음을 찬양하면서, 우리는 주님을 위해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이기주의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너무나도 잘 압니다.  매 주일 이 강단에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또 부흥 집회 때마다, 여러분에게 들려주었던 말씀들을 통해,  또 개인적인 묵상을 통해, 너무나도 분명하게 그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그저 깨닫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에, 더 이상에 신앙의 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현대 교회 성도들의 신앙에, 고질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바울이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칭찬하는 말씀이 나오는데요, 같이 한번 읽어봅시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칭찬하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그들의 신앙에 진전이 있고, 진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진전과 진보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신앙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어 자라갔다는  것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가 나무가 아니라, 주님이 원하실 때에 열매를 맺어 드리는 모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가만히 보세요.  언제 그들이 열매를 맺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언제부터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여러분, 이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지체하지 않는 신앙인 것입니다.  머뭇거리지 않는 신앙인 것입니다. 
뒤로 미루지 않는 신앙인 것입니다.  깨닫는 즉시로 실천하는 신앙,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달았다면, 지체 없이 그 일을 행하는 신앙.  하나님은 바로 이런 신앙을, 우리 모두에게 원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열매를 맺어 자라가는 모습을 보여야 할까?  첫째는, 우리가 속한 이 성천교회 공동체 안에서, 열매를 맺는 모습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다시 보세요.
골로새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열매를 맺어 자라갔다고 했는데, 어디에서부터 먼저 자라갔다고 했습니까? 
“너희 중에서와 같이”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들이 속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먼저 열매를 맺으며 자라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속해 신앙생활하고 있는, 이 성천교회를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성천교회는, 바로 여러분이 세워 가야할 교회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주님의 은혜에 빚진 자로서, 주님의 사랑에 빚진 자로서, 여러분이 어디에서 그 은혜를 갚으며, 어디에서 그 사랑을 갚아야하겠습니까?  바로 이곳 여러분이 속한, 우리 성천교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신앙이, 열매를 맺어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바울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 고 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흔적이 있습니까?  우리 성천교회 공동체를 위해 어떤 희생을 하고 있고, 어떤 헌신을 하고 있습니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누가 앞장세우지 않아도, 스스로가 먼저 우리 성천교회  공동체를 위해 수고하고, 노력한 흔적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이것이 없다면, 여러분은 우리 교회를 향한 사랑이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말이 있지를 않습니다.  오직 실천에 있습니다.  행함에 있습니다.  보여 지는 것이 없는 사랑은, 진실 된 사랑이 아닌 것입니다.

옛말에, 꿔다 넣은 보릿자루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조선 시대 때 연산군이, 백성들은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만 전념하자, 이를 보다 못한 몇몇 신하들이 반정을 꾀하고자, 한 신하의 집에 모였습니다. 
감히 밝은 대낮에 이런 모임을 가질 수가 없었던 터라, 어둠이 내린 밤에,  불도 켜지 않은 상태에서 한참 밀담을 주고받는데, 자신들 뒤에 서 있는 이름 모를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서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뭐였습니까?  의복을 걸어두기 위해 가져다 논 보릿자루였다는 것입니다.  그 뒤로 어떤 자리에서, 있는 둥 없는 둥 말없이 그저 듣고만 있는 사람을 가리켜,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천교회가, 진정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가고, 부흥하게 되려면, 우리 가운데 이런 꿔다 놓은 보릿자루가 없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하나님이 피 값으로 사신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의 보혈로 세워진 교회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교회를, 우리가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골로새 교회 교인들을 칭찬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절과 4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의 수고가 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로 하여금 칭찬을 듣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예, 맞습니다. 맞고요....  그래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  이것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또 맞는 말도 아닙니다.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어리석음의 소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 믿음이 중요하지만,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그 가운데 사랑의  수고가 뒤 따르지 않는 믿음은, 결국 헛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는 믿음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세워져 간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개인의 구원은, 분명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교회, 에클레시아,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는, 믿음을 가진  성도들의 사랑의 수고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곳에 왜 모여 예배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각 자의 심령 속에 믿음이 있는가?  확인해 보기 위해서입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다면 참 곤란한 일이겠지요.  그래서 이런 예배 시간에 들려지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의 믿음을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작업만 하고 끝나버리는 예배라면, 사실 이 예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아무 의미 없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웃으시는 분들은 알아들으신 분들이고, 노려보시는 분들은 뭔 말인지 모르시는 분들입니다.)

여러분 그렇잖아요?  그냥 가정에서 인터넷을 통해, T.V를 통해 말씀 들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아니하고, 굳이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또 굳이 오늘과 같은 수요일 저녁에도 나와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저 아무 이유 없이 드리고 있습니까?  그건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곳에 부르는 목적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이 시간에 예배하는 여러분이, 섬기고 있는 이 성천교회를, 사랑의 수고로 헌신하고, 희생하며 세워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천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입니까?  먼저는 예배하는 일입니다.  공적으로 정해진 날에, 다 함께 모여 이 자리에 나와 예배하는 일인 것입니다.  아멘!!  이 일이, 바로 여러분들이 성천교회를 사랑으로 섬기는 일 가운데, 첫 번째로 할 일인 것입니다. 

두 번째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함께 기도하는 일인 것입니다.
이 성전에 모여,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서로를 위한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또 공동체의 비전을 위한 기도를 드리는 일, 이런 기도하는 일들이, 여러분 가운데 편만하게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은, 중직자들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나이 많으신 권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일은, 성도라면 누구나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믿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특별히 기도하는 일에 힘쓸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세 번째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서로 교제하는 일인 것입니다.  서로가 만나면 그저 반갑게 인사하고, 또 서로에 대한 안부를 물으며, 서로 친밀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성도들 가운데 어려운 일을 당하면, 지체 없이 다가가 도울 수 있는 모습, 이런 사랑의 교제가 오늘 우리 공동체 안에,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이런 사랑의 교제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나 다름 아닌 것입니다.  교회가 살아있다는 증거는, 이런 사랑의 풍성함인 것입니다.  이런 사랑의 교제가 없으면, 얼마나 교회가 냉랭하겠습니까? 
그런 교회에 들어가면, 무슨 찬바람이 부는 것 같습니다.  분위기가 썰렁합니다. 그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기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또 누가 그런 교회를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니 전도해 와도, 적응을 하지 못하고, 이내 떠나가  버리는 것입니다.  기존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지요. 
그래서 교회가 결국은, 침체 일로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천교회는, 결코 이런 침체된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서로에 대한 사랑이 넘치고, 정감 있는 성도의 교제가 넘치는, 은혜로운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외에도, 뭐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많이 있겠지만, 우선 이런 기본적인  세 가지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결코 은혜 가운데 성장해 갈 수 없습니다. 우리 성천교회에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말씀에 대한 반응이 없는 성도들이 없이,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함께하고, 합력하면서, 우리 성천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선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열매를 맺어 자라가는 모습을 보여야 할까? 
그 두 번째는, 교회를 넘어선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열매를 맺는 모습으로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을 다시 보세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할렐루야!!! 
너희 중에서와 같이,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어디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란다고 했습니까?  온 천하에서도....  온 천하에서도......  아멘!!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온 천하는, 어디를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한 주간 동안 살아가는, 모든 삶의 영역들, 삶의 현장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 삶의 현장에서,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으로, 열매를 맺어 자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열매는 두 가지로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입니까?  우리 성도들의 세상 사람들에 대한,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영향력의 열매....
다시 말해,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사랑, 세상 사람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봉사, 헌신, 세상 사람들이 주지 못하는 감동....  이런 것들을, 이제 우리가 그들에게 나타내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하나님, 우리가 믿는 기독교의  예수님을 인정하고, 시인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별로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 말씀하신, 등경 위에 놓은 빛으로서가 아니라, 말 아래 놓은 빛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분명 크리스챤인데, 누구나가 인정하는 크리스챤인데, 세상 속에서는 언크리스챤으로 살아간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  내가 교회를 다닌다. 
내 입으로 말하지 않으면,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 
오늘날 현대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는 거지요. 

자기가 무슨 이순신입니까?  자기가 무슨 영영칠입니까? 
“적에게 나의 신분을 알리지 마라.”  내가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슨 1급 비밀이라도 됩니까?  그런데도, 이런 비밀스러운 성도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는, 아니 여러분 가운데는, 이런 신비스럽고, 비밀스러운  성도들이 없습니까?  적어도 우리만은, 그런 성도들이 안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예수 믿는 크리스챤들을 향해, 뻔뻔한 사람들이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이미 이런 선입관이 그들 가운데는 굳어져 있습니다. 
왜입니까?  우리 성도들이 말만 번지르하지, 실제 그들 가운데 행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겁니다.  말로는 사랑을 외쳐대고 있는데, 실제 사랑이 필요한  곳에 가 보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봉사와 섬김을 외쳐대는데, 실제로는 누구도 힘든 일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망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는가?  예수쟁이들?  아니요, 말쟁이들......  그래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물에 빠지면, 엉덩이부터 뜬다고  하지 않습니까?  왜요?  입은 물고기하고 이야기한다고..... 
여러분, 참 서글픈 이야기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왜 이런 비아냥거림을 당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이런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실 때,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오호 통재라!!!  우째 이런 일이!!!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뻔뻔한 크리스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펀펀한 크리스챤들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FUN, 펀, 즐겁다는 영어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 성도들을 보면 마음이 즐겁고, 우리 성도들과 함께 있으면 인생이 즐겁게 변하게 되는, 그런 펀펀한 크리스챤들.
이런 모습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고, 우리 성천교회 모든 성도들의  모습일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두 번째,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 속에서,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인가?
그 두 번째는, 생명의 열매인 것입니다.  생명의 열매...  나의 전도의 수고를 통하여, 내게 속한 다른 사람들이, 영생에 이르는 생명을 얻게 만드는 노력,  바로 전도의 노력이, 오늘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오직 사람인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그 사람 속에 있는 영혼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막 1 : 38절에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까?  전도하기 위해서..  두루 다니며  복음을 증거하며,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일....  바로 이 일이 주님의 사역의 목적이고, 그의 공생애 사역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주님과 같은 목적, 바로 생활 속에서 전도하는 일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한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이 일을 위해, 우리 또한 세상 속에서 힘써 수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전도 없는 교회, 선교가 없는 교회는, 엄밀히 말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생각해 보세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지상 대 명령인  전도와 선교가 없는 교회를, 어찌 주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일이 무엇입니까?
모이는 일과, 흩어지는 일인 것입니다.  왜 모입니까?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입니다.  왜 흩어집니까?  전도와 선교하기 위해 흩어지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분명한 목적이 있는 신앙.....  이런 분명한 목적이 있는 신앙을 가진, 우리 성천교회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성천교회는, 이제 새로운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에  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교회는 자꾸만 자라가야 합니다. 
생명의 과정은 자람이고, 생명의 결과는 열매인 것입니다. 
우리 성천교회가 진정 신앙으로 살아있는 공동체라면, 계속해서 자라가야 합니다.  현재에 안주해서도 안 되고, 뒤 쳐서는 더 더욱 안 됩니다.  오직 성장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이에 대한 방안이 있어야 하고, 실천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먼저는 이 시간 예배하는 여러분들이 이 일에 앞장서야 하고, 또 책임감이 있는 우리 교회 중직자들이 이 일에 먼저 헌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천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이, 다 같은 마음으로 이 일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교회가 앞으로도 가능성이 있고, 그래야 교회가 앞으로도 비전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 우리 다같이 한번 읽어보고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  할렐루야!!! 

오늘 주신 이 말씀을, 여러분 각 자의 마음에 다시 한번 새겨 보시면서, 우리 성천교회 공동체 안에서와,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들을 많이 맺어가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 드립니다.    (전승빈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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