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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의 사명 (딤전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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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의 사명 (딤전 5: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디모데전서 5:8

여러분은 성경을 읽다가 어느 구절 때문에 심한 충격을 받아본 경험이 있습니까? 저는 있습니다. 그 충격이 얼마나 심한지, 마치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듯했습니다. 30여 년 전에 제가 그렇게 심한 충격을 받은 성경구절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 이전에도 읽은 적이 있었지만 그때 이 구절이 갑자기 튀어 올라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가끔 충격도 필요합니다. 제가 그때부터 그 성경구절과 씨름하고 많은 노력과 기도를 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성경구절은 간단합니다. “누구든지”는 “아무나 다”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그리스어로 된 성경 원본은 “남자는 누구든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어떤 남자, 어떤 가장, 어떤 아빠, 어떤 남편 등을 두고 한 이야기입니다. “누구든지”라고 읽었을 때는 아무에게나 해당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자세히 살펴보면서 ‘아, 이것이 아무에게나 하는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하는 말씀이구나!’라고 느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여기서 “돌본다”는 말은 “목양을 한다”, 즉 ‘목자’를 의미합니다. 목자가 양을 푸른 초장으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고 양이 피곤할 때 새로운 생기를 불어 넣어 주고 막대와 지팡이로 보호하고 인도하며 어려운 일을 당할 때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도 힘과 용기를 불어 넣어 주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장은 우리의 목자로, 가족은 우리의 양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배반한 자요”란 그저 믿음을 배반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의 믿음을 배반한 자요”라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믿는다고 고백을 했으나 자기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는 사람은 그 고백을 부인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말이 더 충격적입니다.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안 믿는 사람보다 더 악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정을 귀하게 여기고 남자들이 가정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잘 돌보라고 충격적으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돌본다”는 말이 ‘목자’라고 했습니다. 저를 예를 들면, 저는 제 가족 5명의 목자인 것입니다. 가족을 잘 돌볼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또한 저는 교회의 목사 직분을 맡고 있으니 목자입니다. 목사가 자기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면 목자의 자격이 없고 불신자 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깨닫게 되니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때 이후로 저는 제 자신을 과거 어느 때보다 더 살피게 되었습니다. ‘내가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내 가정을 잘 돌보고 있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부족함과 책임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모습들을 보게 되면서 하나님 앞에서 참 많이 회개를 했습니다. 이렇게 소중한 가정을 나에게 맡기셨는데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한 부분을 생각하면서 눈물로 밤을 새고 교회 바닥에서 뒹굴면서 회개한 적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물론 제가 가족을 돌보지 않겠다고 생각 해 본 적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살펴보니 내가 돌본다고 하는 그 돌봄이 너무 부족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시옵소서. 저를 그냥 한 남자로서 내버려 두시면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 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순간순간마다 저를 도와주시길 원합니다.’ 그리고 매일 제 아내와 자녀들, 손자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그들이 듣든지 안 듣든지 꾸준히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는 대부분 의도는 좋습니다. 노력도 합니다. 그런데 저도 해 보니까 노력이 부족하더라고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 가장들이 앞장서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회개하고 노력하고 자신을 헌신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신 가정을 잘 돌볼 수 있는 축복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노력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요. 어느 남편은 마흔이 조금 넘은 나이에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서 집을 나가 30여 년 동안 그 여자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힘도 없고 능력도 없어지자 그 여자는 할아버지를 떠났습니다. 할아버지는 일흔이 넘은 나이에 아내와 자식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 나 집에 가고 싶어!” 30여 년이 지난 지금 집으로 돌아오고 싶대요. 그동안 가족들의 가슴을 다 찢어 놓고, 버림을 받게 되니까 집에 돌아오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런 남자도 있어요. 그렇지만 이런 여자가 있다는 말은 아직까지 못 들어 봤습니다. 

그 할아버지의 아내는 예수 믿는 여자요, 인물도 좋아요. 일흔이 넘었지만 고운 분입니다. 제가 심방을 가서 옛날 사진을 보니 얼마나 멋진지요. 그 곱고 착한 여자를 버리고 밖으로 헤매고 다니면서 가족을 안 돌본 그 남편을 아내는 고린도전서 13장 때문에 받아 들였습니다. 고민, 고민하다가 받아줬습니다. 감사하게도 할아버지는 아내와 자식들에게 돌아와서 많이 늦었지만 회개하고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 40대 남편의 이야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어린 자녀가 2명 있는데 중국에서 조선족 여자와 만나서 집을 나갔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릅니다. 제가 심방을 가서 그 자녀들과 아내가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이 겨울에 차가운 방에서 자는 것을 봤습니다. 10년이나 되었는데, 최근에 들으니까 남편이 이혼을 하자고 한답니다. 사실상 이혼은 벌써 옛날에 했는데 무슨 또 이혼이요! 이혼 소송을 걸어놓고는 자식들은 자기에게 돌려 달라고 한답니다. 이런 고소를 당한 아내가 있습니다.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않으려면 결혼을 하지 말아야지, 자식을 낳지 말아야지, 자식을 낳아 놓고 가족을 돌보지 않고 그 긴 세월 동안 고생시키는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다른 가족들보다 더 자신을 잘 살피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살피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고 새로운 결단을 하고 새롭게 헌신하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을 살피고 가족을 돌보려고 노력하지요. 우리는 6일간 힘써 일하고 제7일은 가족들을 데리고 교회에 옵니다. 이마에 땀을 흘리고 희생을 하면서도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헌신합니다. 이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의 가는 길입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다른 사람을 섬기려는 태도, 가족을 돌보려는 헌신과 노력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가는 날까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가족을 돌볼 사랑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 2주 동안의 설교 내용입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해야 합니다. 때때로 마음은 원이로되 습관이 잘못 들어서 고민하고 후회하고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러분과 제 가정에 사랑의 흔적이 보이고 가족 간에 사랑이 넘친다면 그것은 가장이 기도하고 사랑을 실천하려고 몸부림 친 흔적입니다. 만약 우리 가족들이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새롭게 헌신하고 하나님의 도움을 반드시 구해야 합니다. 왜? 인간이 부족하고 연약한 것은 누구를 막론하고 마찬가지거든요.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우리는 다 부족한 인간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우리가 가족을 사랑하는 사랑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리더십은 가장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가장들은 내 가정의 사랑의 책임이 나라고 하는 한 남자(남편, 아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을 깨닫고 여러분과 제가 앞으로 꾸준히 기도하면서 우리 가족들을 사랑함으로써 사랑의 분위기가 우리 모든 가정에 넘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뿐만 아니라 “아내를 귀하게 여기라. 아내의 명예를 잘 세워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7절에는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지식”은 여자인 아내를 잘 파악하라는 것입니다. 아내의 육체적, 정신적, 정서적 필요를 잘 파악해서 그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아내와 동거하고”라고 했는데 “동거한다”는 것은 한 집에서 같이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한 집에서 살려면 상대방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귀하게 여기라고 하나?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남자도 연약한 데 남자보다는 더 연약한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여자는 육체적으로 남자보다 약합니다. 어쩌다가 남자보다 힘이 센 여자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힘쓰는 일은 남자들이 합니다. 정서적으로도 우리 남자들은 좀 굳어 있어서 웬만한 일에는 끄떡없는데 여자들은 한 마디만 들어도 울잖아요. 상처를 잘 받습니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우리 집에는 여자가 네 명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저희 아이들을 키울 때 목소리 톤을 도레미에서 ‘미’이상 올리면 안 되고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말해야 했습니다. 만약 ‘미’를 넘어 ‘파’까지 올라가면 눈물바다요. 그래서 큰소리도 못 치고 지금까지 살아온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여자들이 약하니까 떨어뜨리면 금방 깨지는 연약한 유리그릇을 다루듯이 다루라는 것입니다. 영어성경에 보면 “give honor to the wife”라고 했습니다. ‘honor’ 명예이지요. 아내를 귀하게 잘 받들고 돌봐주라는 말입니다.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이 제 가슴에 너무 와 닿습니다. 제가 어쩌다가 좀 잘 하지 못하면 금방 기도를 못하겠어요. 기도를 하려고 눈을 감으면 “야! 너 어떻게 했지?”라고 하나님께서 바로 저를 책망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제 가족을 잘 돌보지 못하거나 어렵게 만들면 제가 바로 영적으로 손해를 봅니다. 성경도 안 읽히고, 기도도 안 되고, 찬송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안 됩니다. 나 자신의 영적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가 영적으로 풍성하려면 내 가족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해야 합니다. 그 행복한 얼굴과 목소리를 보고 들어야 내가 편안하고 기도가 되고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예배도 설교도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가족은 영원한 은혜의 동반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만 30년, 40년, 50년 살다가 끝나는 가족이 아니라 이 땅의 인생이 끝나고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도 영원한 나의 가족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부터 나의 가족을 잘 돌보고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나와 함께 영원한 소망을 같이 나눌 가족이니까 잘 돌봐주라”고 베드로 사도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장은 또 가정의 영적인 제사장입니다. 영적인 리더라는 말입니다. 유대인과 모슬렘 가장들은 가정에 대한 책임을 철저하게 집니다. 유대인들은 유대교 안에서, 모슬렘들은 이슬람 종교 안에서 그 가족을 철저하게 다스리려고 합니다. 모슬렘은 좀 심해서 문제입니다. 

이집트 대학교의 한 이슬람 역사 교수는 학교를 방문한 이슬람 이맘이 강연을 하고 있는 도중에 코란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단지 알고 싶어서 질문을 했는데 “왜 코란에 대해 질문을 하나? 도전을 허락할 수 없어! 무조건 복종이야!”라는 말을 듣고 학교로부터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코란에 도전했다고 아들을 죽이겠다고 총을 꺼내들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누이가 동생에게 지금 도망가지 않으면 아버지에게 죽는다고 말해주어서 그는 문을 박차고 도망갔습니다. 그 순간 아버지가 따라 나와 아들을 향해 총을 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맞지 않고 모퉁이를 돌아 살 수 있었습니다. 그 교수는 지금 예수를 믿습니다. 얼마 전에 우리 교회도 방문했습니다. 이슬람은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려고 할 만큼 자신의 신앙을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닙니다.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게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 이는 나 여호와가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말한 일을 이루려 함이니라”(창18:19).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대해서 자신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아브라함을 잘 아는데 아브라함은 자기 자녀들과 가족들을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쳐서 자식들이 의롭게 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게 할 것을 나는 분명히 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내가 자신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만약에 제가 여러분의 이름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면서 “하나님, 000 아세요?”했을 때 하나님께서 “음… 주일날 본 것 같긴 한데,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도 있어서 이름은 알 것 같지만 얼굴은 잘 모르겠네”하실 것 같습니까, 아니면 “I know him. 내가 그를 잘 알지! 매일 나와 만나서 이야기해. 그 사람이야 말로 자기 가족들을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들을 세우려고 하는 사람이야! 아브라함과 같아!”라고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과 제가 아브라함의 헌신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I know him. 나는 그 친구를 잘 알아!”라고 말씀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가족을 잘 돌보려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기를 원합니다. 가족을 사랑하고, 가족을 귀하고 존귀하게 여기고, 영적인 가장으로서 대대손손 신앙의 명문가를 이루는 출발이 나로부터 시작되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저를 사용해 주옵소서. 저의 연약한 부분들을 채워주시고 덮어주시고 저를 도와주옵소서. 하나님, 제가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내 아내와 자손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함으로써 우리 가정이 행복하고 자손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신앙의 명문 가문이 되며,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대대손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을 지키며 삶으로써 하나님이 은총 베푸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이 여러분 가문과 삶 속에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수고해서 좋은 가정의 열매가 맺히면 누가 행복합니까? 내가 행복하지요. 나는 부족했지만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내가 할 수 없는 것도 하나님이 채워주심으로써 신앙의 가족을 만들어 여러분 모두가 내 가족을 데리고 영원한 천성 본향에 같이 갈 수 있는 가정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김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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