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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물위를 걷는 베드로 (마 14: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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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위를 걷는 베드로 (마 14;22-3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23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24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25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26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27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28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29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33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14;22-33)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문제에 부딪히고,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쩔 수 없는 환경을 만날 수 있지요.  문제는 그 고난과 아픔, 어려움과 시련들을 운명처럼 여기며 포기하고 머리에 이고 살아갈 것이냐? 아니면 고난을 이기고 문제를 해결하고 어려운   환경을 넘어서면서 살아갈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 인가요?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제 죽게 되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제부터 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망하게 생겼다고 말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함께 계시니   우리는 능히 이기고 승리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바로 앞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입니다. 「어린 아이의 도시락 하나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메시야가 왔다. 바로 여기 계신 예수님이 메시야다. 이 분을 왕으로 삼는다면 모든 경제문제는 끝난다. 이 분이야말로 참으로 경제대통령이다. 이 분이 독립운동을 해 주신다면 로마가 문제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위대한 민족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 예수님이 주시는 떡과 물고기를 먹은 군중들 사이에 커다란 동요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도시락 하나가 어른 남자만 5,000명이면, 본래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여자들이 더 많습니다. 아이들도 당연히 있습니다. 

학자들은 전체 사람 숫자를 약 20,000명으로 봅니다. 그리고 12바구니나 남았습니다.  1;20,000이면... 10,000 ; 2억이고,  금산 인구 50,000명 먹는 것으로는 10억을 먹이고 60만 바구니가 남습니다. 전 세계 사람의 먹는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게 해결이 됩니다. 그리고 출세, 권력... 富와 貴 다 한 방에 해결이 되지 않습니까?  이것이 복음인가요? 아닌가요? 우리 예수님의 행동이 답인데요... 우리 예수님께서는 무리를 흩으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급히 배에 태워 건너편으로 가라고 보내십니다.  

22절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사”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 “재촉하사”로 번역된 “아낭카조”란 말은 억지로 가게 했다는 의미입니다.  크고 놀라운 이적의 장소를 억지로 떠나게 하시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먹는 일에 집착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군중들도 예수님께서 직접 강제로 흩으셨고 제자들은 억지로 배를 태워 갈릴리 바다에 보내셨습니다.  의식주문제, 사회 부조리문제, 정치적인 식민지 문제... 예수님은 이런 것을 복음이라고 보시지 않은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 복음이 무엇인지를 깨닫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② 이제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다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이것을 원문으로 바사노스(βασανος)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죽을 지경으로 어려운 시련’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풍랑으로 죽을 지경의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예수님께서 임금이 되시면 자기들은 장관자리 하나씩 할 줄 알았는데 이제 죽게 생겼습니다. 가슴 부푼 꿈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죽으면 그 모든 꿈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제 제자들에게 남은 문제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구원의 문제요,  생명의 문제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풍랑이 도움이 된 것입니다.    

바사노스(βασανος) 즉 ‘죽을 지경으로 어려운 시련’이 인간의 실존을 깨우쳐 준 것입니다.  ‘진짜 복음’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사람의 육신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 영원한 천국과 영원한 지옥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성도여러분, 진짜 복음은 배불리 먹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인 문제,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짜 복음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은 이 세상에 살아있을 동안의... 이세상의 문제입니다. 복음이 이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복음은 70년에서 80년만 복음입니다. 또한 이미 배가 부른 사람, 이미 부자인 사람, 이미 부와 귀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전혀 복음이 아닙니다. 세계를 정복하고 있는 로마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복음이 아닙니다. 유대사회의 기득권을 쥐고서 부와 귀를 누리고 있는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영혼의 문제, 영원한 문제, 죽음과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진짜 복음입니다.  풍랑을 만난 제자들의 모습에서 진짜 복음을 발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③ 신음하고 있을 때에, 죽게 생겼다고 아우성치고 있을 때에, 산 속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우성을 아셨습니다.  떨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그치시고 산에서 내려와 바다 위로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의 고난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기도를 그치시고 제자들을 찾아와 함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분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문제 속에 신음하고 있을 때 문제를 바라만 보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며, 말로만 위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  그분은 우리가운데 찾아오셔서 우리의 문제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고난 가운데 아파하고 있을 때에 안타까이만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나니 안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나니”라는 말은 ‘바로 나다’  ‘항상 너희와 함께 있던 바로 나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놀라지 말고 안심하라는 말이 따라 나옵니다. 
  
또한 지금 시간이 밤 4경입니다. 유대인들은 저녁 해 질 때부터  아침 해 뜰 때까지로 하루를 구별했습니다.  12시간을 4부분으로 1경에서 4경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그래서 밤 4경이면 새벽 3시에서 6시 사이의 해 뜨기 직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밤 4경이 될 때까지 파도와 싸우면서 지칠 대로 지쳐있었습니다.    이 시간, 즉 밤 4경이라는 시간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가 드러난 시간이요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때가 예수님의 활동이 개시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밤 4경은 절망의 시간이라고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밤 4경은 예수님께서  계획하신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 위에 계시면서 고통당하는 제자들의 상황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은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간에 오실 수도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이왕 오실 바에야 밤 2경이나 3경에 오셨으면 훨씬 좋았을 것 아닌가요?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최고로 어두운 그 시간, 4경에 제자들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에는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시는 동안 바다 위에서 고통당하는 제자들의   사정을 모르셨던 것으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다 체크하시면서 오히려 그가 원하는 시간까지 기다렸습니다. 밤 2경이나 3경에 그 고생하고 죽을 것 같이 고민할 때 안 오신 예수님,   이제 ‘자포자기’하고, 다 죽었다 하면서 포기하려는 시간에 오신 주님...
  
성도여러분, 내가 옳습니까? 예수님이 옳습니까? 예수님이 옳습니다.    성도여러분, 내 시간이 바른 시간인가요? 주님의 시간이 바른 시간인가요?   주님의 시간이 바른 시간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의 시간을 배우고 깨닫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밤낮없이 구하는 우리들의 기도가 응답이 늦어질 때, 조급해 하고 짜증내고, 원망하기 보다는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그 주님의 시간에 맞추는 인내심을 배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④ 주님은 주님의 방법으로 오십니다.  주님의 방법이 복음(福音)입니다. 

25절에 “밤 4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물 위로 걸어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타고, 바다를 밟으며 오십니다. 성경도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합니다.  왜 이런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폼 잡으시려고 그러실까요? 당연히 제자들 때문이겠지요.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바람과 파도 때문에 다 포기하고 죽을 준비를 하는 제자들은 무엇을 알게 되었을까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셨을까요?  

우리 예수님은 바람과 바다를 지으신 창조주이며 전능하신분입니다. 제자들을 죽음으로 끌고 가는 바람과 파도,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절망을 주는 바람과 파도를 밟고  오시는 주님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 그 분이 바로 복음입니다. 먹는 문제, 정치문제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바람과 바다를 발로  밟으시는 예수님, 바람과 파도를 정복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여러분, 이 예수님의 모습이, 인간의 절망과 죽음을 발로 밟고 오시는 이 기적적인 모습이 인간인 우리들과 상관이 있을까요? 아무 상관이 없을까요?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제자들의 태도가 어떠합니까?  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님을 보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못난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유령이다 귀신이다 하면서 놀라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오라”. 이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갔습니다.  이때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 나도 오라 하소서’하면 어떨까요?  야고보나 요한이나, 가룟유다가 ‘나도 오라 하소서’ 했다면... ‘너도 오라!’고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을까요?  베드로와 재자들을 위해서 걸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을까요? 우리를 위해서 걸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을까요? 누구든지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면서 믿음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위해서 물위를 걸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셨을까요?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려고,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시려고, 우리도 주님이 오라하시면 물위를 걸을 수 있다고 ‘아멘’ 하는 사람들을 찾으시려고 이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 일은 상식을 뒤집는 일입니다. 그래서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눈앞에서 보면서도... 또 베드로가 물위를 걷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내가 물 위로 걷는 담’ 하면서 다른 제자들은 도무지 도전장을 내지 못합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입으로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고 지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간구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성경 말씀도 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너무나 종종 내 상식 안에만 있습니다.  자기의 상식을 넘어서는 일을 신자들은 기도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똑같은 제자들이, 똑같은 주님을 바라보았지만 열한 사람들은 구경꾼처럼 바라만 보았습니다. 베드로 한 사람만이 바다 위를 걸어가는   기적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입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라고 성경이 말씀합니다.
  
이 시간 혹시 여러분들이 접어두었던 여러분들의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상식이 아니라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기도할 엄두를 못내고 포기했던 제목들이 있나요?  있다면 이 시간 펼쳐서 ‘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꿈꾸는 그 일들이 너무나도 엄청나고 커서 도전하지 못했던 일들이 있습니까? 이 시간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도전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병으로 신음하며 오랫동안 고생해 오신 분들이 계십니까? 죽은 자를 살리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시고 눈먼 자의 눈을 뜨이셨던 주님을 믿고 이 시간 여러분의 질병을 주님 앞에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찮은 일에 절망하고 낙심하는 사람들이 계십니까? 빈 항아리를 포도주로 넘치게 하셨던 주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황이라고 고민하는  가운데도 믿음을 가지고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 벌떡 일어나시기를 바랍니다.
 
베드로를 보십시다. ‘오라!’ 하는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베드로는 흥분했습니다. 배에서 내려서 물위에 발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도전입니까? 그는 배에서 일어나 파도가 흉흉한 바다 위로 과감히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산더미 같은 파도가 보였으나 그것을 무시해 버렸습니다. 허깨비처럼 여겼습니다. 오로지 파도 위에서 걸어오시는 예수님, 파도마저 다스리시는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이 ‘오라’ 말씀하시면 나는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축복을 선언하셨으면 기쁨으로 받아 간직하면 내 것입니다.  베드로는 풍랑이는 바다에 발을 내딛었습니다. 주님처럼 바다 위를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나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나에게 죽음을 가져오던 바람과 파도를 내 발로 밟으면서 걷는 것이 복음입니다.  물위를 걷는 베드로의 모습에서 ‘진짜 복음’을 발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⑤ 그리스도인은 실패도 성공도 말씀에 근거해야 합니다. 

 ‘오라!’ 주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천지는 변하고 파도와 바람은 그대로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말씀으로 하는 일은 성공이요, 말씀이 없이 하는 일은 실패입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베드로는 자신의 재주나 능력으로 물 위를 걸으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붙들고 ‘오라’ 하시는 말씀에 의지하여 물 위로 지금 걸어가고 있는 것이지요.    믿음이 좋다는 한 청년이 은혜로운 집회를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는데 여름철 폭우에 계곡물이 넘쳐서 건널 수 없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믿음이 충만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로 걸었다면 나도 넘실대는 이 계곡물을 건널 수 있으리라. 

“주여 믿습니다! 100번 외쳤습니다. 그리고 강물에 발을 풍덩 담그는 순간 쑥 빠져 들어가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사람 살려! 옆에 있던 청년들이 밧줄을 던져서 겨우 살려 주었습니다. 나는 왜 베드로처럼 걷지 못할까? 믿음 없음을 한탄했다는 얘기지요.  그러나 이 청년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은혜와 능력은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을 나타내는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로고스’ 기록된 말씀입니다. 두 번째는 ‘레마’ 적용된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록된 성경, 로고스의 말씀을 읽을 때에, 설교를 들을 때에 확 마음에 와 닫는 말씀이 있습니다. 감동이 됩니다. ‘아멘’합니다. 이렇게 나에게 은혜가 되는 말씀, 나에게 주시는 말씀, 나에게 적용되는 말씀이 ‘레마’입니다.  ‘오라’는 말씀은 ‘레마’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라’ 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간 것이지, 자기 생각으로 간 것이 아닙니다.  이 젊은이는 강물을 자기 생각으로 건너보려고 했던 게지요.  주님이 오라 하지 않는 일을 하면 망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씀에 근거하고 살아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성공이나 실패는 불행입니다. 말씀에 근거한 일은 인간인 우리 눈에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모두가 위대한 것입니다. 

대전 한밭장로교회 ‘이영환’ 목사님은 출에굽기 14장의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가지고 자기교회 성도들에게 ‘지금도 홍해바다는 갈라진다’ 라고 설교하십니다. 그분에게는 홍해가 갈라지는 것은 그냥 성경에 적혀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영환 목사님은 ‘지금도 홍해바다는 갈라진다’ 는 말씀을 하나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우리도 말씀위에서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소멸시켜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감동을 교회 문을 나서면서, 또 금전이나, 출세나, 세상욕심 앞에서 소멸시키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지 않기를 소원합니다. 

 
⑥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문제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을 붙들고 믿음으로 시작한 일에도 실패가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바다 위를 걸어가던 베드로가 물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왜 베드로가 물속에 빠져 들어가게 된 것입니까?  30절에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뚜벅뚜벅 주님만 보고 걸어갈 때는 바다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파도가 휘청~ 거리며 베드로와 예수님 사이를 지나갑니다. 예수님이 파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까  흉흉한 바다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지금 내가 뭐하나, 이건 상식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어온 것입니다.  이제 제정신이 들었다고 해야 합니까? 이제까지는 제정신이 아닌 것일까요?     

성도여러분, 파도를 보고 빠지는 것이 제정신이라면, 예수님을 보고 물위를 걷는 것은 어떤 정신입니까?  우리가 평생을 바람과 파도를 보고 절망하고, 죽을 까 두려워하는 것이 제정신으로 사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믿음은 뭐고, 복음은 무엇이 복음입니까?   아마 이 광경을 지켜보던 제자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을 수 있지요. 내 저럴줄 알았다. 자기 분수를 알아야지. 저것 좀 봐 자기를 살피지 않고 날뛰니까 저렇게 되지.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이것이 바로 실패한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믿음이 없는 신자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입니다.  조롱입니다. 

사실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더 힘든 것이 실패했다고 놀리는 다른 사람들의 조롱이요 경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 없이 하는 말이라도 정말 상처가 되지요.   하지만 우리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조롱해도, 친구가 나를 비웃어도, 내 부모가 나를 도와줄 수 없어도, 예수님도 불가능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고 책망하셨나요? 만용을 부리다가 어쩔뻔했냐고 꾸짖으셨나요?  제자이면 제자답게 행동하라고 냉소하셨나요?    

예수님은 31절에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십니다. 믿음이 작은 자 “올리고피스토스” 이 말은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에게 마태는 사용한 적이 없는 말입니다. 믿음의 분량, 믿음의 차원이 왜 여기에 미치지 못하느냐? 믿는 자들에게 믿음을 보충해 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할 때 ‘즉시’ 주께서 베드로의 손을 붙들고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베드로의 손을 붙들고 왜 믿음이 없느냐? 왜 의심하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책망하고 비난하는 말이 아니라 안타까워하시는 말씀이고, 겪려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때로 믿음이 있다할지라도, 말씀 듣고 달려간다 할지라도,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도 건강(健康)이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업(事業)이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랑(愛)이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행복(幸福)이 물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하면 됩니다.  주께서 ‘즉시’ 우리의 손을 붙들어 주실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특히 물위를 걷는 베드로를 보면서 ‘복음’을 발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진짜 복음’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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