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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수의 힘' 1 : 850대 1 (왕상 18: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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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힘' 1 : 850대 1 (왕상 18:16~21) 
 
 
❚소수의 힘

몇 해 전 ‘300’이라는 특이한 제목을 가진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개봉된 적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 보신 분이 있겠습니다만 이 영화는 주전 480년 페르시아 왕이 이끄는 백만 대군이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스파르타 왕 레오니다스가 300명의 용사들을 이끌고 백만 대군과 맞서 싸운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전쟁영화입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300명이 백만과 싸웁니까? 처음부터 아예 상대가 안 되는 싸움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300명의 용사는 테르모필레 협곡을 지키며 싸움을 벌입니다. 

비록 백만 대군이라 해도 사방이 낭떠러지로 둘러싸인 아주 좁은 협곡에 한꺼번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300 용사들은 좁은 협곡 입구를 막고 서서 쳐들어오는 페르시아 군을 하나하나 처치합니다. 처음에는 고작 300명으로 백만 대군과 맞서는 것을 보고 코웃음 치던 페르시아 왕과 군사들은 차츰 이 300명의 용사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맨 마지막에는 결국 이 300명의 용사들이 다 장렬하게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만 이 300 용사들의 목숨을 건 싸움은 전설이 되고 온 그리스 백성들의 가슴을 불타게 만들어 마침내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승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300명의 용사가 끝까지 백만 대군과 맞서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그들 하나하나가 용맹한 용사요 지형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다른 데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스파르타의 300 용사들의 정신(spirit)입니다. 이 300명은 비록 적군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소수였지만 생명을 건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조국을 위해, 그리고 가족을 위해, 또한 자신의 명예를 위해 불가능한 전투에 생명을 건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누굴까요? “뵈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장 뵈는 게 없습니까? 자기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죽기를 각오한 사람 앞에서는 어떤 것도 통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아무리 최신 무기로 무장을 해도 이 죽기로 각오한 정신을 가진 사람을 이겨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군대가 아무리 백만 대군이라도 우리는 죽기를 각오하지 못했는데 “싸우다가 여차하면, 불리하면 도망가면 되지 뭐, 나 없어도 우리 편이 백만이나 되는데 누군가 나 대신 싸우겠지” 하는 마음인데 상대방은 비록 300명이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있다면 절대 못 이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입니다. 정신무장 말입니다.

영적인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싸움도 결국은 전쟁입니다. 내가 이기든 네가 이기든 둘 중에 하나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이기지 못하면 패하고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적인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느냐? 숫자도 중요합니다. 무기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정신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도, 또 성경을 통해서도 투철한 정신으로 무장한 사람들, 다른 말로 진정으로 헌신된 사람들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이렇게 무장한 사람들, 정말 죽기로 각오한 사람들은 비록 소수의 적은 숫자라도 일당 백, 아니 일당 천이기 때문에 누구도 이길 수 없습니다. 이렇게 헌신된 소수, 강한 신앙과 정신으로 무장한 소수를 우리는 ‘하나님의 소수’라고 부릅니다. 신약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딤후 2:3)라고 부릅니다. 이런 소수 정예부대가 있으면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뭐든지 할 수 있고 누구든지 이길 수 있습니다. 교인들이 이런 소수 정예부대면 그 교회는 어떤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악한 세력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하나하나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소수,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소수정예부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부터 ‘소수의 힘’이라는 주제로 몇 주 동안 성경에 나온 소수의 힘이 어떤 것인지 시리즈 설교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들어 쓰시는 권능의 사람들, 그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수 정예부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엘리야의 시대

엘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 북 왕국 이스라엘은 참으로 한심한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임금은 아합 왕입니다. 가정은 가장을 잘 만나야 하고 교회는 목회자, 나라는 지도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 한 사람, 그 한 사람의 지도자 때문에 그 가정이, 교회가, 나라가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은 남북 왕국을 통틀어서 역사상 최악의 왕이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29절부터 보면 이 아합 왕에 대한 평가가 나오는데 한 번 같이 찾아서 읽어볼까요?

29 유다의 아사 왕 제삼십팔년에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니라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사마리아에서 이십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니라 30 오므리의 아들 아합이 그의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 31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따라 행하는 것을 오히려 가볍게 여기며 시돈 사람의 왕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아내로 삼고 가서 바알을 섬겨 예배하고 32 사마리아에 건축한 바알의 신전 안에 바알을 위하여 제단을 쌓으며 33 또 아세라 상을 만들었으니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

보세요. 아합이 22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면서 30절에 나온 것처럼 “이전의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더욱 행하여”라고 했고 33절에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 모든 왕보다 심히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전무후무한 최악의 왕이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아합 왕뿐 아니라 그 왕비인 이세벨도 사상 최악의 왕비였다는 사실입니다. 본디 이세벨은 시돈의 공주로 아합 왕에게 시집오면서 자기가 섬기던 우상, 특히 바알과 아세라 신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은 아내를 위해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만들고 그 우상에게 제사할 제단을 쌓았다는 것입니다. 바알은 가나안 신 중에 비와 폭풍의 신이고 농사와 풍요를 관장하는 신입니다. 아세라는 바알의 어머니로 이 바알과 아세라는 가나안의 수많은 신 중에 가장 인기가 좋은 우상이었습니다.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는 이 바알과 아세라 우상으로 이스라엘 전국을 가득 채우게 한 것입니다. 악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싹쓸이해서 죽이고 엘리야도 죽이려고 합니다. 결국 온 나라를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선지자들로 가득 차게 되고 말지요. 자, 이만하면 당시 상황이 얼마나 한심하고 심각한지 실감이 갑니까? 이스라엘 역사상 언제나 우상숭배는 존재해 왔지만 이 시대만큼 심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정말 끝장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 언제나 헌신된 한 사람을 보내십니다. 그 용감하고 헌신된 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죄악을 지적하고 그 죄를 뿌리 뽑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최악의 시대, 가장 캄캄한 암흑의 시대에 등장한 그 한 사람이 바로 엘리야 선지자입니다. 엘리야는 예수님이 변화산에 오르셨을 때 모세와 함께 등장할 정도로(마 17:3) 이스라엘의 모든 선지자를 대표하는 영적 권세를 가진 선지자입니다. 

따라서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제거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저 엘리야만 죽이면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싹 쓸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려는 아합과 이세벨을 피해 잠시 도망갔다가 이제 한 판 결전을 벌이기 위해 돌아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 선지자와 그를 미워해서 죽이려는 아합 왕이 만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6절 뒷부분부터 17절까지 보세요.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아합은 엘리야 때문에 이스라엘 땅에 비가 3년 동안 안 내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왜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느냐고, 너 때문에 온 백성이 너무 고통을 받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18절에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무슨 뜻입니까?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힌 게 아니라 아합과 그 집안이 괴롭힌다는 것입니다. 

너는 지금 나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아합 가문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겨서 이렇게 3년이나 비가 안 오고 백성이 고통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요 자기 죄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남을 탓하고 있는 뻔뻔한 영적 상태지요. 우리는 얼마나 이런 뻔뻔한 일을 많이 저지릅니까? 마침내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이렇게 도전합니다. 19절입니다.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한 판 붙어보자 이겁니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갈멜 산에 모아놓고 그 앞에서 공개적으로 하나님이 이기나 바알 아세라가 이기나 붙어보자는 겁니다. 이것은 엘리야와 아합의 싸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바알 아세라 우상과의 싸움입니다. 여호와 신앙과 우상 신앙과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도전이 참 이상합니다. 1대 1이 아니에요. 몇 명과 붙겠다는 것입니까?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즉 이세벨 왕비가 먹여 살리는 바알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 선지가 사백 명, 합하면 몇 명입니까? 850명지요. 

그러니까 지금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혼자 붙겠다는 것입니다. 850대 1의 싸움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참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여러분, 이런 싸움 해 본 적 있습니까? 850대 1은 관두고 1대 2, 1대 5로 싸워본 적 있습니까? 이게 되는 싸움입니까? 영화에 보면 주인공 혼자 수십 명과 싸우는 장면이 나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화에나 나오는 얘기고 실제로는 아무리 내가 싸움을 잘 해도 혼자서는 절대 여럿을 당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엘리야는 혼자서 850명의 우상 선지자와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참 아합이 봐도 기도 안 찰 노릇이지요. 제가 아무리 대단한 선지자로서니 어떻게 혼자서 850명과 싸우겠다는 겁니까? 그래서 이 싸움은 100% 이긴 싸움이라고 확신한 아합은 이스라엘 전국으로 사람을 보내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갈멜 산으로 모읍니다. “이 놈이 간이 부어서 제 무덤을 스스로 파는구나. 이번이 여호와 신앙의 대표자 격인 엘리야를 보기 좋게 케이오 시켜서 여호와 신앙을 단숨에 뿌리 뽑을 절호의 기회다.” 이렇게 생각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갈멜 산으로 총집합시킨 것이지요.

❚정신이 중요합니다

이제 막 싸움이 시작되려 합니다. 그날 갈멜 산에는 대단한 인파가 몰려들었을 것입니다. 엘리야뿐 아니라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 그리고 왕을 수행하는 수많은 신하와 호위병이 왔겠지요. 아합 왕이 고르고 골라 불러 모은 전국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이 왔고 게다가 온 이스라엘 백성이 다 모여 이 순간을 구경하게 됩니다. 과연 누가 이길까? 그 유명한 권능의 선지자 엘리야와 850명의 특별 선발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가 850대 1의 싸움을 시작하는데 과연 누가 이길지 백성들은 흥미진진하게 몰려와 구경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중에 누구도 이 싸움이 엘리야와 우상 선지자들의 싸움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아세라 우상의 싸움인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입니다. 단순히 누가 이길까 흥미롭게 싸움을 구경하려고 했겠지요. 그런데 막 한 판 위대한 싸움이 시작되려는 순간 엘리야는 먼저 거기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21절을 보세요.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왜 그 엄청난 싸움을 시작하기에 앞서 엘리야가 거기 모인 백성들에게 이런 말을 한 것일까요? 이것이 바로 그 중요한 정신무장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정신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왜 이렇게 무기력합니까? 왜 이렇게 아합 왕과 이세벨 왕비에게 휘둘리고, 몇 명 되지도 않는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에게 영적으로 완전히 압도당해 빌빌대며 그들 의도대로 우상이나 섬기며 살고 있는 것입니까? 바로 이 영적 정신무장 때문이라고 엘리야는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일갈(一喝)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한 마디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다리를 걸친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전형적인 양다리 걸치기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섬기고 바알도 섬기고, 평상시에는 하나님 섬기다가 농사 때가 되면 농경의 신이고 풍요의 신인 바알이 비를 내려줘야 하니까 그 때는 바알 신전에 가서 제사하고, 꿩 먹고 알 먹고 하면서 양다리 신앙으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이 양다리 걸치기 신앙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적당히 믿으면서 양쪽의 단맛만 쏙쏙 빼먹겠다는 신앙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신앙을 아주 가증히 여기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3장에서 너희가 차라리 차든지 뜨겁든지 해야지 나는 미지근한 것을 아주 싫어한다고 가증히 여기셔서 토해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런 현실을 엘리야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이 ‘머뭇머뭇’이라는 말이 참 재미난 말입니다. 이것은 둘 사이에서 주춤주춤 거리며 양다리를 걸치는 모습을 뜻합니다. 그런데 본디 히브리 원어에 보면 ‘파사흐’라고 해서 절뚝절뚝 비틀거리는 모양을 뜻합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가 하면 바알 선지자들이 바알 우상 앞에서 제사 드릴 때 요란하게 뛰며 춤을 추는데 그 모습이 절뚝절뚝 하며 발을 이쪽으로 짚었다가 저쪽으로 짚었다가 하는 모양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제단 앞에 가서 이런 춤을 추는 모습이 마치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이리저리 양다리를 걸치는 모습과도 같다고 비꼰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연 이렇게 머뭇머뭇 하면서 적당히 양다리 걸치며 믿는 사람이 무슨 힘이 있고 능력이 있겠습니까? 싸움터에서 적당히 싸우다가 여차하면, 좀 불리하면, 내가 다칠 것 같으면 도망가지 뭐, 우리 편이 이렇게 많은데 나 없어도 누군가 싸워주겠지 하는 군사들이 아무리 숫자가 많고 백만 대군이면 뭐 합니까? 나는 한 쪽 편에 분명히 서서 목숨을 건다, 나는 여기 목숨 걸었다 하는 사람 300명, 아니 단 한 명만 있어도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습니다. 

이런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다수가 헌신된 소수, 제대로 된 정신으로 무장한 한 사람을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850대 1의 영적 싸움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신 바짝 차리라고, 이제 양다리 걸치고 머뭇머뭇 하지 말고 내가 하나님 한 분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아예 바알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살 것인지 분명히 결단하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이제 막 벌어질 싸움은 겉으로 보면 단순히 엘리야라는 선지자 한 사람과 바알 아세라 선지자 850명의 싸움으로 보이지만 실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엘리야와 아합 이세벨의 싸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너희 이스라엘 백성 자신들이 치러야 할 한 판 영적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리고 이 영적 싸움에서 이기려면 먼저 내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부터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정신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이 무서운 영적 싸움에서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이 시간 분명히 결단하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 편에 설 것인지, 내가 누구에게 목숨을 걸고 내 인생을 걸 것인지 말입니다. 적당히 믿고 적당히 손해 안 보고 믿지 말고 이제는 분명히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주일에 교회 와서는 하나님 찾고 월요일부터는 세상 나가서 세상을 따르며 적당히 타협하고 대충 사는 그런 양다리 걸치기 신앙이 아니라 이제는 양자택일, 둘 중 하나를 분명히 선택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편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아예 세상과 우상을 따를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가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에(눅 16:13) 누구를 섬길 것인지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지 못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가증히 여기실 것입니다. 무기력하고 아무 능력도 영향력도 갖지 못하는 허당 크리스천이 될 것입니다. 숫자만 많지, 자리만 차지하지 희미한 정신으로 대충 믿고 대충 살아가는 그런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토해 내치시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사는 성도는 결코 하나님 앞에 존귀한 자가 될 수도 없고 당연히 은혜도, 복도 받을 수 없게 됩니다. 열매도 없습니다.

❚이 제단에 불을 내려주소서

오늘은 여기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다음 주에는 계속해서 “850대 1 : Part Two”라는 제목으로 엘리야와 850명의 바알 아세라 선지자가 본격적으로 한 판 붙는 장면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간 하나님의 은혜로 참으로 귀중한 부흥사경회를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여 보내주신 김옥례 전도사님을 통해 은혜 받고, 통회자복하고, 결단하고, 말라붙은 눈물샘이 팡 터지고 말았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얼마나 울었는지요. 부흥회 감사헌금은 평상시의 4배 이상이 나왔고, 새벽기도를 작정하고 오는 분이 평상시 3배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숫자보다, 액수보다 더 놀랍고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해 제단에 불을 내리신 것처럼 우리 교회제단에도 불을 내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은혜의 불, 헌신의 불, 회개의 불, 결단의 불 말입니다. 교회건축과 새로운 도약을 위해 준비하는 이 중대한 시기에 보내신 여종을 통해 이런 뜨겁고 놀라운 불을 내려주신 것은 분명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임을 믿습니다.

이번 부흥회는 우리교회 64년 역사상 가장 놀랍고도 감격적인 순간이었다고 감히 말씀 드립니다. 마치 엘리야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하늘에서 불을 내리셔서 제단을 태우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이 교회 제단에 불을 내리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와 게으름과 나약함을 성령의 불로 태워버리시고 우리 모두의 심령과 이 교회를 새롭게 하신 것입니다. 

이번 부흥회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분명 이 불로 우리가 태워져서 나약하고 양다리 걸치기 신앙으로 대충 믿고 사는 무기력한 다수가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교회를 내 가슴으로 뜨겁게 사랑하는, 하나님 앞에 무장되고 헌신된 용사들을 우리 교회제단에 세워 가시는 일이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하나하나가 엘리야가 되어야 합니다. 이 혼탁하고 죄악 많은 세상에서 우리가 엘리야가 되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헌신되어 하나님이 이 시대에 맡기신 사명을 목숨 걸고 감당할 소수 정예부대 말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하나는 비록 약하고 부족하지만 우리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결단하고 헌신하여 이 시대의 엘리야가 된다면 하나님은 분명 우리를 통해 위대한 역사를 이루어 가실 줄로 믿습니다. 새 성전을 건축하고 우리교회의 새 시대를 열어가려는 이 역사적인 순간에, 바로 이 타이밍에 하나님이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고 계신데, 이 시대의 엘리야를 찾고 계신데 바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런 권능을 가진 헌신된 소수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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