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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질서 (막 12:3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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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질서 (막 12:35~40)


교통사고가 났습니다. 그래서 버스에 타고 있던 승객들 가운데 안타깝게 죽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억울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째 사람은 원래는 96번 버스를 타야 되는데, 69번 버스를 96번으로 착각하고 탔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결혼식이 내일인데, 그 버스를 탔다가 안타깝게 희생된 총각입니다. 세 번째 사람은 버스가 막 출발할 때 저 뒤에서 급하게 달려와 버스를 세워 겨우 버스를 탔다가 변을 당한 사람입니다. 네 번째 사람은 버스 안에서 졸다가 그만 자기가 내릴 정거장을 놓쳐서 한 정거장 더 가는 바람에 죽은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들 가운데 누가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실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젊은이들이 하는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웃기기 위해 만든 이야기이지만, 결코 웃어만 넘길 수 없는 내용이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얼마나 모순과 불합리한 것으로 가득 차 있는가 하는 것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96번을 타야 하는데, 69번 버스를 96번으로 착각하여 탔다가 죽었다는 것, 내일 결혼식을 앞두고 행복한 삶에 대한 온갖 꿈과 희망이 부풀어 있는데, 그 마지막 날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 이제 막 떠나는 버스를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 겨우 잡아탔는데, 하필이면 그 버스가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것, 삶이 힘들고 피곤하여 깜빡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가는 바람에 그만 사고가 나서 죽었다는 것, 정말이지 다 억울한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우리의 삶 속에 이런 우스갯소리가 우스갯소리로만 끝나지 않고, 정말로 이런 비합리적인 사건들이,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며칠 전 천안함 침몰 사건만 하더라도 누군가 그 사고를 조장한 사람이 있다고 할 때 이처럼 어이없는 일이 어디 있겠으며 어린 딸을 8층에서 집어 던지고 자살하겠다고 아우성을 치다 체포된 여인의 이야기들은 우리 모두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일, 또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 서슴없이 행해지고 또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 그 누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삶 속에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또 일어나고 있다는데 우리의 말 못할 고민이 있습니다. 요즈음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들은 어떤 일들을 당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지난 한 주간 동안에도 우리들 가운데는 기쁘고 즐거운 일 보다는 이렇게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 속상하는 일, 기가 막히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당하면서 탄식했던 분들도 계셨을 것입니다. 

도무지 이성적으로 판단이 안 되는 그런 경우들을 보면서 정말이지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분명히 그게 아닌데도 그것이 맞는다고 찰떡같이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는 참으로 안타깝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런 모순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의 말씀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들은 논리의 모순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특히나 시작이 좋아야 하는 것은 정한 이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다 좋게 시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힘들게 시작을 해서도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모든 조건은 참으로 좋은데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한 결과를 낳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 갖추어져 있기에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갖추어질 수 있도록 돕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이 자기처럼 될까봐 딴죽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반면 내가 갖추어지지 못했기에 다른 갖추어지지 못한 사람을 더 세워주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고 반면에 다른 사람이 나보다 낫게 될까봐 또 딴죽을 거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에게 와서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대제사장과 서기관 바리새인들과 장로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그 증거를 보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많은 이적을 통해서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보여주었어도 그들은 믿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오히려 바알세불을 힘입어서 이런 일을 한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사탄의 능력이라고 평가절하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사탄의 역사로 그러한 일들이 나타난 적이 있었던가요? 아닙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이 모든 일들은 메시야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들입니다. 특히나 귀신도 믿고 떠는데 그들은 모두지 그들의 마음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네가 메시야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거기 대해서 내가 바로 그로라고 주님이 대답하셔도 너는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메시야가 나사렛 촌동네에서 나올 수 있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러 사람들을 보내 예수님을 끊임없이 흠잡으려고 했지만 그들의 모든 계획은 다 헛수고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들을 향해서 예수님이 질문을 던지십니다.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논지는 이것입니다. 분명 메시야는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오실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언대로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성령에 감동이 되어서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였는데 어떻게 다윗의 자손 즉 다윗의 후손이 될 수가 있겠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이라면 어떻게 후손이 조상인 다윗의 주가 될 수 있겠습니까? 분명 후손이라면 아랫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아랫사람이 주가 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신 분이십니다. 온 세상을 지으신 말씀 자신입니다. 그분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의 원래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주님이십니다. 하지만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은 다윗의 후손의 자리를 통해서입니다. 다윗보다 훨씬 뒤에 다윗의 가문을 통해 다시 말해 다윗의 후손인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육신을 입으신 주님만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러기에 논리적으로만 따진다면 그리스도는 주가 될 수 없습니다. 단지 후손일 뿐입니다. 하지만 본질을 말하면 원래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단지 잠시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주님이십니다. 본질적으로는 주님이십니다. 

많은 사람이 타고 가던 배가 그만 사고를 당해 침몰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타이타닉처럼 배는 침몰하는데 그 모든 사람이 빠져나가기에는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나마 구명정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연주를 하며 사람들의 불안하던 마음을 평안하게 바꾸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조금도 흔들림 없이 연주를 하고 있습니다. 이윽고 사람들의 혼란하던 마음들이 다 평안을 되찾게 되었을 때 지휘자는 다 같이 노래를 부르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리고는 함께 부르기 시작한 노래는 다름 아닌 생일 축하 노래입니다. “Happy birthday to you”(해피 벌스데이 투 유) 하고 노래를 시작하니 아니라는 것입니다.  “Happy birthday to me”(해피 버스데이 투 미)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볼 때는 오늘이 죽는 날이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오늘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새로 태어나는 날 그러니까 생일이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다 자기의 생일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주의 친구 생일 축하합니다.”

논리적으로는 죽음은 끝나는 것이요 생일은 태어나는 것이니 죽음과 생일은 하나가 될 수 없지만 본질적으로는 죽음과 생일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본질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본질은 논리를 뛰어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본질은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본질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인간의 몸을 지니신 사람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땅에 계시는 동안은 공간적인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으셨지만 새롭게 부활하신 주님은 더 이상 공간적인 제한을 받으시지 않으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하나님이시기에 죽음도 그분을 가두어둘 수 없었습니다. 그분이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머리로는 그런 주님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이 인간이자 동시에 하나님일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 대제사장들이 혼란에 빠진 것도 당연합니다. 메시야는 당연히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오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메시야 그분이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다윗의 후손이 될 수 있냐는 주님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는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질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인간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오실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입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어릴 적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당연히 하나님이시기에 육신의 부모가 그분 앞에 경배해야 하지만 육신적으로는 마리아를 통해서 오셨기에 육신의 부모를 섬기셨습니다. 그래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도 어머니 아들입니다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본질로서는 주님이시지만 세상적으로는 아들이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그 질서를 따라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서로를 섬겨나가는 것이요 그래서 주님께서도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섬기는 것이 곧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질서를 따라서 하나님을 섬기며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섬겨나가는 귀한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는 세상의 명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여야 합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합니다. 할 수 있으면 문안도 받고 높은 자리에도 않고 윗자리에 않으며 대접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럴만한 자격도 안 되면서 그런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는데 있습니다. 아니 대접을 하고 섬기고 싶어도 뭐 대접할만하다거나 섬길만한 어떤 점이 있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박상길이라는 나이 많은 백정이 장터에 푸줏간을 차렸습니다. 양반 두 사람이 고기를 사러 왔는데 한 양반이 “여, 상길아! 고기 한 근 다오.” 하자, 박상길은 “그러지요” 하며 솜씨 좋게 칼로 고기를 베어 주었습니다. 
함께 온 다른 양반은 상대가 비록 천한 백정의 신분이기는 하지만 나이 든 사람에게 말을 함부로 하기가 거북했습니다. 그래서 “박서방, 여기 고기 한 근 주시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박상길은 기분 좋게 대답하고는 먼저 고기를 산 양반보다 갑절이나 더 베어 주었습니다. 그 양반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며 따졌습니다.

“이놈아, 같은 한 근인데 어째서 이 사람 것은 크고 내 것은 작으냐?” 그러자 박상길은 “네, 그야 손님 고기는 상길이가 자른 것이고요, 이 어른 고기는 박서방이 잘랐으니까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거든 먼저 대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대접할만한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쉽습니다. 대접할만한 사람을 대접하지 않으면 그건 욕이 됩니다. 상대방에게도 욕이 되고 대접하지 않는 나에게도 욕이 됩니다. 

하지만 전혀 대접할만한 그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을 대접하며 섬기는 것, 요즘 말로 봉사한다고 하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섬김은 더 큰 감사를 우리에게 가져다줍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돌아보면서 보잘 것 없이 생각되던 나 자신에 대해 감사를 배우게 됩니다. 몸으로 돕든 물질로 섬기든 아니면 말벗되어 그분을 섬겨주던 간에 내가 그분을 섬길 수 있을만하다는 그 자체로도 너무나 감사합니다. 저분에 비하면 나는 백 배 천 배 낫지 않습니까? 

자리에 누워 꿈쩍도 못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내가 비록 건강하지 못하다고는 해도 그래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 않습니까? 아픔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식물인간도 있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얼마나 감사합니까? 비록 소호를 잘 시키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도 무언가를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지만 대접을 받으려고만 하는 사람에게는 이런 감사가 없습니다. 그저 노여움뿐입니다. “아니 저놈이 나를 보고도 모른 척해” 그리고 씩씩 거립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해야 하느냐고 합니다. 하지만 가장 높으신 하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자리까지 오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온갖 병자들, 귀신 들린 자들, 버림 받은 자들을 섬기셨습니다. 섬김을 받아야 마땅한 그분이 오히려 섬기시는 종으로서 왕이신데 오히려 종처럼 섬기시면서 사셨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난합니다. 외식하는 자라고 합니다. 겉 다르고 속 다른 놈들이라고 비난도 퍼부어댑니다. 그런데 막상 오늘 우리가 현대의 바리새인이 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런 직분의 사람인데 어떻게 나를 무시할 수가 있냐고 하시겠습니까? 내가 이래 봐도 목산데 내가 이래 봐도 장론데 권산데 하면서 씩씩댄다면 그런 내가 바리새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왜 나를 무시하느냐고 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더한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아니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섬기고 있습니까?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섬김을 기뻐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말로는 섬긴다고 하면서도 입은 댓자나 나와 있고 계속해서 투덜투덜하면서 이러 부딪히고 저리 부딪히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섬김도 한두 번이지 어떻게 누구는 가만히 앉아만 있고 누구는 갖다 바치기만 해야 하느냐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의 현장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자와 아이 외에 만자만 오천 명이나 되었습니다. 50명씩 무리를 지어 앉게 했어도 100무리입니다. 여자와 아이까지 친다면 약 400무리입니다. 12명의 제자들이 그들에게 먹을 것을 날라다 주는 데만도 한 번에 한 무리분의 빵과 물고기를 나른다쳐도 30번 이상 왔다 갔다 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 많은 사람이 먹을 빵과 물고기를 떼어주는 일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도 결코 그냥 된 일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라고 주님 말씀하신 그대로 그렇게 온 마음과 온 힘과 목숨까지 바쳐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고통이 있었기에 고통 중의 우리들을 섬기실 수 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이 한 때는 집안의 막내로서 어찌 보면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찾아와 잔치를 벌일 때도 형들은 다 그 잔치자리에 나가면서 막내는 양을 지키게 했습니다.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잔치 자리에 나가고 싶을 것이 이 막내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시간을 다윗은 헛되이 보내지 않았습니다. 양떼를 잘 치기 위해서 악기를 다루는 법을 익혔고 물매에 돌을 감아 던지는 법을 익혔습니다. 그랬더니 사울이 악귀 들릴 때 옆에서 수금을 타서 저를 돕는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고 골리앗을 물리칠 수도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재능이 아닌 하나님과 함께 하는 법을 그가 배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잠시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사울에게 쫓겨 도망을 칠 때 그는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가 거짓말을 해서 먹을 것을 구하고 골리앗의 칼을 얻어가지고 나옵니다. 그리고는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다가 죽을 뻔합니다. 겨우 미친 사람 행세를 해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움을 겪고 난 다음 400명의 사람들이 다윗에게로 몰려왔는데 그들은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 빚을 진 사람 그리고 마음에 억울함을 가진 사람들이었다고 했습니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압니다. 섬김이 귀한 이유는 섬김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파하는 사람들을 마음으로부터 섬기다보면 그 아픔이 절절히 마음에 전해집니다. 그래서 중보도 하게 되고 더 감사도 하게 되는 것이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함께 울고 웃는 그것이야말로 섬기는 자의 누리는 복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가진 자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섬김 받는 자들을 너무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게 있는 곤고함으로 인해서 감사하십시오. 감사하는 가운데 더 섬기는 자가 되십시오. 바로 그 심령 가운데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함께 하시면 주님의 모든 은혜와 영광이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것이요 헛손질만 하던 일도 한 번 던지 그물에 가득 물고기가 잡히듯 이렇게 채워가시는 역사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대접을 받기 보다는 대접하기에 힘쓰시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목사와 이발사가 시카고의 빈민거리를 나란히 걷게 되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그 주변은 몹시 지저분하여 악취마저 풍기고 있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계시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 세상에 어찌 저렇게 처참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신단 말입니까?”라고 회의론자인 이발사가 말했습니다. 그때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너덜거리는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지나가는 것을 본 목사는 “저 친구를 보십니까? 

저 친구는 수염도 깎지 않고 머리는 어찌나 긴지 어깨를 완전히 덮어버렸군요. 어찌 당신같이 훌륭한 이발사가 젊은이들이 저렇게 이발도 하지 않고 거리를 활보하도록 내버려두십니까?”라고 이발사에게 물었습니다. 이발사는 “그야 저 친구가 이발해달라고 이발소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죠. 이발해 달라고 들어오기만 한다면야 아주 미남자를 만들어줄 텐데 말입니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는 조용히 입을 열어 “하나님께서도 당신과 마찬가지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나아와 하나님께 기회를 드린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으실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인간은 타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더러운 죄악 중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훌훌 털고 주께로 나오려는 용기를 가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물에 빠져 사람 살리라고 버둥대며 몸부림치는 사람처럼 스스로는 나오고 싶어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밭에 콩도 심지 않은 채 콩이 나지 않는다고 하지 말고, 콩부터 심어야 하나님께서 싹트게 하시고 길러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동안 수영도 좀 배우고 하지 뭐하고 있었느냐고 하지 말고 먼저 그 사람을 살려부터 놓고 나서 헤엄치는 법을 가르치든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백날 그래보아야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랬다고 포기하지 마십시오. 한 번 더 해 보십시오.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처럼 그렇게 우리도 해 보십시오. 절망은 포기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모든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에라도 중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보세요. 제자들이 빵과 물고기를 나눠줄 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럼 자기들부터 먹고 나서 나누어주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들부터 먹고서 저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오병이어를 가져온 아이는 어떨까요? 그 아이부터 주었을까요? 어찌되었든 빵과 물고기로 모두가 배불리 먹고 난 다음 남은 빵과 물고기를 거두었더니 큰 광주리로 열두 개나 되었습니다. 결국 모든 제자들마다 큰 광주리로 하나씩의 빵과 물고기가 생겼습니다. 이것이 수고한 자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수고가 먼저 있어야 되었고 그들의 바구니를 먼저 비워야 했습니다. 비웠더니 채워집니다. 나누어주었더니 가득해집니다. 이게 섬기는 자의 복입니다. 섬기면 물론 힘도 듭니다. 돈도 들어갑니다. 

시간도 들고요 그런데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흐뭇함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결코 주저앉아 있을 수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손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열두 광주리나 거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라고 하십니다. 많이들 지쳤을 텐데 힘도 많이 들었을 텐데 이제는 좀 쉬도록 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순종하여 떠난 길인데 풍랑이 있습니다. 

그토록 수고한 그들 앞에 그토록 순종하여 길을 떠난 길인데 왜 그런 호된 어려움이 있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그랬더니 주님이 물 위로 걸어 그들에게 새벽같이 찾아오시지 않습니까? 결국은 그래서 깨닫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수고에는 항상 우리가 시험에 들 만한 어려움도 따른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지만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결과는 승리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호수에서 풍랑 중에 있는 제자들을 지켜보셨던 주님이 지금도 저와 우리 모두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과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항상 섬기고 또 섬기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그리고 본질적으로 모든 일은 주님이 나를 통해서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 날마다 주와 함께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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