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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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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눅 10:25~37)


오늘 봉독한 본문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10: 38-42절은 “마르다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봉사의 일로 분주했던 마르다는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편안하게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는 마리아가 얄미웠던지 예수님에게 불평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를 꾸짖어 마르다를 도와주라고 말씀하시기는커녕 오히려 마리아의 편을 들어주시는 듯한 내용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이야기를 감싸면서 앞뒤에 나오는 이야기는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이야기 앞에 나오는 본문 10: 21-24절은 “예수님의 감사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전도 파송을 받아 나갔던 칠십 인 전도대가 돌아와 주의 이름으로 사탄의 권세를 제압한 이야기를 예수님께 보고 드리자,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시면서 이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 천지의 주재가 되시는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편,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뒤따라 나오는 11:1-13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짧은 형태의 “주기도문”과 밤늦게 찾아온 친구가 그의 강청함을 인하여 원하는 바를 이루었던 것처럼,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선물을 받아야 할 것을 교훈하는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경봉독 시간에는, 시간관계상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관한 부분만 읽었지만, 이 시간에는 지금 말씀 드린 네 본문의 내용과 구조에 주의하면서, 이 네 이야기를 함께 묶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10:25-37절에 나오는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 찾아온 어떤 율법 교사의 질문과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율법 교사가 던진 첫 번째 질문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25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질문하는 율법 교사에게 즉답을 주시는 대신 역 질문을 던지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그러자 율법 교사가 다시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와 같이 대답한 율법 교사에게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렇게 율법 교사와 예수님 사이의 첫 번째 대화가 끝이 납니다. 
흔히 우리는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를 읽을 때에, 이 도입 부분을 너무 빨리 지나쳐 곧 바로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 인에 대한 비유 자체로 넘어가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첫 번째 대화 부분을 좀 더 주의 깊게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율법 교사와 예수님 사이의 이 첫 번째 대화를 어떻게 읽고 이해하십니까? 

예수님께 찾아와 영생에 대한 질문을 던진 율법 교사는 율법 교사라는 자신의 지위에 걸맞게 율법의 핵심을 정확히 요약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만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율법 교사의 대답에 따르면, 율법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율법 교사의 대답 속에 담긴 율법의 핵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오늘 우리 한국 교회와 우리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자칫 우리는 하나님 사랑을 강조하면서 이웃 사랑을 외면하고, 때로는 이웃 사랑만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 사랑의 중요성을 놓쳐 버리는 우를 범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함께 가야 할 두 개의 톱니바퀴와 같습니다. 진실한 하나님 사랑에는 이웃 사랑이 따라오게 되어 있고, 진실한 이웃 사랑에는 하나님 사랑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이 둘 사이에서 바보 같은 좌충우돌을 반복하곤 합니다. 
예수님과 율법 교사 사이의 첫 번째 대화에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와 마르다와 마리아 이야기는 지금 우리가 함께 살펴본 예수님과 율법 교사 사이의 대화에서 확인한 율법의 핵심,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서 우리가 범할 수 있는 한 가지 잘못을 깨우쳐 주시면서, 어떻게 해야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 있게 실천할 수 있는가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는 "이웃 사랑"의 실천을 강조하는 예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도 만나 거의 죽어가던 한 사람을 매정하게 지나쳐 버린 제사장이나 레위인과는 달리,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사용해 가며 최선을 다해 강도 만난 자를 도왔던 선한 사마리아 인의 예를 통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교훈해 주고 계십니다. 
먼저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살펴보면, 강도 만난 사람, 제사장, 레위인, 선한 사마리아 인이 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성전에서 하나님을 전문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사랑과 예배를 이끌어가는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제사장과 레위인이 선한 사마리아 인에 대조되는 인물들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종교적으로 볼 때나 사회적으로 볼 때 그 당시 가장 존경 받아야 할 지도급 인사에 해당하고, 사마리아인은 가장 멸시 받는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이 두 계층의 사람을 동열에 놓고 비교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은 당시 독자들에게는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비유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굉장히 매정하고 몹쓸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 구약 율법에 나오는 성결법에 의하면, 이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변명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레위기 21:1절에 의하면, 제사장은 “그의 백성 중에서 죽은 자를 만짐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더럽히지 말라”고 되어 있으며, 21:11절에 의하면 “어떤 시체에든지 가까이 하지 말지니” 심지어 부모로 말미암아서도 더러워지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눅10:30절에 의하면, 강도 만난 자는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버려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돕다가 자신들이 부정하게 되어, 자신들의 직무, 곧 하나님 예배하는 일을 수종들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성전에서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자신들을 정결하게 유지하도록 율법이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이런 이유로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 강도 만난 자를 그냥 지나쳤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은 비유에서 묘사된 제사장과 레위인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통해 볼 때, 암시적으로 예수님의 비난을 받고 있는 듯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가 범할 수 있는 잘못에 대한 하나의 중요한 경고를 듣게 됩니다. 즉,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핑계로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복음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부모님 섬기기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린바 되었다고 하면서 부모님 공양하기를 회피하는 자를 주님께서는 꾸짖으신 적이 있지 않습니까? (막7:11)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혹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웃 사랑의 계명을 소홀히 한 적은 있지 않은지 우리 자신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정당한 교의나 논리보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비난 받았던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율법 준수에 투철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 준수를 위해서라면 때로는 목숨까지도 내 놓을 각오를 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마카비 전쟁 때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적군이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안식일을 택하여 공격을 해 온 적이 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 중 일부는 안식일 규정을 범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방어하는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버리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율법에 대한 이 열심이 하나님의 본심을 헤아리지 못하고 형식주의로 왜곡되었을 때에, 그들은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의 행동이 부정적으로 그려진 이유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형식에 매여 참된 하나님 사랑의 실천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이웃 사랑을 외면하며 소홀히 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암시적 비난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이어지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를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피해야 할 정 반대되는 함정을 보여줍니다. 
40절에서 마르다는 열심히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종종 마르다를 마리아에 비해서 너무나 부정적인 인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38절에 보면, 마르다는 예수님을 자기의 집으로 영접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편안히 모시기 위하여 여러 가지 일로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애썼던 사람입니다. 40절의 준비하는 일이 많았다고 번역된 부분은 “봉사하는 일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마르다는 주변 사람들을, 즉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봉사하는 일에 힘썼던 여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르다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열심히 말씀을 경청하고 있었던 마리아에 대해 불평을 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열심히 봉사하느라 분주한 데 마리아는 한가로이 편하게 주님의 말씀만 듣고 있는 것 같아 속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불평을 토로합니다. 40절 후반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마르다가)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두둔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종종 이 주님의 말씀이 마리아를 인정하시고, 마르다를 부정하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마리아를 인정하시면서 마르다를 부정하셨다고 보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은 마르다도 인정하시면서 동시에 마리아를 인정하셨다고 보아야 옳은 것 같습니다. 마르다라는 인물에게서 부정된 것은 그녀의 봉사, 이웃 사랑의 섬김이 아니라, 마리아에 대한 불평인 것입니다. 자칫 사회봉사와 이웃 사랑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기도하고 말씀보고 예배하는 일에 치중하는 사람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우를 봅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입니다. 예배하고 경건의 훈련에 힘쓰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39절에서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라고 기록된 부분은 마르다의 ‘이웃 사랑’ 실천에 짝을 이루는 마리아의 ‘하나님 사랑’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기서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심으로써, 마르다의 이웃 사랑도 중요하지만, 마리아의 모습 속에 드러난 하나님 사랑의 마음도 소중히 보신다는 것을 깨우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과 율법 교사의 대화에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중요한 두 가지 덕목이 제시됩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어지는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는 이웃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사랑의 핑계로 이웃 사랑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엄중히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서는 하나님 사랑이 강조됩니다. 이웃 사랑에만 치우쳐 하나님 사랑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을 균형 있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 중의 하나는 이 둘의 적절한 긴장과 균형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축을 함께 붙잡고 씨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새문안교회는 지금까지 이 둘을 균형 있게 실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지속함과 동시에, 이 둘을 균형 있게 실천하는 노력에 더욱 박차를 가해야하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국의 모든 교회들이 한국의 어머니 교회인 새문안교회야말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가장 균형 있게 실천하는 본이 되는 교회라고 인정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축을 함께 균형 있게 실천해 갈 수 있을까요? 대 원칙을 말씀 드리자면, 그것은 기도와 성령을 통해 능력을 덧입음으로써 가능하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제가 오늘 말씀을 10:21-2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감사기도”와 11:1-13절에 나오는 “짧은 주기도문”과 “끈질기게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한 비유” 말씀과 함께 묶어 이해해 보고자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게 할 때 본문의 독특한 구조적 특성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보시면, 10:21-24의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성령에 충만하여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 내용입니다. 21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라고 되어 있는데, "이르시되" 라고 기록된 부분은 헬라어로는 "고백의 기도를 드리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칠십인 전도대의 보고를 접하신 후 성령으로 충만하여 기쁨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신 것입니다. 
한편,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이어지는 11:1-13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를 가르치신 내용과 밤에 찾아온 친구의 예화를 통해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에 대해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이 단락을 끝맺고 있는 11:13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즉,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기도와 성령에 대한 강조로 이 단락이 끝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본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와 마르다/마리아 이야기를 앞뒤로 감싸고 있는 두 단락이 모두 “기도와 성령”에 대한 강조를 담고 있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와 성령 충만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 있게 실천함으로써 영생에 도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것은 누가복음이 기도와 성령을 강조한다는 특징을 이해할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의 공생애는 예수님의 세례 받으시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시점에서 끝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복음은 예수님의 세례 장면의 보도에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독특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장 2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세례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이 기도와 성령 충만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누가복음 23:46절은 공생애 마지막 순간에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말씀은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부탁드린 예수님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이 기도로 끝난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과 마지막이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난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도행전은 누가 복음의 속편에 해당합니다. 사도행전 1장 1-2절에서 누가는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고 적고 있는데, 여기서 먼저 쓴 글은 누가 복음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사도행전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성령 행전입니다. 성령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고 교회를 세우시고 확장해 가신 역사의 기록이 사도행전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역시 기도를 강조합니다. 

1장을 보시면, 예수님의 승천 후 120문도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기도할 때에 성령이 임했던 것으로 사도행전은 전하고 있습니다. 3장을 보시면, 베드로와 요한이 제 구시 “기도” 시간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길에 성전 미문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보도합니다. 10장에 나오는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는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환상을 보고 베드로를 초청하여 하나님의 복음을 듣고 온 집안이 구원 받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장에서 빌립보 옥중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하나님께 찬송하고 기도할 때에(16:25) 옥문이 열리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기도와 성령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선한 사마리아 인의 이야기와 마리아 마르다 이야기를 둘러싸고 있는 앞 뒤 두 단락이 특별히 기도와 성령을 강조하는 말씀들이라는 것은 의미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면, 기도와 성령의 능력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전히 실천하게 될 때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는 메시지를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작년 2월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제가 지난6-7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고 사역하면서 한 가지 가지게 된 생각은 미국 교회와 신학이 사회 정의, 평등, 봉사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인 반면, 기도하고 성경 보는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주일 학교도 보면 우리나라처럼 그렇게 성경 교육에 강조를 두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남 도와주고 봉사하는 일에 상당히 적극적인 것을 보았습니다. 기부도 상당히 잘 하는 편입니다. 

반면에 우리 한국 교회는 보면, 상대적으로 기도하고 성경보고 예배하는 일에 열심이지만, 사회봉사나 이웃 사랑의 실천에 약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말씀 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사회봉사 이웃 사랑의 실천에도 더욱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균형 있게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과 성령의 위로 교통하시는 은혜가 오늘 이 자리에 모여 함께 예배하며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기로 다짐하며 돌아가는 사랑하는 주의 백성들 머리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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