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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베드로가 가룟 유다와 다른 이유 (눅 22:4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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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가룟 유다와 다른 이유 (눅 22:47~62) 
  

지금은 사순절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말씀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체포되고 재판받으시는 과정에서 나타난 베드로의 모습에 초점을 맞춰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애매하게 체포당하시고 불법재판을 받으실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쳤습니다. 그 중에 가장 심하게 배신한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누구죠? 베드로와 가룟 유다입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인생이 마치 하늘과 땅처럼 달라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이며 초대기독교회의 지도자로 역사에 길이 빛나는 인생이 됐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베드로보다 가룟 유다가 훨씬 더 똑똑하고 잘난 사람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의 어부 출신으로 불학무식한 사람이었죠. 그러나 가룟 유다는 제법 유식한 사람입니다. 12제자 중에서 가장 똑똑했는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제자들 그룹의 재정을 맡아보는 회계였거든요. 어느 모임이든 계산이 빠르고 똑똑한 사람들이 회계를 맡지 않습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비슷한 잘못을 하고도 화려하게 재기했는데, 가룟 유다는 영영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그 차이가 과연 무엇일까요? 베드로가 가룟 유다와 다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회개를 하고 안 하고 차이입니다. 비슷한 죄를 지었지만, 한 사람은 회개한 후 변화된 인생을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끝끝내 회개하지 않고 양심의 가책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얼마나 불쌍하고 한심한 인생인지 모릅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조차 그를 가리켜 “차라리 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 말씀하셨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수시로 범죄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수도 없이 하나님을 섭섭하게 해드리고,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합니다. 그러나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주십니다. 물론 진심어린 회개를 해야 되겠죠. 만일 형식적인 회개만 하면서 고의로 짓는 고범죄(故犯罪)를 반복하면 용서받을 수도 없고,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될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사순절은 십자가 앞에 나아가 자신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는 절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 갱신의 절기입니다. 이 시간 베드로가 큰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과정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도 이 사순절에 자신을 돌이켜 회개함으로 큰 변화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1] 베드로의 실패 : 예수님을 세 번이나 배신

① 가룟 유다의 배신 :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죄를 범했습니다. 그가 대제사장들을 찾아가 흥정하는 장면이 마26:15~16에 나옵니다. “15 내가 예수를 너희에게 넘겨주리니 얼마나 주려느냐 하니 그들이 은 삼십을 달아 주거늘 16 그가 그 때부터 예수를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가룟 유다는 회계를 맡아 일하면서 평소에도 슬쩍슬쩍 돈을 훔치는 도둑이었습니다. 세속적인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별 소득이 없자 차라리 몇 푼 받고 넘겨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눈엣가시로 여기던 종교지도자들을 찾아가 흥정하게 된 겁니다. 결국 은 30에 낙찰됐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은 30은 노예 한 사람의 값에 해당한다는 사실입니다.(출21:32 참조) 

예수님은 이 사실을 훤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가 돌이킬 것을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는 여러 번 힌트를 주면서 회개를 유도했지만 결국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요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예수님이 준 빵 조각을 받은 후 은혜를 원수로 갚듯이 뛰쳐나간 겁니다. 멸망을 향해 달려간 겁니다. “ ... 밤이러라” 이 말은 실제 밤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멸망 길을 가는 그의 불쌍한 영혼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가룟 유다는 그 길로 가서 체포대를 데리고 옵니다. 기가 막힌 것은 체포대에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기 위해 암호를 짜갖고 오는데 뭐죠? 입맞춤입니다. 48절 보세요.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하시니”(마26:48~50 참조) 제자들과 예수님이 함께 있으니까 누가누군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암호를 키스로 정한 겁니다. 그는 능청스럽게 인사를 하고 입을 맞춥니다. 그러자 체포대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붙잡습니다. ‘유다의 키스’(Judas Kiss 야비한 배신행위)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유래한 것입니다. 

② 베드로의 배신 :

그 때 베드로는 어떻게 했나요? 혈기를 부리며 칼을 휘두릅니다. 50절. “그 중의 한 사람(cf. 요18:10 베드로)이 대제사장의 종을 쳐 그 오른쪽 귀를 떨어뜨린지라” 대제사장의 종은 ‘말고’라는 사람입니다. 그의 오른쪽 귀를 베어버립니다. 이 때 그 경황 중에도 예수님은 베드로를 제지시키며 귀를 붙여줍니다.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겁니다. 체포대가 예수님을 연행하자 제자들은 혼비백산하여 다 도망갑니다. 그나마 베드로가 제일 나은 편인지도 모릅니다. 54절. “예수를 잡아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집까지 재판 과정을 지켜봅니다. 물론 겁을 먹고 멀찍이 따라갑니다. 이미 실패가 시작된 것이죠.

심문이 진행되는 동안, 베드로는 마당에서 불을 쬐며 기다립니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베드로를 살피며 묻습니다. “너 예수와 한 편이지?” 베드로는 극구 부인합니다. “아니, 난 저 사람 몰라.” 이렇게 세 번씩이나 부인합니다. 

60절 보세요.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다른 복음서를 보면, 세 번째는 심지어 예수님을 저주하면서 부인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로 그때 새벽닭이 웁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예언하신 대로 된 겁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배반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조심하라는 뜻도 있고, 나중에 배반하더라도 회개하고 다시 돌아오라고 당부한 겁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귀담아 듣지 않고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였습니다. 

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는 다른 제자들을 무시해 가면서 큰 소리를 쳤습니다. 여기서 ‘나는’이란 말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원어로 ‘에고’(ejgw;)입니다. 여기서 영어 단어 ‘ego’가 나왔죠. 헬라어 문법을 보면 아주 특이합니다. 동사 단어 자체에 인칭 표시가 포함되어 있어서 굳이 인칭대명사 주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강조할 때는 넣어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에고’(ejgw;)는 굳이 안 써도 되는데, 강조를 위해 넣어준 겁니다. 그만큼 베드로가 자신만만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작심삼일(作心三日)도 아니고 ‘작심 3시간’이 된 꼴입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게 인간입니다.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실수할 수도 있고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연약한 죄인입니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도 육신의 본능과 죄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항상 조심하고 겸손하라는 겁니다. 자기 과신은 금물입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깨어 기도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셨습니다. 그 동안 제자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 잤습니다.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눅22:45~46 “45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46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몇 번이나 깨우며 호소했지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시험에 넘어졌고,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베드로나 가룟 유다나 비슷비슷합니다. 속된 말로 그 놈이 그 놈입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그들의 인생을 완전히 갈라놓았습니까? 회개의 유무라고 했죠.

베드로는 통곡하며 회개합니다. 


[2] 베드로의 회개 : 예수님의 시선과 닭 울음소리에 통곡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기본적이며 중요한 게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는 ‘구원과 은혜의 관문(gateway)’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회개를 통과하지 않으면 믿을 수도 없고,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을 수도 없습니다.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 회개의 기도가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아예 ‘기도의 문’이가 열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다 때로는 답답할 때가 있죠. 먼저 회개하면 기도의 문이 열리게 됩니다. 마치 봇물이 터지는 것과 같습니다. 댐의 수문을 열면 물이 쏴~ 하고 쏟아지듯 은혜가 임하게 됩니다. 

회개(悔改 Repentance)라는 말을 좀 더 정확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va)인데, ‘돌다’ ‘방향을 바꾸다’(turn)라는 동사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turn from sin to God) 즉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유턴(U-Turn)하는 것이죠. 

① 가룟 유다의 후회 :

사람이 죄인이라도 양심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죄를 지으면 괴롭습니다. 뉘우치고 후회합니다. 가룟 유다도 그랬죠. 그러나 이건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유감(regret)을 느낄 뿐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범죄자들이 붙잡히면 대개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죄를 후회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게 곧 회개는 아니라는 겁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마27:3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나요?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 ” 예수님이 애매하게 불법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자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로 예수님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게 가룟 유다의 한계입니다. 

② 베드로의 회개 :

반면에 베드로를 어떻게 합니까? 그는 진정으로 회개합니다. 61절~62절 봅니다.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그가 세 번째 부인하는 순간 예수님께서 돌아보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이 베드로와 마주쳤습니다. 그 시선은 책망보다는 용서와 사랑의 시선이었습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뭐라 하더냐? 하지만 괜찮다. 돌아오너라. 그리고 내 대신 복음을 전해라!” 

진정한 회개는 잠시 마음속으로 후회하는 게 아닙니다. 입술로만 잘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전 인격적으로 변화되는 겁니다. 인격의 3요소인 지정의(知情意)가 다 변화되는 겁니다. 베드로는 진정으로 죄를 깨닫고(知), 후회할 뿐 아니라(情) 행동으로 변화됐습니다.(意) 전승에 의하면 그는 그 날 온 종일 예수님을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뵙기 민망하기도 하고 한편 두렵기도 해서 십자가 행렬에 바짝 붙어 가지는 못했겠지만 어쨌든 계속 울며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베드로를 살린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회개하는 것조차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회개한 것 같지만, 그 이전에 예수님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눅22:31~32 “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이 기도의 결과 베드로는 회개했고 변화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닭 울음소리를 들을 때 순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베드로는 생각했을 겁니다. “아차, 예수님이 그러셨지. 정말 그대로 됐네. 아, 어쩌나!”하며 통곡한 겁니다. 말씀은 이렇게 강력합니다. 

렘23:29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바위를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불같이 마음을 녹입니다. 방망이처럼 강퍅한 마음을 깨뜨립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묵상하라고 당부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3] 베드로의 재기 : 예수님의 수제자,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지도자, 순교자 

베드로는 이렇게 회개함으로 재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명실상부한 수제자가 됩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지도자가 됩니다. 마지막에는 복음을 증거하다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앞에 진정한 믿음의 영웅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① 가룟 유다의 멸망 :

베드로와 달리 가룟 유다는 회개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단순히 후회했을 뿐입니다. 대제사장에서 가서 무르려 했지만 거절당합니다. 은 30을 성전의 헌금함에 던져버리고 자살해 죽고 말았습니다. 마27:5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가룟 유다는 비참하게 배창자가 터져 죽습니다.(행1:18~19 참조) 그 후 대제사장이 그 돈을 도로 꺼내다가 밭을 사서 가룟 유다를 묻고 객사한 사람들의 묘지를 삼습니다. 그래서 그 묘지의 이름을 ‘피밭’(Field of Blood) 즉 ‘아겔다마’(Akeldama)라 불렀습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개인이든 민족이든 죄를 지어서 멸망하는 게 아닙니다. 그렇다면 모두가 멸망해야죠. 엄밀하게 말하면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회개하지 않아서 예수 십자가 은혜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해서 멸망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면 별수 없는 겁니다.

사울과 다윗을 비교해 보세요. 사울은 멸망하고 다윗은 성군이 된 이유가 뭡니까? 인간적인 차이가 아닙니다. 어쩐 관점에서는 사울이 다윗보다 더 나은 점이 많아요. 그들의 운명이 완전히 달라진 것은 무엇보다 회개를 하고 안 하고 차이입니다. 

또 소돔 고모라(창세기 19장)와 니느웨(요나 3장)를 비교해 보세요. 뭐가 다르죠? 죄가 관영한 것은 둘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회개하고 안 하고, 이게 달라요. 하나님은 최후의 통첩을 하고 회개를 촉구하셨지만, 소돔 사람들은 무시하다 멸망했고 니느웨 사람들은 철저히 회개함으로 심판을 모면한 겁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동일한 햇볕이 쪼여도 양초와 진흙이 달라요. 하나는 부드럽게 되는데, 다른 하나는 말라서 터집니다. 

② 베드로의 재기 :  

베드로가 멋지게 재기하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베드로에게 나타나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세 번씩 부인한 것을 용서하시고 격려해 주시려고 그런 겁니다. 또한 사명을 재확인 시켜주신 겁니다. 요20: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 내 양을 먹이라” 

그 후 오순절 성령강림 시 성령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어떻게 변화됩니까? 핍박을 감수하며 복음을 담대히 전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행2:41 “그(베드로의)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하루에 3천 명이 예수 믿고 세례를 받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초대 예루살렘교회가 시작된 겁니다.   

미국의 제22대와 제24대 대통령을 지낸 클리블랜드(Stephen G. Cleveland 1837∼1908)의 유명한 간증입니다. 그는 청소년 시절 방탕과 방황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날마다 나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나 마시고 다녔습니다. 어느 날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2차를 가던 중 어느 교회 앞을 지나가게 됩니다. 교회 벽면에 붙어 있는 성경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부흥회 포스터도 붙어 있었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찔렸고, 친구들을 뿌리차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날 밤 말씀을 들으며 크게 회개합니다. 새사람이 됩니다. 그로부터 30년 후 22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됩니다. 한 사형수가 감옥에서 신문을 봅니다. 그리고 깜짝 놀라 탄식합니다. “아, 클리블랜드! 내 친구인데 ... ” 회개를 하느냐 안 하느냐가 이렇게 극명한 차이를 낳은 겁니다.   

여러분, 나라와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일본인과 독일인을 비교해 봅니다. 일본인은 주변국에서 요구하면 겨우 유감 표시만 하고 아직도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강제징용 갔던 분들에게 연금정산이라며 99엔 지급한 것 때문에 많은 분들이 분노했습니다. 그런 처사가 어디 있습니까? 반면 독인인은 진심으로 회개했습니다. 피해자들을 찾아 일일이 사과하고 모두 보상해줬습니다. 심지어 추모관까지 세웠습니다. 수년 번에도 베를린에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 기념관을 세웠죠. 이게 바로 국격(國格)입니다. 

요즘 국격이란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개인이든 민족이든 돈좀 벌어 부자가 됐다고 격이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정말 하나님 앞에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고 고상하게 변화된 인격을 갖춰야 격이 높은 겁니다. 우리나라와 민족도 진정한 의미에서 년기 높아지면 좋겠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 ‘어글리 코리안’(Ugly Korean)이 아니라 ‘노우블 코리안’(Noble Korean)이란 말을 들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이 일을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회개하고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러분!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지금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말씀 앞에 나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많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회개하고 새 사람으로 변화됨으로 정말 복되고 존귀한 인생이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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