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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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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신 33:24~29)


독일의 대왕이었던 '프리드리히'가 하루는 사복을 입고 공원을 거닐면서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어떤 노인이 가슴을 쭉 펴고 천천히 위엄 있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대왕은 그 늠름함에 이끌려 그에게 다가가서 '당신은 누구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나는 왕자요' 큰 소리를 칩니다. 깜짝 놀란 대왕은 '어느 나라 왕자냐'고 다시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하늘나라의 왕자요' 라고 하면서 당당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사람은 모두 왕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늘나라에 왕자임을 믿습니까? 
 
신33장은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의 12지파에게 축복하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33:1절을 보면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함이 이러하니라' 그러니까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12지파를 한 지파씩 축복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언적인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서도 마지막 지파인 아셀 지파와 여수룬에 대한 모세의 최후의 축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셀은 '기쁨'이란 뜻으로 야곱의 처 레아의 종 실바의 소생으로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모세는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입니다.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의 귀한 일군으로 부름 받아 충성한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죽기 전에 비스가 산에 오르기 전, 모압 평지에서 성령에 감동을 받아 백성들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26-28절까지는 여수룬에게 축복하고 있고, 29절은 총 결론 편으로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29절은 우리 참 행복한 교회의 주제 성구입니다.   
  
이제 드디어 가나안 땅이 눈앞에 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그가 묻힐 비스가 산에 오르기 전에 성령에 감동되어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축복하고 있는 장면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지금 모세가 축복하고 있는 현실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습니다. 광야 생활입니다.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요단강이며 가나안 땅입니다. 그리고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정복해야할 가나안의 원주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의 축복의 결론은 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이스라엘은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성도들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본문은 '모세의 고백이며 희망이며 동시에 예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마지막 유언 중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하여 '당신은 행복하십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던 그 배경과 이유를 살펴보면서 우리 '참 행복한 교회' 성도들이 왜 우리가 '행복한가?' 그 이유를 발견해 보고자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때 그 백성이 오늘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믿/

 
1. 모세는 하나님이 부어주신 능력과 축복을 바라보며 '행복한 자'라고 말합니다. 

25절 "네 문빗장은 철과 놋이 될 것이니 네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28절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모세는 인간의 유한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하루도 빠짐없이 그 날 그 날을 도와 주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서 비록 자신은 떠나지만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축복은 변함 없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당신들은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모세는 그 몇 가지의 구체적인 축복의 실례로 아셀을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셀 지파가 받은 축복은 무엇인가?(24-25) 
  
①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았습니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한마디로 아들, 딸을 많이 낳았다는 것입니다. 생산의 복이요, 번성의 복입니다. 
  
지금은 무자식 상팔자니, 혹 하나만 낳아서 잘 기르자는 등 적게 낳기 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우리 때만해도 자식 많은 것은 큰 복 이고 능력이었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자녀들을 키우며 경험한 눈물겨운 행복을 기억하십니까? 자녀들이 부모에게 제공한 순결한 웃음과 티 없는 기쁨과 자랑스러운 보람을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시127:3절에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고 하셨고, 또 시128:3절에서는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할/ 자녀는 하나님의 기업이며 상급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친 광야를 여행하는 동안 어린아이들의 존재가 그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힘과 격려를 주고, 희망과 소망을 주었는지 모를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를 통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더 실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기를 수 있는 자녀가 있는 한 인생을 결코 공허한 것만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들 가운데 자녀가 없다면 그렇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음의 자녀를 우리는 키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삶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바울에게는 '내 아들아'라고 부를 수 있는 디모데와 디도와 오네시모 같은 영적은 자녀들을 도처에 두고 있었습니다. 
  
살전2:7-8절에서 바울은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자녀들에게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자녀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다자한 아셀 지파에게 '행복한 자'라고 축복한 것입니다. 이 축복이 오늘 우리들에 것입니다. /할/

②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습니다.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서로 서로 아끼고, 돌보고, 사랑하며 형제들이 화목을 이루고 산다는 것이 행복이고,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성경에 보면 형제간에 우애가 없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죽인 일이 있었고, 에서와 야곱은 서로 의가 좋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한 공동체가 된 우리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요일4:20절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롬12:10절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시133:1절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자식들이 우애하고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봅시다!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행복도 기쁨도 주고받을 때 기쁩니다. 여러분! 남에게 참 된 기쁨을 선물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주님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사랑할 때 기쁨이 옵니다. 사랑하는 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된 빌립보 교인들에게 '너희 믿음의 친구와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이야 말로 다른 형제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③지상의 풍요의 복입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 지로다' 창49:20절에서 보면 야곱도 아셀 지파를 축복하기를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아셀 지파의 땅이 비옥한 옥토임을 의미합니다. 
  
당시 부의 상징인 감람유를 생산하는 감람나무가 울창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름은 그 생활의 윤택함을 의미합니다. 옛날의 기름은 화폐 대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화폐가 통용되지 않을 때 기름은 가장 귀한 화폐가치를 대신했습니다. 
  
왕하4:1-7절에 보면 엘리사의 제자인 선지 생이 죽자 그 아내가 과부가 되었는데 빚쟁이들이 두 아들을 빚 값으로 빼앗아 가려고 합니다. 그때 엘리사가 빈 병에 기름이 차고 넘치는 기적을 행하여서 이것을 팔아 빚을 갚고 나머지는 생활하라고 했습니다. 
  
'그 발이 기름에 잠길 지로다' 또 다른 영적 의미는, 구약 이스라엘의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들은 기름을 머리에 부어 세우게 됩니다. 이 기름이 조금 많으면 발까지 흘려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일군 되는 의식입니다. 아셀 지파에서 하나님의 일꾼들이 많이 나올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의 사명 따라 헌신하며 충성하며 사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종들을 '기름 부은 종'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주시고 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름을 부어 세우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세상 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행복한 역사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너무 많은 고난과 너무 많은 갈등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직면하여 역사를 꾸며 왔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독특한 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소명의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자부합니다. 언약의 백성임을 내세웁니다. 바로 유대인의 엘리트 의식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입니다. 우리도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책임감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여 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분명한 은사를 주었습니다. 우리도 그 은사들을 개발해야 합니다. 바울은 롬12장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충성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 하는 자면 권위 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하라'고 했습니다. 
  
은밀히 말하면 은사를 받을 때,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일할 수 있다는 그 조건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전도하는 일, 교회를 섬기는 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내 목숨과 삶을 투자할 수 있다는 사실 앞에 행복감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신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한 것입니다. 

 ④삶의 터전인 성읍을 견고하게 지켜줄 것을 약속하고 있습니다(25). 
  
"네 문빗장은 철과 옷이 될 것이라" 이게 무슨 말씀인가?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이런 의미도 됩니다. 
  
여기 문빗장이란 말은 '단단히 잠그다, 꼭 닫다, 안전하게 닫다 혹은 요새, 성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견고한 성 즉 난공불락의 요새가 될 것을 의미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문지방을 드나드는 '신발'이란 뜻으로, '순례자의 신발이요, 전투하는 신발이요, 승리하는 신발'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축복'입니다. 
시121:8절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⑤네 사는 날을 따라 능력이 있으리로다! 
  
'네 삶의 보금자리가 견고할 것이며' 위에서 이어져 오는 말씀으로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을 얻으리라'는 축복입니다. 
  
신앙의 힘을 능력입니다. 사40:28절 이하에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약함을 능력으로 보충해야 합니다. 빌4:13절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본문이 주는 영적 의미는 여기 '능력'은 '평온'이란 뜻으로 '길이 길이 태평성대를 누리어라'는 뜻입니다. 태평성대의 복, 얼마나 행복한 복입니까? 이 복이 사랑하는 참 행복한 교회 모든 성도들의 삶의 터전 위에 임하게 되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정이 있다는 것 때문에 감사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남에게 아무리 의미가 없을지라도 내게는 지상의 어떤 처소와도 바꿀 수 없는 곳이 가정입니다. 아무리 초가삼간 다 무너져 내린다 할지라도 그 안이 우리들의 보금자리요, 거처요, 안식처입니다. 
  
비바람과 눈보라와 추위를 막을 수 있는 내 집, 고독이, 허무와 슬픔의 늪에서 나를 위로하고 건져내는 아름다운 가정, 이 피난처, 이 보금자리를 주신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우리가 사는 날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능력을 입혀 주신 다니 얼마나 행복합니까? 
  
'네가 사는 날을 따라서' 여기서 주간이라 말하지 않고 달이라고도 하지 않고 년이라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주간의 일도 예측할 수 없고 한 달 후의 일도 더더구나 일 년 후의 삶을 예측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능력을 주께서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건강이 있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행복한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마6:31절 이하에 저 유명한 산상보훈 가운데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교훈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너희가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을 설계해 주신 그 하나님! 또 우리를 지켜주시는 그 하나님! 그 하나님은 우리의 에벤에셀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까지 도와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날을 밝히 인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모세는 그런 체험을 누구보다 많이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생활을 보십시오, 깜깜한 밤은 불기둥을 주십니다. 뜨거운 뙈약 빛이 내려 쬐는 모래사막 길에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덮어 주십니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때, 하늘에서 메추리 때를 주셨고, 물이 없을 때 반석에서 생수를 주셨으며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독사에 물려 죽어갈 때 모세를 통해 놋 뱀을 장대에 매달아 그것을 보게 함으로 낫게 해 주신 그 하나님을 모세는 너무도 많이 체험했습니다. 
  
이런 모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체험했던 모세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네가 사는 날 따라서 능력이 있으리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백성들이여! 당신들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늘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행복한 자들입니다. 사는 날을 따라 능력을 입고 하나님의 백성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2. 그 백성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돌보심 때문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여기서부터 모세는 여수룬을 통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그 행복자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일명 '여수룬의 행복'이라고도 합니다. 
  
▶여수룬이 누구인가? 사44:2절 "나의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 말라" 여수룬이라는 말속에 하나님의 선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수룬은 이스라엘의 별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잘나서 택한 것이 아니라 숫자가 많고 강해서 택한 것이 아니라 가장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하신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수룬'이란 말은 원문이 '예수룬'을 음역한 말인데, 70인 역에서는 이 말을 '사랑 받는 자'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델리취'라는 신학자는 이 말의 어원을 '야솨르'(옳음, 곧음)으 보고 '옳은 자, 의로운 자'로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여수룬을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의로운 자가 된 이스라엘'을 의미하며, 오늘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즉 저와 여러분들을 의미합니다. /할/ 
  여수룬, 곧 이스라엘, 다시 말하면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행복이 무엇인가? 
  
여기에 사용된 행복의 단어는 '아쉬레'로 '충만한 행복, 완전한 행복'을 의미합니다. 그 내용을 한 마디로 설명하면 성도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앞서 1-2절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여수룬을 위하여 시내 산에서 찾아오시고, 세일 산에서 일어나시고, 바란 광야에서 비취시고, 일만 성도 가운데 강림하시는 자체가 여수룬에게 행복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는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손길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입니다. 그래서 행복자입니다. 

①하나님이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26).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자 없도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는 도다." 
  
모세는 먼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말합니다. '그가 너를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시고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시로다!' 암탉이 병아리를 모으듯이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날개 안에 모으시고 지켜주시니 무엇이 염려가 되겠습니까? 
  
▶아슬아슬한 고갯길을 질주하는 버스가 있습니다. 그 안에 승객들은 겁을 잔뜩 먹고 초조하게 긴장하며 어쩔 줄을 몰라 난황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버스 안에 어린 꼬마가 아주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놀고 있습니다. 
  
옆에 있던 어른이 묻습니다. '아가야! 무섭지 않니?' '뭐가 무서워요' '정말 두렵지 않니?' '뭐가 두려워요! 우리 아빠가 차를 운전하는데요!' 그렇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라고 했습니까? '우리를 도우시려고 창공을 나시고 바람을 타시며 그의 능력과 존귀함을 나타내시는 하나님!' 이 우주를 운행하시고 지배하시는 그 하나님이 우리들의 아버지이심을 믿는 우리는 아무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궁창에서 위엄을 나타내십니다. 왜냐하면 사단권세를 짓밟기 위해서입니다.  

②하나님이 나의 처소가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28). 
  
계속 모세는 우리를 둘러싸고 계시는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인간은 환경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말하기를 '하나님이 우리의 처소가 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 또 하나님은 우리를 둘러싸고 계신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환경이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러분 무엇이 두렵습니까? 지금도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하기고 계십니다. 
  
다윗은 시91:1-7절에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는 자는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이는 저가 너를 새 사냥군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너는 밤에 놀램과 낮에 흐르는 살과 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과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을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도단 성에 있던 엘리사가 두려워하지 않은 이유를 아십니까? 아람의 적군들이 천천 만만 둘러싸고 있는 풍전등화의 위험과 절망 속에서도 그는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엘리사의 종은 겁이 잔뜩 났습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주인에게 말합니다.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오리까?' 벌벌 떨고 있는 종을 위해 엘리사가 기도합니다. 그러고 나서 종에게 말합니다.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아람의 군대보다 많도다!' 그 때 하나님이 종의 영안을 열어주었습니다. 사환이 보니까 '하나님의 불 말과 불 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다'고 성경 대하6장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둘러싸고 계신 하나님!' 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③계속 성경에선 '내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인간에게는 어쩔 수 없이 삶 속에 공포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범죄에 대한 지옥의 공포가 우리의 영혼을 억누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삼은 저와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이 영광스러운 팔이 우리를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를 받쳐주시는 이 영원하신 팔, 이것을 바로 내 존재의 근원이요, 내 생존의 터전이요 바탕인 줄 믿습니다. 이 팔은 어제도 오늘도 이제부터 영원토록 우리를 받쳐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팔이 모세를 얼마나 도왔습니까? 손을 들어 홍해를 갈랐고, 반석을 쳐서 생수를 내었으며, 손을 들어 기도했더니 아말렉이 쫓겨났습니다. 
  
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팔을 체험했던 모세는 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백성에게 말합니다. '영원하신 주의 팔이 네 아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행복자로다!' 

 ④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앞에 계신 하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내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인간에게는 미래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의 설계자이시며 내일의 경영자이시며 내일을 움직이시는 그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겼을 때 무엇이 두렵습니까? 
  
우리 앞길을 막는 원수 마귀를 하나님께서 대적해 주신다니 무엇이 염려가 됩니까? 신학자 '불트만'의 말을 빌리면 '앞서 가시는 그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십니다. 그는 불투명한 미래를 나보다 앞서 가시며 내 손을 붙들고 따라오라고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한 우리에게 아무런 두려움도 있을 수 없습니다. '위에 계신 그 하나님! 아래에 계신 그 하나님! 나를 둘러싸고 계신 그 하나님! 또한 앞서 가시는 그 하나님!' 이러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놀라운 인도하심 때문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이스라엘아!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⑤이슬 같은 은혜를 주시니 행복자입니다(28). 
  
"야곱의 샘은 곡식과 새 포도주의 땅에 홀로 있나니 곧 그의 하늘이 이슬을 내리는 곳에로다." 
  
근동지방의 이슬은 모든 농작물을 잘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하는 동력이 됩니다. 성경에서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로 비유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을 머금고 사는 성도는 복 받음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시1:3절에서 고백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이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를 말합니다. 이슬을 가리켜 하늘의 보물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매일매일 내리는 성도는 불황에서도 호황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사는 성도는 어떠한 구조조정이 있다고 할지라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이슬로 적시는 성도는 그 인생이 도산을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가정은 언제나 행복합니다. 

 
3. 왜 우리가 행복자인가? 진정한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의 구원' 때문입니다!(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스라엘의 행복의 최대 이유는 구원입니다. 또한 우리 행복의 최대 이유도 구원에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베푸신 인자와 긍휼과 섭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바로 구원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 이것이 우리들에게 영원히 찬미해야 할 제목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사실에 대해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십니까? 이 구원을 세상의 온갖 부유함과 권력과 쾌락으로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배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그는 바로 공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대로 있기만 하면 권력을 쥘 수도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소유한 그는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공주의 아들이란 자리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은 삶을 선택했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역사를 통해 유월절을 기념합니다. 애굽의 종살이에서 바로의 사슬에서 풀려나 구원을 얻었던 감격스럽던 그 사건을 회고합니다. 여러분 우리도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으로 인침 받은 이 사건을 크게 기념하시길 바랍니다. 
  
신앙의 최대 위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구원의 감격이 살아지는 것입니다. 오늘 구원의 감격을 체험하지 못하신 분 오늘 이 지역에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체험 받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스펄전 목사님이 울고 계십니다. 아내가 묻습니다. '왜 울고 있어요?' 하나님의 사람 스펄전이 말하기를 '오늘은 말이야 내가 십자가를 생각해도 감동이 없어. 그래서 내가 울어!' 십자가에 의한 감동이 사라진 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안타까운 사건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피 흘려 죽으시고 나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해 주셨습니다. 값없이 나의 죄를 용서하시고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시고 나에게 천국을 보장하시고 하늘의 시민권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이 주님, 이 구원을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나를 이 멸망과 지옥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신앙, 감격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옛날 어느 임금님이 병이 들었습니다. 전국에서 모인 유명한 의사들이 최선을 다했지만 고치지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 도사가 찾아와서 처방을 내리기를 '왕의 병을 고치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의 속옷을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신하들이 전국을 헤매며 행복한 사람을 찾았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학자를 찾아가서 행복하냐고 물었지만 배울수록 근심이 많다고 했습니다. 돈이 많은 부자를 찾아가서 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는 아직도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행복은 안중에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주 건강한 사람을 찾아가서 행복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언제 병이 찾아올지 몰라 불안하다고 말했습니다. 
  
행복한 사람을 찾지 못해 낙심하여 돌아오는 길에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한 부부를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쁘게 노래'하면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신하가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행복합니까?' 그러자 '예! 우리 부부는 하루 하루를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행복합니다.' 드디어 행복한 사람을 만난 신하는 자초지종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입고 있는 속옷을 벗어 달라고 정중히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농부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돈은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그 때 농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저는 가난해서 지금까지 속옷을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 때 신하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있는데 속옷이 없구나!' 이 이야기는 인생의 행복이 학식이나 재물이나 건강, 권력의 소유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 농부는 구원의 감격에 기뻐하고 행복했습니다. 이 믿음을 우리가 가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죽어서 천당 가는 그런 영적인 구원도 되지만, 이생에서도 통용되는 단어입니다. 

  ▶질병으로부터의 구원받은 결과가 건강입니다. 
  ▶가난으로부터의 구원받은 결과가 부요와 재물입니다. 
  ▶위험으로부터의 구원받은 결과가 평안입니다. 
  ▶저주로부터의 구원받은 결과가 축복입니다. 
  ▶그 절정이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인데 그것이 생명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사43:2절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구원은 하나님 편에서는 완성된 일입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다'고 할 때 하나님 편에서는 구속된 것입니다.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다'고 할 때 지명된 것이고 부른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고 할 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편에서는 구원이 완성된 것이고 또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구원을 받아들이는 확신이 없다는데 문제입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그런데 또 보세요! 본문에서 모세는 '이제부터 그 분은 너를 돕는 방패가 될 것이며, 너의 영원한 칼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방패와 영원한 칼, 적군이 쳐들어오면 그들에게서 방어하시는 구원자가 될 것이며, 적을 무찌를 수 있는 공격의 칼이 될 것입니다. 
  
이 공격의 칼을 기도로 갈고 닦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자의 칼은 절대로 녹이 쓸지 않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방어자이시며 우리를 위한 공격자가 되십니다. 이 놀라운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이 나의 인생이 끝나는 날까지 내 생애 속에서 역사하실 것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행복자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을 나의 구원자로 소유한 경험이 없다면 죄송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직까지 행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마음을 찢어 죄를 회개하고 구원자이신 하나님 앞에 나오십시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그분 앞에 무릎 꿇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거룩한 피가 나를 죄에서 구원한다는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주실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가 왜 행복자인가? 우리를 하나님이 승리자로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행복은 하나님이 승리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이 말은 싸움에서 승리하고 승자의 편에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전쟁은 냉정합니다. 패자는 승자의 노예가 됩니다. 패자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승자는 개선가가 있고 면류관이 있습니다. 
  
하박국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합3:19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우리가 왜 행복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승리자로 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승리자로 세우셨고, 다니엘도 승리지로 세우셨습니다. 우리들도 승리자로 세워 주실 것을 확실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는 승리하는 종교입니다. 어디서라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왜?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느니라!' 
  
이 확신 앞에 우리도 모세처럼 '나는 행복자로다'라는 고백이 터져 나오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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