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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 돌아오라 (욜 2:1~2,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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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 돌아오라 (욜 2:1~2, 12~17) 
 
 
지난 수요일 2월 17일부터 사순절이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부활절인 4월 4일까지 주일 외 40일 동안을 사순절로 지키게 됩니다. 교회는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래로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의미를 되새기고 우리의 신앙을 돌아보는 절기로 이 사순절을 지켜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40일은 참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 40일 동안을 금식하시며 준비하셨습니다. 모세도 40일 동안 시내산에서 금식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저 광야에서 고난의 행군을 통해 연단 받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졌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이 40일을 경건과 절제 그리고 금식과 금욕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하며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는 거룩한 절기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소위 “재의 수요일”(Ash Wednesday)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사순절 첫날인 수요일에 재를 십자가 형태로 이마에 바르는 의식을 치렀기 때문에 재의 수요일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면 왜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이마에 재를 바르는 의식을 행했을까요? 한 마디로 사순절의 영적 의미를 ‘재’로 상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순절의 영적 의미

재로 상징되는 사순절의 영적 의미는 두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두 가지는 재를 바르는 의식에서 집례자가 읽는 성경말씀 두 곳에 나타나있습니다.   

첫째, 창 3:19 말씀입니다.

재의 의식에서 집례자가 읽는 첫 번째 말씀은 창 3:19입니다.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줍니다. 바로 흙일뿐이라는 것입니다.

일전에 박물관에서 고려청자를 본 일이 있습니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이라는 청자입니다. 각이 진 작은 입부분과 어깨에서부터 바닥까지 이르는 곡선미는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문양은 6단의 동심원문 속에 운학을 상감처리하여 그 조형미 또한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그 값은 도저히 매길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청자도 흙일뿐입니다. 자칫 떨어뜨리면 깨지고 맙니다. 그 때 그 가치는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게다가 일단 깨지고 나면 쓰레기처럼 버려지게 되고 결국은 흙이 되고 맙니다.

바로 인생이 그렇습니다. 많이 배우고,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높은 경지에 올라도 자칫 한순간의 실수로 땅바닥에 떨어지고 맙니다. 자칫 불치의 병이라도 걸리면 한순간에 환자가 되어 쓸모없는 처지가 되고 맙니다. 그러다 결국 죽어 한 줌의 흙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인생을 잘못 살게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고려청자로 대단한 줄만 알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흙인 줄은 까맣게 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위치를 망각하고 교만하게 됩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흙임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실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시인 이현주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읊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살아라 
죽어서 흙 될 생각 말고 살아서 너는 흙으로 살아라 
온갖 썩는 것 더러운 것 말없이 품 열고 받아들여 
오래 견디는 참 사랑 모든 것 삭이는 세월에 묻었다가 
온갖 좋은 것 살아 있는 것 여린 싹으로 토해 내어 
마침내 열매 맺히도록 다시 말없이 버텨주는 흙으로 
흙으로 살아라 너는 흙이니 
오오 거룩한 흙으로 살아라 

우리가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흙으로 살기로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흙이면서도 흙이 아닌 것처럼 살다가 결국에 죽어서야 흙이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둘째, 막 1:15 말씀입니다.

재의 의식에서 집례자가 읽는 두 번째 말씀은 막 1:15입니다. 즉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줍니다. 바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성자라 일컬어지는 프랜시스의 제자 한 사람이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저 천국에 크고 작은 보좌들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에 크고 화려한 한 보좌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는 천사에게 이 보좌가 누구의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천사는 이 자리는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프랜시스가 앉을 자리라고 했습니다. 

이 환상을 보았던 제자는 어느 날 프랜시스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프랜시스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일세. 가장 큰 죄인이야”하고 대답했습니다. 제자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물었습니다. “성자로 일컬어지는 선생님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 때 성 프랜시스는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자네가 나를 잘 몰라서 그렇지 나는 참으로 큰 죄인이야. 하나님께서 내게 베푸신 그 큰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푸셨다면, 그들은 모두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일세.”

성 프란시스의 위대한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남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경건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자기 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수 믿으며 나름대로 경건한 삶을 살면서, 남들보다 덜 죄를 짓는다고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하나님 앞에서는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느냐 아니면 적게 지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지은 죄에 대해 얼마나 철저하게 인정하느냐 그리고 얼마나 깊이 회개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우리 눈에 들어있는 들보는 물론이고 작은 티라도 찾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깊이 아파해야 하겠습니다. 나아가 회개의 눈물로 그것들을 씻어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의 실천적 의미

교회는 교회력에 따라 절기마다 성경말씀을 읽도록 본문을 정해놓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서일과”라고 부릅니다. 이 성서일과에 사순절을 시작하는 재의 수요일에 읽도록 정해놓은 본문이 바로 오늘 설교 본문인 요엘서 2장 12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특히 12-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사순절을 지키면서 구체적으로 우리가 마음속에 새겨야 할 실천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금식입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실천해 가야할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하나가 금식입니다.

왜 금식을 명하셨을까요? 성경을 보면 최초의 금식 명령은 에덴동산에서 주어졌습니다. 창 2:17을 보면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게 하심으로써 먹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욕망대로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금식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망을 제어하고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육적인 배고픔을 고통스럽게 느낄 때 더불어 영적인 배고픔을 깨닫고, 그것을 채우시는 하나님을 더욱 철저하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로부터 벗어나고 우리의 영이 더욱 맑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적 상황에서는 금식이 다양한 형태로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다이어트나 바쁜 일정 때문에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금식이 아닌 ‘굼식’이 익숙해 져 있습니다. 그래서 금식의 본연의 영적 의미가 퇴색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금식은 현대인들을 강하게 자극하는 다양한 욕망들을 제어하는 데로 확대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한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소위 “미디어금식”캠페인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미디어금식이란 ‘밥(음식)’보다 현대인들이 즐기는 ‘미디어(게임, 채팅, 만화, 휴대폰, TV, 잡지 등)’ 사용을 스스로 절제하도록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 고통과 사랑을 묵상하도록 하는 21세기형 금식을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사순절 기간에 여러분 나름대로 금식을 실천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여러분 나름대로 금식할 것을 정해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 음식 먹는 것을 금할 수 있습니다. 미디어금식과 같이 게임, 인터넷, TV, 핸드폰 사용 등을 금할 수 있습니다. 골프, 술자리, 여흥 등의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금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 정도를 정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금할 것인가? 그리고 언제까지 금할 것인가? 또한 금식을 잘 실천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금식 일지를 기록하면서 하루하루 실천 여부를 확인해야 합니다.

둘째,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실천해 가야 할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또 하나는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라고 말씀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의 죄를 깨달았을 때 겉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쓴 채 울면서 자신의 마음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애통해 하는 마음은 사라지고 겉옷만 찢고 재만 뒤집어썼습니다. 회개한다는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몸짓만 남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회개를 하되 하나님 앞에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형식적인 회개가 아니라 진실된 회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컴퓨터로 문서작업을 하기 때문에 직접 손으로 편지를 쓰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과거 편지를 쓸 때 한 번에 편지를 써 내려간 일이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편지에 마음을 담아서 보내려고 할 때는 더 그렇습니다. 한참을 써 내려가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찢어버리고 다시 써내려갑니다. 대충 써놓고 다시 읽어보다가 찢어버리고 다시 쓰기도 합니다.

편지를 쓰다가 찢어버리는 것은 잘못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제대로 된 마음을 담아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찢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보실 때 우리 마음이 잘못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기뻐하시는 마음을 제대로 담고 있지 못한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애통해 하면서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을 담고 있지는 않는지? 혹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것을 담고 있지는 않는지? 그것들이 발견되면 빨리 마음을 찢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애통해 하면서 그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셋째,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사순절에 우리가 실천해 가야할 구체적인 행동 가운데 또 하나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눅 15장의 탕자의 비유를 보면 거기 상징적 표현들이 나옵니다. 우선 13절을 보면 “먼 나라에 가”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 멀리 갔다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서 너무도 멀리 떠나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17절을 보면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을 더나보니 결국 자기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절을 보면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탕자가 자기가 살려면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닫고, 용기를 내서 아버지께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와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있어서는 안될 곳에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야 합니다. 지금 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 품을 향해 힘차게 돌아서서 나아가야 합니다.

한국영화 명장면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이 기억납니다. 배우 설경구가 연기한 주인공 영호가 철길 위에서 절규하며 부르짖습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호는 광주항쟁에 참여해서 총을 들게 된 뒤 그 인생이 망가지게 됐습니다. 그 후 부정과 비리를 저지르는 경찰관 생활과 사업실패를 통해 엉망이 된 자기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 순수했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절규합니다. “나 다시 돌아갈래!”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들어설 수도 있습니다. 있어서는 안되는 자리에 서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깨닫고 다시 돌아서야 합니다. 용기를 내서 돌아가야 합니다.

어디로 돌아와야 할까요? 우선 말씀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귀를 열고 주의 음성을 듣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다음으로 기도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골방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입을 열고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리고 예배의 자리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 예배드리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영으로 진리로 예배드리는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순절을 맞이했습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 흩어졌던 마음을 주님께로 모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며 우리의 신앙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금식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마음을 찢으며 주님 앞에 서야 하겠습니다. 힘을 다해서 여호와께로 돌아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귀한 절기가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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