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 (롬 1:17)

  • 잡초 잡초
  • 297
  • 0

첨부 1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 (롬 1:17) 

  
1920년 어느 날, 한 청년이 교회를 찾아와, 실패와 좌절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때 목사님은 청년에게 다가와 "왜 눈물을 흘리는가?"하고 물었다. 청년은 "만화 원고를 들고 찾아가서, 출판사에 취직을 구했지만, 늘 거절만 당해서, 이제 갈 곳도 없다.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했다. 

목사님은 일자리를 다시 찾을 때까지, 교회 창고에서 지내라고 하였다. 그 청년은 너무나 고마워 "목사님,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감사하는 청년에게 목사님은 "다른 사람은 버려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을 잊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사랑으로 격려했다. 

허름한 창고는 청년에게 꿈을 꾸며, 그림을 그리는 안식처가 되었다. 청년은 목사님의 말씀대로, 용기를 잃지 않고, 열심히 그림의 꿈을 키워나갔다. 그런데 그 창고에, 어느 날 쥐가 나타났다. 창고 안의 쥐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그 쥐를 아름다운 쥐로 그렸다. 

생각지도 않게 그려진 이 쥐 그림은, 세계적으로 어린이들에게 사랑 받는 그림이 되었다. 이 쥐가 바로 미키마우스다. 이 청년이 월트디즈니다. 실의와 좌절이, 인생의 새로운 전기가 되었다. 그러나 월트디즈니가, 실의와 좌절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이 가르쳐준 믿음 때문이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자리에는, 위기가 있다. 그래서 실의와 좌절에 빠질 때도 있다. 우리는 경제적인 위기, 건강의 위기, 사업의 위기, 가정의 위기, 여러 가지 위기를 만난다. 우리는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복음은 능력이다. 구원을 주시는 능력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인생이 되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능력을, 성경은 복음이라 한다. 능력은 우리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말한다. 역도선수의 능력은 양동이를 드는 정도로는, 능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적어도 일반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힘을 발휘해야, 능력 있다고 한다. 

이처럼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이 됨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로는, 결단코 거룩하게 될 수도 없고, 의롭게 될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단어를 써야할 만큼, 큰 문제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죄인인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오직 복음 안에 있다. 

1. 하나님의 의는 무엇인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했다. 하나님의 선한 행동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즉 다른 말로,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의가 아닌 것'은 참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인간의 의'다. 만일 복음에 '인간의 의'를 포함하여 말한다면 잘못이다. 예수님을 믿은 대가로 구원 얻는다고 하면 잘못이다.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선택이, '자기의 의'가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지만,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은혜로, 구원 얻은 백성이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수많은 행동 양식을 만들었다.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스스로 행동을 절제했지만, 구원받을 수 없다. 우리가 착한 일을 하고, 봉사활동과 헌금을 하고, 철야예배, 새벽예배에 빠지지 않는다고, 구원받고 의롭게 되지 않는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의와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한다. 

이는 기독교가 아니라 종교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종교이다. 종교는 인간의 어떤 가능성을 극대화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이런 생각에서 가장 정리가 잘 된 형태가 불교다. 그래서 불교는 수행, 자기훈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고 도를 닦는다. 

참선을 통해서 도를 깨달아 거룩해지려고 한다. 결국 깨달음, 성불이 불교가 지향하는 최고가치다. 그래서 성철같은 고승들은, 산 속에 들어가 철조망을 쳐놓고, 10년 동안 앉은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벽을 바라보면서, 말도 하지 않고, 생각만 했다. 먹을 것도 절제한다. 잠도 자지 않는다. 

이렇게 도를 닦은 고승 성철이, 마지막으로 남긴 열반송은 "나는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하다. 산채로 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니, 한 덩이 불덩이, 푸른 산에 걸려있다."면서, 자신의 능력으로는, 아무리 도를 닦아도, 구원할 수 없음을 말했다. 

그러나 성경은 (롬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이기에, 자기가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한다.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고, 열심있는 활동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스스로를 거룩하게 할 수 없다고 한다.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우리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만 깨달아진다. 이처럼 복음에는 인간의 의가, 조금도 들어있지 않다.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자기 머리채를 잡고 스스로 잡아당긴다고 해서, 죽음을 면할 수는 없다. 누군가 밖에서 꺼내줘야 한다. 이처럼 인간이 만든 종교들은,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려고 한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방법은, 우리에게는 없다. 

구원의 방법이 있다면,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행동이다.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고전15:1-4)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사" 

사도 바울은 내가 전한 이 말을 너희가 믿으면, 구원받으리라고 담대히 말했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살아나심을,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했다. 

(고전15: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성경대로는, 신약성경이 아니다. 그 당시에는 신약성경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구약성경을 말한다. 

그러면 구약성경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는가?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예언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우리 무리의 죄악을,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고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한가?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기로 결정하셨다면, 내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이렇게 말씀만 하셔도 될 텐데,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우리 죄가 사함 받는가? 꼭 십자가의 피로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우리가 구원을 받는가? 

2.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나의 죄사함과 의롭게 됨과, 나의 구원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히9:11-14)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1) 피 흘림이 없으면, 죄를 사함 받을 수 없다(히9:22).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한 번씩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염소나 송아지, 양에게 손을 얹고, 자신의 모든 죄를 전가시켜서 염소와 송아지를 죽여서, 피를 흘려 바쳐야 죄사함을 받았다. 

동물이 피를 흘림으로, 죄를 용서함을 받는다는 것이, 구약의 제사였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를 깨끗하게 하지 못하겠느냐고 하였다. 이처럼 예수님의 피는, 죄인을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양이 되셔서, 우리 죄를 위하여,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고, 단번에 죽으셨다. 따라서 1년에 한 번씩 드리던, 온전하지 못한 피는, 영원하신 분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었다. 따라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모든 믿는 자들을 깨끗하게 하셨다. 

침례 요한이,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시고, 이튿날 나오심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침례를 통해 죄를 짊어지셨을 때, 우리 모든 사람의 죄를 위해, 제사로 드려질 어린양이라고 했다. 죄인 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런데 이 죄인 된 인간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어린양이 되셔서, 죽으셨다. 그의 피로 모든 믿는 사람들을, 죄 가운데서 깨끗하게 하셨다.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깨끗하게 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나를 정결하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는 뜻이다. 죄인된 인간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그래서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들마다, 주님의 거룩함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복음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 준다. 

(2) 하나님의 의는,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함으로 증명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어, 죄를 용서하셨다는 증거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지고 죽으신 예수님은,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복음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주시는, 하나님의 의가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 비록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신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고,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있다. 예수님의 보혈과 부활의 능력이, 우리를 날마다 깨끗하게 하고,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것을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했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고, 사흘만에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나를 의롭게 하신다는 믿음이다. 이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루터는 "구원은 면죄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3. 믿음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우리의 신앙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을 믿는 믿음에, 집중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중심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우리의 신앙이 무너진다.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를 다 청산하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셨음으로, 성경의 약속이 확실하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확신이 없거나, 복음을 믿지 못하면, 우리는 여전히 죄로 인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의인이 믿음으로 산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면, 나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것을 묵상하고, 삶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부자가 될 수도 있고, 가난할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오래 살수도 있고, 빨리 세상을 뜰 수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시험에 붙을 수도 있고, 떨어질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예수님을 믿는 목적이 무엇인가?" 이다. 

이 목적이 잘못되면, 문제가 생긴다. 부자가 되려고 예수님을 믿으면, 부자가 되면 교회를 나오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게 목적이라면, 명문대학에 들어가면, 교회에 나오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구원이 목적이라면, 구원받은 후에, 내 마음대로 사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우리의 목적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원수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면 안 된다. 

예수님을 믿었더니, 집안이 더 안 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겠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은, 믿음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무당의 푸닥거리로, 재앙을 막는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다. 

어떤 고통이 있어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믿음 안에서 살면, 사는 방식이 달라진다. 세상 사람들은 즐기기 위해서 살고, 집을 장만하는 즐거움에 살고, 돈을 모으는 재미에 살지만, 우리는 이런 자신을 못박았다.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놀라운 비밀과, 죽음에서 부활하신 진리를 붙들면, 헛되게 살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된다. 착각하지 말자. '믿습니다, 믿습니다.'라는 외침이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신앙은 나를 죽이고, 주님을 닮아가게 만든다. 제도가 아니라, 성령님의 역사로, 선을 이루게 된다. 따라서 우리의 삶의 중심을 예수님에게 맞추고, 믿음을 위해 사는, 신앙인이 되기 바란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했다. 

죄인 된 육체를 위하여, 예수님이 피 흘려주셨다. 이를 믿고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라며, 이렇게 고백하면 된다. 가끔 회개 기도를 했는데, 계속 정죄감이 생길 때가 있다. 용서받지 못할 것 같다. 여전히 내 안에 더러움이 있고, 하나님이 용서하지 않는 것 같다. 이는 사단의 속임수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다. 이것이 믿음이다. 이 믿음으로 살 수 있는 분들이, 되기 바란다. 우리는 감정이나 행위로, 구원을 얻지 않았다. 우리는 감정이나 행위로, 구원을 얻음이 아니다. 

결론이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고, 새는 공중을 날면서 살아간다. 남자는 자존심으로 살고, 여자는 사랑으로 산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산다. 따라서 믿음으로 사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성철의 涅槃頌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일생 동안에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불의 아비지옥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둥근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