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인에게 표를 주사 (창 4:1~15)

  • 잡초 잡초
  • 2000
  • 0

첨부 1


가인에게 표를 주사 (창 4:1~15)


1. 어느 외국 신문에 조그만 사진이 하나 실렸습니다. 사진은 미숙아로 태어난 쌍둥이가 인큐베이터 속에서 서로 마주보며 누워 있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처음 이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 의사들은 먼저 태어난 아이는 괜찮지만 나중에 태어난 아이는 심장이 약해서 곧 죽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한 간호사가 이 둘을 한 인큐베이터 속에 넣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습니다. 이것은 병원 수칙에 위배되었지만 결국 허락을 받아 두 아이를 한 인큐베이터 속에 나란히 뉘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건강한 형이 팔을 뻗어 아픈 동생을 감싸 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동생의 심장이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습니다. 동생은 조금씩 나아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회복해서 지금은 무럭무럭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쌍둥이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신문기자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서로를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사진 찍고 ‘생명을 구하는 포옹’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형의 손길에 의해 동생이 회복된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랑의 포옹은 대단한 것입니다.(생명의 삶)

아담과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들을 그곳에 살며 그 동산을 경작하며 지키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 자기 모양대로 만드신 아담과 하와와 함께 하셨습니다. 

창세기 3:8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이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고 했습니다.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과 가장 친숙하게 ‘함께’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사람의 형태로 에덴 동산에 나타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때는 이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 “(창2:16-17)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는 말씀을 거역하고 금단(禁斷) 열매, 선악과를 따먹은 뒤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했음에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에덴 동산에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던 죄인들에 대한 여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변함없으신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오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을 가진 “임마누엘”입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한 번은 유대인들로부터 백성들을 등쳐 먹고 사는 매국노, 죄인으로 취급받는 세리 마태를 예수께서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동족들로부터 배척당하며 살아왔던 마태가 자신을 받아주시는 예수께 너무나 감격하고 감사해서 자기 집에서 잔치를 크게 베풀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여러 다른 세리들이 자리를 함께 했습니다. 이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비방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이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5:29-32)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한 변함없으신 사랑으로 함께 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하시는 목적은 그 죄를 치유하여 의롭게 하기위해서입니다. 죄로 인해 죽어가는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2. 오늘 본문에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 하나님께서 ‘표’(mark)를 주셨습니다. 형제 살인죄를 범하고 방랑자가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보면 사람들로부터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한 가인이 낯짝도 두껍게 하나님께 두려움을 호소하자 “가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put a mark on Cain so that no one who found him would kill him.) 보복 살해를 당할까 봐 벌벌 떨고 있는 가인에게 생명을 보호해주시겠다는 특별한 은총, 은혜의 ‘표’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인이 이미 마음속에 살기(殺氣)를 품고 있는 것을 아시고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있느니라.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 하여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하느니라.” 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 마음에서부터 죄를 차단하여 범죄를 예방하도록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허허들판으로 유인해서 쳐 죽여 암매장하고 말았습니다. 전혀 용서할 여지가 없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형제살해의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착하기만 했던 동생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쳐 죽이고는 뻔뻔스럽게도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추궁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는 모릅니다. 내가 동생을 지키는 자입니까?” 라며 가증스럽고 철면피한 인면수심(人面獸心)을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가인의 모습과 태도는 누가 봐도 절망적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아담에게서 느꼈던 절망감을 다시 한 번 느꼈을 것입니다. 금단의 열매를 따 먹고 동산 숲에 숨은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셔서 물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처럼 물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때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말고 그 즉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 지은 죄를 자복하고 용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은 자기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처럼 아담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회개의 기회를 선용치 못하고 도리어 변명하기에 급급했습니다. 아담의 뻔뻔한 변명에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기 위해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창3:11) 고 물으십니다. 

아담의 잘못이 어떠한 것인지를 지적함과 동시에 아담이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를 애타게 원하시는 거듭된 반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신의 범죄를 아내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킵니다. 

“(창3:12)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러한 말은 하나님께서 하와를 주신 것에 대해 도리어 원망하며 또한 부부간의 한 몸 의식을 팽개쳐 버리는 무책임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내심을 가지시고 하와에게 묻습니다. “(창3:13)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그러나 하와 역시 남편 아담과 똑같이 회개는커녕 그 책임을 뱀에게 전가합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렇게 자신들의 범한 죄를 끝까지 회개하지 아니한 아담과 하와에게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는 말씀으로 죽음을 선고하셨습니다.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음을 선고하시면서도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창3:21) 

죄를 범하여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자신들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들어 입었던 치마는 일시적이고 몸의 일부분만을 가린 것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손수 입히신 “가죽옷”은 반영구적이며 몸 전체를 덮는 전면적인 의복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여전히 회개하지 아니했지만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하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사랑은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에게도 여전하십니다. 극악무도하게 형제를 살인하고 범죄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암매장했지만 하나님께서 “(창4:10)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말씀하시므로 무죄한 자의 피흘림을 친히 아시고 그것을 절대 간과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 살인자 가인에게 주어진 형벌은 “너는 땅에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될 것이니라.” 였습니다. 살인죄에 대한 형량치고는 너무나 가벼운 것이었습니다. 

인류역사 최초의 형제살해 사건만은 결코 연민을 갖지 아니하고 단호하게,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점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가인의 이 형제살해 사건은 조금도 불쌍히 여길 필요도 없고 조금도 관용을 베풀 필요도 없는, 단지, “엄벌로만 다스려야 할 사건”이었습니다. 억겁을 헤아리는 인류 미래의 역사를 바르게 교육하기 위하여서는 그리고 이 땅에 공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역사의 독버섯과 같은 파렴치한 살인자 가인에 대해서만은, 비록 가슴 아픈 일이기는 하여도, 그를 두둔하고 감싸기보다는 혹독한 심판을 내려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엄한 교훈을 삼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 인간사회의 상식에 어울리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인류의 미래 역사에 불운한 재앙을 가져다 줄 것이 너무도 확실한 살인자 가인을 한사코 벌주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 역사의 미래를 도대체 어떻게 다스려 가실 작정이시기에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엄단하는 엄한 교훈을 세워 주시지 않고 내버려두시는 것인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는 없는 것일까? 

과연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주신 “표”는 ‘사랑과 공의’를 겸한 표식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륜 파괴의 살인자 가인에게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도록 하시는 ‘은총의 표’를 주셔서 그 생명을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게다가 “표”를 주시면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고 말씀하시므로 어떤 면에서 보면 엄격한 징계보다는 그 생명을 철저히 보호해 주시는 특별한 은총을 베푸신 것입니다. 

죄인의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노아 홍수 심판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하늘과 땅에 사무쳐 그 죄악이 극도에 달하자(창6:11-13) 하나님께서는 땅에 사람을 만든 것이 후회가 되어 탄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6:5-7) 내가 창조한 사람을 지상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으로부터 짐승과 땅에 기어다니는 생물과 공중의 새까지 모조리 쓸어버릴 것이다. 내가 이것들을 만든 것이 정말 후회가 되는구나! 

물로서 깨끗이 쓸어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완전하게 파멸시켜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 때문에 자연계까지 파멸시킨다는 것입니다. 거대한 홍수를 지상으로 쏟아 부으셔서 땅 위에서 호흡하며 사는 모든 생물을 다 죽이실 때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가족만은 살리셨습니다. 그 이유를 창세기 6:8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6:8)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노아는 파멸을 면하게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의 방주에는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 쌍씩과 부정한 것도 암수 둘씩을 들어가도록 해서 그 씨를 퍼트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정결한 짐승만이 아니라 부정한 짐승들에게도 임한 것입니다. 

(창7:2-3)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데려오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데려와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정결한 짐승과 더불어 부정한 것까지도 “유전케 하라” 는 하나님의 말씀은 심판보다 보존을 더 중요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생태계의 보존으로 나타나시고, 그 생태계 보존은 노아 홍수 심판 이후 인간의 생활을 돕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의 배려인 것입니다.

(창9:1-4)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채 먹지 말 것이니라.

노아 홍수 이후, 사람들은 대 홍수심판의 교훈을 뼈저리게 가르침 받고서도 여전히 깨닫는 바 없이 되려 홍수 심판자이신 하나님께 대항하여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바벨탑을 쌓아서 감히 하나님께 대항하려고까지 했습니다.

(창11: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성과 대를 쌓아”라는 말은 대제국을 건설하고 이를 기념하는 탑을 세우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은 하늘 끝까지 높아지려는 인간의 교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인간의 끝없는 교만을 의미합니다.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은 가인의 후예들이 가인이 받은 땅에서의 유리방황하는 저주(4:12)를 인간적인 수단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는 교만과 무지를 드러내 주는 것입니다. 가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과 맞먹겠다는 이러한 발상은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사탄에서 나온 것입니다. 뱀으로 분장한 사탄이 금단의 열매를 두고 하와를 유혹할 때, “(창3:4-5)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고 한 것과 똑같은 유혹입니다. 

이렇게 인생들이 피조물로서 자신들의 주체파악도 하지 못하고 감히 하나님께 대항하고자 할 때도, 하나님은 그들을 엄벌하시지 않고 단지 그들을 지면에 흩어 놓는 일만을 하셨습니다. 말하자면, 교만이 꼭대기까지 오른 바벨탑 건축에 참여한 자들을 온 지면에 흩으셔서 오히려 그들이 온 지면에 흩어져 번창해지도록 섭리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인생들이 아무리 패역무도하여도, 그리고 어떠한 모습으로 대항하고 대적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바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고 했지만 이러한 하나님 말씀과 뜻에 거역하는 인간의 어떠한 행위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바벨탑 건축자들의 이름은 흔적조차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로니칼하게도 자신을 드러냄 없이 주를 위해 겸허하게 살다간 주의 종들의 발자취는 길이 남아 빛나고 있습니다.(히 11:4-40) 

이렇게 인생들이 세대를 이어가며 아무리 하나님을 거역하고 대항한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다함이 없습니다. 


4. 가인에게 생명을 보호하는 ‘표’를 주시고, 노아 홍수 심판에서 부정한 짐승들을 방주에 올려 그 생명을 보존하시고, 하나님을 대항하고자 했던 바벨탑 사건에서도 형벌보다는 온 지면에 흩으셔서 번성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오늘 본문 1절에 있습니다.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가인의 탄생이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부부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졌다, 하나님께 생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같은 살인자의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그것은 이 세상에 잘못 돋아난 하나의 독버섯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도 또한 하나님께서 뜻이 계셔서 세상에 보내신 것, 그러므로, 살인자의 생명 탄생도 하나님의 창조행위의 한 결과인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가인의 생명을 잉태한 바로 그 가인의 “어버이”,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 생명의 잉태자요 우리 생명의 출산자요 우리의 아버지시오 우리의 어머니시라면 우리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비록 가인과 같은 살인자의 생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친히 잉태(孕胎)하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출산(出産)하신 사랑의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인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리시고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살기(殺氣)를 잘 다스리라’고 타이르시고, 끝내 동생을 유인해서 살인하고 암매장했을 때도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시며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단칼에 베어버려도 지당한 형제 살인죄에 대한 형벌로 ‘너는 땅에서 집 없이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될 것이다.’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처벌, 처벌이라기보다는 집행유예로 내보내버린 것입니다. 파렴치한 가인이 이러한 처벌마저도 너무 무겁다고 하자 그 생명을 철저히 보호해 주시겠다는 “표”를 주신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가인을 잉태케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를 낳으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인의 생명을 세상에 보내 주신 하나님, 그 생명을 보호하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인간의 가슴속에 하나의 문신(文身)처럼 새겨져 표현된 것이 바로 ‘가인에게 주신 표’인 것입니다. 살인자 자식을 가슴으로 부둥켜안고 안타깝고 안쓰러운 연민에 몸부림치는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가인에게 표를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생명을 주신 어버이의 마음의 본질은 본능적으로 자식의 생명을 무조건 지키려는 것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또한 바로 다름 아닌 가인에게 생명 보호의 표를 주시는 하나님의 바로 그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우리의 어버이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자녀(子女)요 하나님의 소생(蘇生)이며 하나님이 주신 “표”를 지니고 있는 자들입니다. 


5.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큰 사랑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몰라보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일3:1) 하나님을 알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어 마음에 영접하게 될 때 하나님이 믿는 사람 마음 안에 거하게 되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일4:14-15) 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로 보내신 것을 우리가 보았고 또 증언하노니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의 안에 거하시고 그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예수께서 구세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믿음으로 낳은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요일5:1)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분의 자녀들도 사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을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는 말씀으로 여러분의 신분을 정확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택하신 족속”에서 ‘족속’의 헬라어 ‘게노스’(??νο?)는 ‘혈통’, ‘후손’ 혹은 ‘출생’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예수 믿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 그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혈통,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육적인 혈통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 되었다고 자랑하나 이제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진정한 택함을 받은 족속, 혈통이나 민족의 차별없이 영적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시민권”으로 표현했습니다.

(빌3:20-21)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본국(本國)이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출생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호적(戶籍)이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 녹명(錄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형 에서의 보복을 피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세월을 보낸 야곱에게 때가 되어 약속하신대로 거부가 되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31:13)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야곱이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곤고한 때 나타나셔서 “(창28:13-15)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 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곳을 야곱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 하늘의 문이라 부르며 그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이유는 야곱 인생에 있어 그곳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시면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므로 하나님을 만난 곳이 바로 야곱의 출생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벧엘의 하나님”, 하나님을 만나 아브라함의 자손, 상속자임을 확인해 주신 그곳으로 돌아가라, 그곳이 너의 영적 출생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영적 출생지 벧엘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세겜으로 갔다가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환난을 당하게 됩니다. 이를 바로 깨닫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창35: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창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창35: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창35: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이렇게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축복의 상속자임을 인정받으므로 그가 진정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종살이하다시피 했지만 라반은 돈 한 푼주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라반을 책망하여 거부가 되어 벧엘로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창31:38-42) 고향으로 돌아가는 야곱에게 형 에서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형의 모든 원한을 사랑으로 바꾸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형님의 얼굴을 볼 때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며 기쁨으로 에서 형을 만나고 형 에서의 극진한 환영을 받았습니다.(창33:10)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렇게 축복하시고 그 앞에 가로놓인 문제들을 돌파하게 하신 이유는 그가 하나님께서 낳은 하나님의 자녀, 아브라함의 축복을 상속받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러한 복된 삶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성도 여러분은 예수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낳으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자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축복하신 것처럼 여러분을 축복하시고 형통하게 하실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요일4:8) 하나님만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어느 마을에 인형을 무척 좋아하는 제인이라는 소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집에 놀러 오신 이웃집 아저씨에게 그 소녀는 여러 가지 인형들을 보여주며 자랑했습니다. 인형을 보고 있던 아저씨가 갑자기 소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인아! 너는 이것들 중에 어떤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그 물음에 소녀는 입을 꼭 다물고 한참동안 생각에 잠겼습니다. 잠시 후 소녀는 아저씨를 바라보며 “아저씨, 제가 좋아하는 인형을 보여드릴게요. 

그런데 한 가지 약속을 해주세요. 제가 인형을 보여드릴 때 절대로 웃지않겠다구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이상했지만 소녀와 약속하고는 인형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소녀는 방안에 들어가더니 코는 주저앉고 팔 다리는 다 떨어져 나간 낡은 인형 하나를 들고 나왔습니다. 아저씨는 그 인형을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아!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하는구나. 

그런데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 무슨 이유 때문에 너는 이 인형을 제일 좋아하니?” 제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왜냐 하면요. 이 인형은 제가 사랑해주지 않으면 아무도 사랑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아니 영원토록 사랑해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요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셨습니다.(요일4:9-10)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랑으로 우리를 자녀삼으시고 사랑하시는 목적은 하나님의 그 아름다운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입니다.(벧전2:9) 

가인에게 ‘생명의 표’를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세상에 전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엡6:24)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