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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창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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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을 쌓는 사람들 (창 11:1~9)


현재 세계에 존재하는 언어는 약 6,800개 정도 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다양한 언어가 나오게 된 배경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배우기 힘들어하는 과목중 하나가 영어입니다. 옛날에 영어 공부하면서 종이에 단어를 반복해서 쓰며 종이가 까맣게 되도록 단어를 외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영어 공부하다가 막힐 때면 가끔 영어 사전을 통째로 암기하는 공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차라리 미국에서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하며 부모를 원망했던 적도 있습니다. 

요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교육 비용으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영어입니다. 한국 말도 제대로 못하는 어린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며 영어 전용 유치원에 보내기도 합니다. 자녀들을 조기유학이나 해외 어학연수를 보내는 이유도 단지 영어 하나만 제대로 습득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입니다. 한국인들의 영어공부는 정말 눈물겹습니다. 우리의 기대나 원망과는 상관없이 성경은 언어가 이렇게 다양하게 된 이유의 배경에는 하나님의 심판과 계획이 있다고 말씀해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언어의 장벽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늘에 닿은 탑

1절 말씀을 보면 인간에게는 원래 언어가 하나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너무 좋았겠죠? 이런 상태가 지속되었다면 우리는 어학공부에 신경 쓸 필요 없이 세계 어디든 다닐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언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입니다. 사람은 말이 통해야 삽니다. 말이 통해야 자기 생각을 나눌 수 있고 그래서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말이 통해서 만든 결과는 집단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습니다. 창세기 9장에서 주님은 노아의 후손들에게 “땅에 편만하여 그 중에 번성하라”(창9:7)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인구가 불어나면서 동쪽으로 옮겨가다가 그들은 시날 평지라는 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곳에서 더 이상 흩어지지 않고 함께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소위 국가나 도시의 탄생이라 할 것입니다. 옛날 문명이 발달하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그냥 단순히 농사만 지었다면 사람들이 복잡하게 모여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강을 끼고 있는 평야지대 같은 데는 농사짓기는 쉬워도 잦은 강의 범람으로 관리가 어렵습니다. 강의 물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제방을 쌓고 수로를 내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면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범죄도 일어나기 쉽기 때문에 효율적인 통제를 위해서 필연적으로 왕이란 제도가 등장하게 됩니다.

시날 땅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연안에 있습니다. 이곳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입니다. 이런 필요들에 의해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다스리기 위해서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신적, 종교적 구심점입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습니다. 로마시대에 황제숭배를 강요했는데 이는 단순히 인간 왕에 대한 신격화만을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황제숭배를 통해서 로마 제국의 통일을 기하고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4절에서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라고 하는데 여기서 성은 도시를 말하고, 대는 탑을 말합니다. 학자들은 지금도 이란 이라크 지역에서 발견되는 지구라트가 바로 이 바벨탑일 것이라 주장합니다. 지구라트는 구운 진흙 벽돌로 쌓아올린 것으로 기록상으로 볼 때 가장 높은 것은 근 90m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 지구라트는 약 4천에서 6천 년의 역사를 지닌 것으로 그 유적들이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피라미드 형태로 쌓아올렸는데 중앙에는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바벨탑은 단순한 탑이 아니라 그 위에서 제사를 드렸던 거대한 신전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런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4절에 모두 나와 있는데 첫째는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이고 셋째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늘에 닿게 하자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의 이유였던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평지에 산과 같이 높은 건물을 세워 그 위용을 자랑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을 교만이라 합니다. 교만은 인간의 한계를 모르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의 비극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마치 하나님인 것처럼 하는 데 있습니다. 인간은 결코 신이 아닙니다.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에 인간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최고의 대장장이는 다이달로스입니다. 그에게는 이카루스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에게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날개를 주면서 적당한 높이에서만 날고 하늘 높이는 날지 말 것을 경고하였습니다. 이카루스는 밀랍 날개를 달고 어디든 날아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태양을 향하여 하늘 높이 날다가 그만 밀랍이 녹아내려 지상에 떨어져 죽고 맙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고 인간은 탐욕의 바벨탑을 쌓다가 결국 그 탑과 함께 망합니다. 동양에는 ‘계영배’라는 것이 있습니다. 계영배는 술잔의 일종인데 과학적 원리를 이용하여 일정 높이 이상이 되면 따랐던 술이 사라지게 만든 잔입니다. 사람들에게 적당히 마실 것을 권유하기 위해서 만든 교훈의 잔입니다. 모든 것은 적당한 선에서 그만 둘 줄 알아야 합니다. 끝을 보려고 하다가 결국 망하게 됩니다.    

둘째는 우리의 이름을 내자는 것입니다. 여기 우리가 누구입니까? 인간입니까? 그렇다면 이는 휴머니즘의 선언입니까? 이름을 내고자 하는 시도가 무엇이 나쁩니까? 아닙니다. 여기의 ‘우리’는 인간 개개인의 총합이나 인간의 이름이 아닙니다. 제국의 이름이고 그 제국을 다스리는 신이나 왕의 이름입니다. 실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이름은 수메르나 바벨론 등 제국의 이름이나, 마르둑이나 탐뮤즈와 같은 신들의 이름과 우르남무나 함무라비 같은 왕들의 이름뿐입니다. 여기 말하는 이름들은 드넓은 땅을 혼자 차지하려는 제국들의 이름이고 그 통치자들의 영광일 뿐입니다. 실제 그 탑을 쌓아올리는 수고를 하였던 민중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모든 개개인의 행복이었지만, 제국을 일으킨 인간들은 왕과 통치계급 소수의 행복만을 바랐을 뿐입니다.

셋째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의도입니다. 이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불안감을 보여줍니다. 가인과 그의 후예들이 성을 쌓았던 것과 같습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은 서로 뭉쳐서 자기 세력을 과시해야 합니다. 부를 쌓고 무기를 만들어 스스로를 보호해야 합니다. 자기를 건드리는 자들에게는 잔인한 보복을 함으로써 자기를 건드리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셔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위험에서 구원해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약한 동물일수록 소리를 크게 지르고 자기의 몸집을 불려서 크게 보이려는 시도와 같습니다. 

집단적인 착각이란 것도 있습니다. 한데 뭉쳐 있으면 안전하다는 착각입니다. 악인들이나 죄수들로 함께 있으면 죄의식이 사라집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서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니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에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홀로 있으나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적들과 싸움을 벌였던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시3:5-6)

언어를 혼잡케 하신 하나님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눈에 들어왔던 것 같습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는 은근한 유머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들은 꼭대기가 하늘에 닿는 성과 대를 쌓았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그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내려와야 보일 정도로 작은 것이었습니다. 

만리장성은 달에서도 보이는 유일한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달에서 보면 바다나 사막, 구름과 같이 큰 것만 보이지 어떤 인공건축물도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번에 무려 8백여 미터로 지상에서 최고 높이를 자랑하는 버즈두바이도 높은 곳에서 보면 그냥 보일락말락한 점일 뿐입니다. 만리장성이 달에서도 보인다는 말은 그냥 과장된 이야기일 뿐입니다. 미국의 항공우주국 NASA 직원들은 이런 질문을 하는 동양인들 때문에 골치가 아플 지경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만리장성은 얼마나 대단한 건축물입니까? 폭이 4-5m, 길이가 6,400km에 이르는 대단한 건축물입니다. 이 성을 쌓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은 사람들은 그 장성 밑에 바로 묻었기에 만리장성은 세계에서 가장 긴 무덤이기도 합니다. 실제 가서 보면 그 험악한 산중에 어떻게 저런 성벽을 쌓았는지 감탄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런 장성도 하늘에서 보면 작은 선에 지나지 않습니다. 히말라야의 높은 산들도 비행기 위해서 내려다보면 진흙으로 성을 쌓고 그 위에 솜털을 얹은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 인간들이 수고가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변변찮습니다. 

시편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시2:4)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인간의 어떤 노력도 헛수고일 뿐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라 그에게는 열방은 통의 한 방울 물 같고 저울의 적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니”(사40:15) 우리는 가끔 비행기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습니다. 하늘 위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우리는 아옹다옹 싸우고 죽네 사네 합니다.

이런 하늘의 시각은 아니더라도 시간의 눈을 가지고 우리 인생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인생을 뒤돌아보면 작은 점으로 보입니다. 당시에는 날아다니던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세가 있었고 한 때는 전국민이 주목할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잊혀 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이들과 함께 TV를 보다가 옛날 유명인들이 나오면 한참 설명을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당연한데 아이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가 그렇게 힘들어했고, 또 그 학위를 따고, 그 자리에 오르고, 그 일에 성공하면 다 될 것처럼 안달했던 것들이 세월이 흐르고 나면 다 부질없고, 꼭 그 길이 아니었어도 다른 길도 많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좀 먼 거리에서 보면 사물이 객관적으로 보입니다. 여러 문제나 물질이나 자신의 소원에 대해서 가끔 이런 하늘의 시각이나 시간이의 시각으로 본다면 집착에서 조금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의 시도에 대한 하나님의 결정이 6절과 7절에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인간들이 한 데 몰려 있다는 것이 위험하다는 판단입니다. 지금은 바벨탑을 쌓는 작은 일을 했지만 이후에는 한 데 몰려서 어떤 엄청난 죄악을 저지를지 알 수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통제할 수 없는 권력과 힘을 갖는 것은 위험합니다. 권력과 힘을 가지면 반드시 그 힘을 사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나라가 강성해지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 강성한 힘으로 이웃나라를 침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에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하나로 뭉치는 것을 막습니다.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면 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바벨이란 말은 ‘혼잡케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 수많은 언어가 있고 언어의 장벽 때문에 불편한 점이 많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인간의 그릇된 힘의 사용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예비조처였다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막아도 인간의 어리석음은 끝이 없습니다.

브레히트의 시『어떤 책 읽는 노동자의 의문』이라는 책에는 기원전 3세기에 이탈리아를 침공했던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와 그의 부하의 유명한 대화가 실려 있습니다.  
“왕이시여, 로마를 이긴 후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당연히 이탈리아를 정복해야지!”
“그 후에는요?”
“시칠리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그러면 전쟁이 끝납니까?”
“물론 아니지. 그것은 보다 위대한 일들을 위한 시작과 전주곡에 불과하다. 리비아가 남아 있고 카르타고도 그리 멀지 않으니 말이야. 그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는 더 이상 적이 남아 있지 않게 될 걸세.”
“분명히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 후엔 무엇을 하지요?”
“그 후에는 조용히 인생을 즐겨야지.”
“그렇다면 이곳에 그대로 머무르면서 그렇게 하면 안 되나요?”

인간의 어리석음과 욕망을 경계하기 위해서 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의 교훈을 통하여 인간의 욕망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거대주의에 대한 경고

하나님은 인간들이 거대 제국을 이루어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온 땅에 흩어져 사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11장 9절에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분명히 말씀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행17:26) 연대와 거주의 한계를 정하셨습니다. 너희 시대는 언제까지이고 너희 살 곳은 이곳이라고 정해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경계를 허물어서 크기를 넓히고 늘려가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에 주목해야 합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경계를 허물고 하나가 되려고 합니다.

거대 왕국이나 제국이 그렇습니다. 사사시대에 이스라엘은 12지파가 평등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대해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왕을 원했습니다. 지파가 흩어져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뭉쳐 강대국을 이루고 싶었던 것입니다. 소극적으로는 이방인의 침략에 방어하기 위해서였지만 적극적으로는 자신들도 이방인을 발 아래 지배하고 이익을 취하고 싶은 마음에서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은 이런 이스라엘의 요구를 어리석다고 하며 왕정 제도의 폐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8:11-17) 

이것이 거대 왕국이나 제국을 이룬 결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제국을 형성하여 살게 될 때의 폐해와 잘못을 꿰뚫어보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계는 적은 민족이 적은 나라를 이루며 흩어져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삶은 이와는 반대되는 방향으로만 가려 합니다. 지난 19, 20세기를 제국주의 시대라 부릅니다. 강대국들이 약소국들을 병합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억압과 수탈을 당하였습니까? 결국 1차, 2차 세계 대전이라는 엄청난 인명희생을 치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제국주의라는 바벨탑을 쌓은 결과입니다.

현대 사회의 흐름을 우리는 세계화 또는 신자유주의라고 부릅니다. 신자유주의는 나라 간의 경계들을 허물어서 금융과 자본의 이동을 자유롭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작년 재작년의 세계 경제 위기였습니다. 통제되지 않은 금융자본이 국경을 넘어 마음대로 움직이다 사고를 낸 것입니다. 한 나라의 잘못이 온 세계를 위기로 몰아가는 세계화의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에 보니까 오바마 대통령이 금융 부분에 제재를 가하겠다고 합니다. 금융 자본에 경계를 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자본이 마음대도 움직이니까 초국적인 거대 기업들도 등장했습니다. 반도체 부문에서 우리나라 삼성도 그런 기업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 작은 규모의 민족 기업들이 죽어버렸습니다. 경계가 철폐된 민족 기업들이 거대한 초국적 자본과 싸워 이길 수는 없습니다. 국내에서도 대기업은 성장하는데 중소기업들은 설 자리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실제 기업 숫자나 기업에서 고용하는 노동력은 중소기업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 경제는 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줄어들고 열악해지는 현실이벌어집니다. 대형 할인점 하나가 들어서면 수많은 동네 슈퍼마켓들이 죽습니다. 그렇지만 대형할인점에서 고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고, 또 비정규직이나 값싼 노동력들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보니 이익이 소수에게 집중이 되고 많은 사람이 실직이나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바벨탑의 교훈은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지 않고 서로 골고루 나누어 먹고 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한국교회를 특징짓는 현상 중 하나는 대형화입니다. 성도 수 기준으로 세계 10대 교회 중에 절반 넘게 한국교회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수만 명의 성도 수를 자랑합니다. 이번에 사랑의 교회가 2,100억을 들여 건축을 한다고 발표하여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8백억 규모의 교회 건물을 모 교회가 짓는다고 하여 그 액수에 놀랐는데 이번엔 근 세 배에 이릅니다. 사랑의 교회는 성도수가 4만 명에 이른다고 하며, 현재 있는 건물로는 2천여 명 밖에 들어가지 못해 주일예배를 6-7부 씩 드리고 있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새 교회당을 지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렇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새 교회당을 짓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교회 크기의 문제입니다. 성도 수가 몇 만 명씩이나 되는 것을 과연 교회라고 할 수 있는 지 의문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바벨탑과 같은 규모의 크기를 기뻐하실 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입니다. 사랑의교회는 진작 교회 대형화 문제에 대해서 심각히 고민을 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크기가 5천 명이 되었든 1만 명 선이 되었든, 그 선을 정하고 그 이상이 되었을 때는 부지런히 교회를 분립시켜야 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이처럼 엄청난 규모의 돈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사랑의교회가 걸어왔고 또 앞으로 걸어가는 길은 한국교회의 모범이 될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사랑의교회처럼 대형교회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고, 교회 건축하기에 바쁩니다. 이제는 성공의 척도가 교인수가 되어버린 시대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한국교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은 세 마디 말로 압축합니다. “모이자.” “돈 내라.” “집 짓자.” 

사랑, 섬김, 비움, 나눔, 평화, 성결, 생명, 구원 등 더 소중한 가치들을 한국교회와 연결시킬래야 도무지 그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부흥과 성장이라는 논리에 교회다움은 뒷전으로 밀려버렸습니다. 사랑의교회의 건축 결정은 여기에 결정타를 먹여버린 형국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인 것은 한국교회가 모두 대형화를 꿈꾸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한국교회 교인 수는 매년 줄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대형교회는 많아지고 더 성장을 하고 있지만, 중소형교회는 계속 감소하고 있습니다. 

우리 관악구 주변 교회들을 보아도 주일 대예배에 본당을 다 채우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마치 그 모습이 대기업은 살고 중소기업은 죽어가고 있는 한국경제의 모습과 같다 할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농촌교회를 흡수하여 도시교회가 살고, 중소형교회가 무너지면서 대형교회를 살리고 있는 형편이라 할 것입니다. 영혼구원이라는 포장된 말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목회자의 욕심과 성도들의 이기심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라는 모델이 항구적인 동력을 제공하여 모두가 뒤질세라 바벨탑을 쌓기에 골몰합니다. 

몇몇 교회만 성장하는 것보다 한국교회 전체가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꾼들이 큰 교회에만 몰려 있으면 안 됩니다. 한 사람이 전도하고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는 작을수록 좋습니다. 큰 교회는 일군이 많기에 대부분의 일꾼들이 묻혀 지냅니다. 그들이 작은 교회에 가면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고 더 많은 일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형교회가 주는 안정감과 여유와 고급문화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로 몰리고 있습니다. 작은 교회가 주는 부담감과 희생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기독교는 이제 ‘문화’가 되었고 예수의 ‘제자’들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 때문에 나머지 99마리는 그대로 놔두고 찾아나서는 분입니다. 기독교의 사랑과 생명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잃어버린 양 한 마리보다 남아 있는 99마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남아 있는 99마리를 살리기 위해서 잃어버린 양 한 마리는 가볍게 외면합니다. 그것이 바로 대형화를 추진하고 거대주의에 물들은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그 결과 교회는 생명력을 잃고 있습니다. 국회의원의 50%가 넘게 기독교인들이고 수많은 엘리트들이 신앙인들이지만 한국사회를 바꾸는 데는 전혀 무력합니다. 교회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바벨탑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또한 그들의 비위에 맞는 설교를 해야 헌금이 나오고 교회가 유지되기 때문에 예언자적인 설교는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교회 건축과정을 보면서 더 가슴 아팠던 것은 그동안 존경했던 옥한흠 목사님의 말 한 마디 때문이었습니다. “큰 교회가 큰 일을 한다.” 물론 세상적으로는 맞는 말씀이지만 이는 성경의 진리와는 다릅니다. 교회 건축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동안 옥 목사님의 제자훈련 철학과는 다른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세상의 길과는 반대입니다. 세상은 강한 것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약한 데 힘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세상은 지혜롭고 겉으로 드러난 표적을 구하지만 우리는 십자가의 어리석은 것을 전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예수님은 겸손하여 작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사람을 모아 혁명을 도모하기보다는 십자가에서 스스로 희생하는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셨던 길은 거대주의와 승리주의와는 다른 길이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여기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작아질 때 하나님께서 일하십니다. 오늘 말씀의 교훈처럼 우리도 어리석은 욕망의 바벨탑을 쌓지 말기를 바랍니다. 작은 것에 만족하고 십자가를 사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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