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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긍휼을 원하노라 (마 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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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긍휼을 원하노라 (마 9:9~13)


시작하는 말

어느 날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가버나움 세관에 앉아 있는 세리, 그러니까 세금을 받고 있는 세리 마태라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부르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로 삼으십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예루살렘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유대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세리란 여기서 세금을 받아 로마에 갖다 바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군가는 하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결국 로마사람의 심부름을 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세리는 비도덕적이고, 비애국적이고, 비종교적인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죄인과 같은 부류로 취급했습니다. 이렇게 멸시받고 천대받는 존재가 세리인데 예수님께서 하필이면 이런 사람을 불러서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한순간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마태는 감격한 나머지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친구들, 친구라야 전부 세리들인데 그들을 불러놓고 큰 잔치를 벌여 예수님을 모실 때 바리새인들이 영 못마땅해 합니다. 

예수님이 하필이면 왜 저런 사람들하고 친하게 지내는가 했습니다. 마음으로만 그리 생각하고 점잖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참다못해서 시비를 걸고 듭니다.“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잡수시느냐”합니다. 어떻게 그런 집에 출입을 하느냐, 어째서 그런 사람들과 사귀느냐, 하고 아주 사나운 비난을 하게 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면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십니다. 번제보다도 하나님의 긍휼, 긍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원하신다, 함입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본문에 나타난‘긍휼’이라는 말은 헬라어로‘엘레오스’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구약의 호세아 6장 6절을 인용하십니다.“내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이렇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는 것입니다. 인애(仁愛)라는 말이나 자비라는 말이 다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데 히브리말로는‘라함’이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말을 굳이 인용하는 것은 그 어원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말에‘레헴’이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레헴’이라는 말에서‘라함’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레헴이란 바로 여인의 자궁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신비로운 말입니까. 여인의 자궁 - 그것이야말로 사랑의 고향이거든요. 사랑의 뿌리가 거기에 있습니다. 

자궁과 같은, 그런 사랑을‘긍휼’ 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는 이것을 이런 말이라고도 합니다. 새가 모이를 주워 먹고 돌아와서 새끼에게 그것을 토해내어 먹이는 것을 봅니다. 그럴 때 보면 막 몸을 비비꼬면서 토해 먹입니다. 꽤 큰 새끼는 아예 주둥이를 어미의 목구멍 속에 집어넣어가지고 꺼내 먹습니다. 이렇게 해가면서 새끼를 키우는 어미새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사랑을 ‘긍휼’이라고 한다는 해석입니다. 

이렇게 그 어원과 배경을 생각하고 보면 너무도 신비롭고 무궁무진한 진리가 그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적 사랑입니다. 자궁 속에서 생명이 출생합니다. 생명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사랑 속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으로 주도적입니다. 자궁이 생명체를 보호합니다. 모든 필요한 것을 다 공급해줍니다. 그 체온과 영양과 그 사랑까지도 공급합니다. 태모교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공급을 해주어서 그 생명이 존재합니다. 또한 신비로운 교육적 의미가 있습니다. 아시는 대로 자궁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지 않습니까. 자라서 아기가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오래오래 기다려서 아주 작은 보이지도 않던 생명체로부터 커서 하나의 갖추어진 생명이 되어 나옵니다. 자궁으로부터입니다. 

다시 한 번 크게 눈을 뜨고 우주를 바라봅시다. 이 우주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궁입니다. 그 하나님의 품속에서, 그 속에서 우리가 자라가고 있거든요. 생명을 받아서 생명으로 삽니다. 생명의 은혜로 생명으로 삽니다. 그 긍휼 속에서 우리가 무럭무럭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얼마나 신비로운 말입니까. 하나님의 긍휼, 생명력과 신비로운 사랑이 크게 작용합니다. 이것을 통칭 긍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 긍휼을 배우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몸 말 

다시 오늘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 보겠습니다. 본문에서 제사보다 긍휼을 원하신다고 제사와 긍휼을 대비해서 말씀하시는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한번 대비해 보십시오. 제사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바칠 때, 짐승을 잡아 불태워서 드립니다. 사람들의 하나님께로 향하는 종교의식입니다. 그런데 긍휼이란 아무것도 드리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가슴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긍휼을 내가 수용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긍휼을 원하노라 - 무형적이지마는 이것이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제사보다 긍휼, 이것을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드라마틱한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선한 사마리아사람’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다 빼앗기고 매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서 지금 죽어가고 있다, 제사장이 제사 드리러 예루살렘에 올라가다가 그것을 보았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사람이 올라가다가 그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두 종류의 하나님의 사람들이 저 강도만난 사람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 하나가 이 불쌍한 사람을 돌보아주었다 -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입니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저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긍휼입니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왜 안 도와주었을까요? 그 사람들이 긍휼에 대해서는‘전문가’입니다. 잘 알고 또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일 해야 하고, 불쌍히 여겨야 하고, 좋은 일 해야 한다고 밤낮으로 떠벌리는 사람들입니다. 자, 이런 사람들이 왜 안돌보았느냐 - 자기들 나름의 생각에는 제사 드리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일 년에 한 번 돌아오는 제사 드리러 가는 길인데 이 죽어가는 사람 만지다가 손에 피가 묻으면 안 되거든요. 

또 어차피 죽을 사람 같은데 만지다가 죽어버리면 시체를 만진 게 됩니다. 율법에 보면 시체를 가까이했으면 일주일 동안 성전에 못 들어가게 되어 있거든요. 부정하다,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정해져 있는 이 소중한 제사를 드리러 가는 거룩한 마음, 거룩한 손으로 내가 어떻게 저런 것을 만지겠느냐, 그것입니다. 나에게는 제사가 더 중요하다, 그것입니다. 깨끗한 제사, 거룩한 제사, 신령한 제사, 이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긍휼이란 무엇이겠습니까. 긍휼이란 내가 불쌍히 여기는 자의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들은‘몰라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당신에게 창을 찌르고 침을 뱉고 고개를 내저으면서 비난하고 비방하는 엄청난 죄인들을 앞에 보시면서 높이 매달리신 채 죽어가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 말씀이“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주옵소서, 저희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알고 보면 다 몰라서 그렇습니다. 큰소리 쳐봐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저 잘났다고 하는 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새 마약을 하는 젊은이들,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래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저희가 모르기 때문입니다.’하는 마음, 그것이 바로 긍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다 부족하고 흠이 많고 잘못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생각하십니다. 저들이 유치하고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요. 안다고 하지마는 모르기 때문이다, 라고요. 참으로 불쌍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것은 주도적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책임을 내가 집니다.

「뇌내 혁명」이라고 하는 책을 보면 제 2권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자가 의사인데 의사의 할아버지도 의사입니다. 할아버지 의사가 손자 의사에게 늘 이렇게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너는 환자를 볼 때마다 속으로‘미안합니다’하는 마음을 가져라. 또 말로도‘죄송합니다’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명색이 의사인 터에 시원치 않아서 당신이 이렇게 병들었습니다. 제때에 가르쳐주지 못했고 바로 인도하지 못해서 이런 깊은 병을 얻게 했습니다. 

잘못이 내게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치료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참으로 훌륭한 할아버지인 동시에 훌륭한 의사입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참 많이 생각하며 깊이 반성했습니다. 목회를 하는 목사로 장로님이 원망스럽고, 마땅히 열심히 하고 잘할 수 있는 성도가 그렇치 못할 때 못 마땅해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생각해 보니 그것이 다 이 목사 책임이더란 말입니다. 이 교회에서 20년이란 세월이 지났고 그간 얼마나 많은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였는데 아직도 그런 모습이라니 그 책임이 이 목사에게 있는 것이 맞습니다. 가슴을 치며 회개할 뿐입니다. 죄송할 뿐입니다.

베토벤은 아주 가난하고 어려웠습니다. 먹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가난할 때가 있었는데, 그의 동생은 요새처럼 토지투기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아주 멍청한 사람이었지만 횡재를 해서 부자가 되었다, 이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형이 동생에게 편지를 썼습니다.‘내가 지금 생활이 어려우니 좀 도와주게’그랬는데 동생이 ‘형님 가난하게 사는 것은 전적으로 형님 책임입니다. 당신의 가난은 당신의 몫입니다’하고 회답하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이 편지를 받고 섭섭해서 다시 회답을 하는데 ‘네 재물도 필요 없고, 네 설교도 필요없다’했습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못사는 자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 있습니까? 부정한 자의 책임이 그 자신에게 있습니까? 감옥에 간 사람의 책임이 오직 그 사람의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긍휼이 없습니다. 그건 그 사람의 책임이 아닙니다. 어쩌면 다 내 책임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긍휼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에게 아들딸 5남매가 있습니다. 그 아들들이 다 훌륭하게 자라났는데 특별히 셋은 줄줄이 서울대학교를 나왔습니다. 대학원을 나오고 박사가 되고 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그 장로님은 늘“저는 아이들 때문에 걱정해본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한 번도 우리 아이들은 병원에 가는 일도 없습니다. 병원하고 우리하고는 거리가 멉니다.”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가만히 보니 사실입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그 부인은 초등학교도 못나왔습니다. 

겨우 한글이나 깨친 정도의 부인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을 그렇듯 잘 키웠습니다. 또 아이들이 어머니말이라면 꼼짝을 못합니다. 하도 신통해서 몇 번 물어보았습니다.“어떻게 그렇듯 아이들을 잘 가르쳤습니까?”그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가르치기는요. 제가 뭘 알아야 가르치지요. 가르친 게 없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한창 졸리는 나이에 잠과 씨름하면서 공부하느라 애쓰고, 잘 먹이지도 못하고 입히지도 못했는데 밤새워가면서 공부하는 걸 보니 불쌍해서, 불쌍해서 내가 어떻게 잠을 자겠습니까, 그래서 그 옆에 앉아 저는 그냥 책도 못보고 할 일 없으니까 뜨개질만 떴다 풀었다, 떴다 풀었다 했었지요.”아이들이 공부할 때 언제나 곁에 앉아 있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훌륭한 어머니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요새 소위 잘났다는 어머니들“너 못하는 건 네 책임이다. 학비를 안줬냐, 밥을 안먹였냐, 옷을 안줬냐? 학원을 안보냈냐? 에이, 멍청한 것”하는 어머니들과는 차원이 다르지요.‘네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사랑이 아닙니다.“미안하다, 공부하라고 해놓고 나는 놀러나갔고, 텔레비전만 보았고 ... 네가 어미 잘못 만나서 이 꼴이 되었구나”할 수 있는 마음이 긍휼입니다. 남편이 밖으로 돈다면 그거 남편 책임이라고만 생각하십니까?‘어쩌다가 상냥하지 못하고 말 한마디 정답게 할 줄 모르는 여자 만나가지고 밖으로 도느라 무척 고생하시는구만.’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어쨌든 긍휼이라는 것은, 모든 잘못이 너에게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책임을 집니다. 이게 긍휼입니다. 

노벨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가 한평생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일하는데 어떤 기자가 물어보았습니다.“수고라는 것은 그래도 가망이 있는 사람을 위해 하는 것 아닙니까? 재활의 능력을 갖춘 사람을 위해 수고해야 수고한 보람이 있는 거지 아무 소망도 없는,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당신은 왜 당신의 전부를 바치고 수고하는 것입니까?”테레사 수녀는 대답했습니다.“이들은 평생 개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아무도 그들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단 한 사람이라도 그들을 원한다고 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소망입니다.”그리고 또 참으로 귀한 말씀을 했습니다.“그들도 천사처럼 죽어갈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저들을 도와서 저들이 마음을 바로잡고, 개화하고 굉장한 사람을 만들어 보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저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빙그레 웃으면서 천사처럼 죽어갈 권리가 있는 게 아니냐고, 그래서 봉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긍휼히 여긴다고 할 때 굉장한 기대를 겁니다. 뭐 도울만한 가치가 있다 없다 따위의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긍휼이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행동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긍휼히 여길 뿐입니다. 그가 앞으로 어떻게 잘되느냐 - 뭐 이런 것, 조건적으로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눌 뿐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긍휼이 있습니다.

마무리하는 말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현절 두 번째 주일을 맞아 예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주님으로 나타나신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우리에게 보이시고 가르치시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긍휼을 보이시고 가르치시려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하신 말씀을 잘 깨닫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유명한 토마스 모어가 좀 일이 잘못돼서 무고하게 재판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때 그가 재판장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유명한 이야기로 전해집니다.“재판장님이시여, 내가 당신을 이 시간 친구라고 부르도록 허락하여주십시오.”그리고 바로 말하기를“친구여, 당신과 나는 성경에 나오는 바울과 스데반의 관계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스데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뒤에 바울은 예수를 믿습니다. 한평생 예수를 믿고, 복음을 위해 일하고, 그리고 순교했습니다. 

내가 믿기는 하늘나라에서 그 둘이 서로 만났을 때 서로가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얼마나 감격하는 만남이 있었겠습니까. 당신이 지금은 나를 죽이지마는 장차 하늘나라에서 당신과 나는 스데반과 바울처럼 친구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이 엄청난 이야기를 할 때 재판장은 말했습니다.“나는 당신에게 사형선고를 했는데 당신은 어째서 나를 친구라고 하시오?”이에 모어는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주께서 나에게 먼저 긍휼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시기에 내가 또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제사를 원치 아니한다, 긍휼이 무엇인가를 배우라 - 우리가 뭘 하느니 뭘 하느니… 큰소리칩니다마는 그치십시오. 생애의 남은 시간에는 하나님의 내게 향하신 긍휼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구석구석 내게 베푸신 그 많은 긍휼을 알고 배우고, 감격해서 또 그 긍휼을 남에게 베풀면서 남은 생을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이 원하시는 긍휼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고 깨달아 그렇게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몇 해 전의 일입니다. 나이가 좀 많이 들어서 뒤늦게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에 나온 분이 있었습니다. 한 일 년 동안 교회에 열심히 나오면서 그는‘늦게 시작을 했으니까 먼저 믿은 사람들을 좀 급하게 따라잡아야겠다’고 생각해서 본인 말대로 열심히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어쨌든 빨리 성경과 교리를 익혀야겠다해서 공부를 하는데, 성경이 어떤 말을 한 글인데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영어성경을 대조하면서 읽었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주석서도 참고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열심히 성경공부를 해 나가다가 제게 와서 묻습니다.“목사님, 성경에 보니까 긍휼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긍휼이라는 단어가 참 중요한 것같지마는 뜻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서 영어성경으로 돌아가 읽어보았더니 영어성경에는‘love’라도 되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I want your love’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렇다면‘사랑’이라고 번역했으면 간단하겠는데 그걸 왜 긍휼이라고 해서 헷갈리게 합니까? 왜‘사랑’이 아니고‘긍휼’입니까? 그래서 제가 대답을 이렇게 했습니다.‘똑같은 사랑이요 단어도 같지마는 그 개념은 서로 다릅니다. 자식의 부모에 대한 사랑이 있고,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손자손녀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이 같지 않습니다. 또 젊은사람들끼리 남녀간에 사랑하는 것, 이런 것은 수평적 사랑입니다. 부모의 자식사랑, 자식의 부모사랑은 수직적 사랑입니다. 그런데‘긍휼’이라고 하면 이는 아주 높은 위치에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긍휼이라고 합니다.”이렇게 말했더니“아하, 그렇군요. 그런 귀한 뜻이 있군요.”이렇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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