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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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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창 4:8~16)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16) 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아벨을 쳐 죽이니라

주님은 가인에게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죄에 끌려 다니고 맙니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끌려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입니다. 주님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시기심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참 사람의 생각은 이상합니다. 가인은 아벨만 없으면 하나님이 자기 제사를 받을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요? 아벨만 없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했던 것일까요? 가인이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이상 소망은 없습니다. 문제는 자기 안에 있습니다. 시기심은 모든 정상적인 판단을 흐리고 맙니다.

시기심은 상대방 뿐만 아니라 자기를 죽입니다. 시기심은 남과 비교하는 데서 나옵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생기는 미움의 감정입니다. 내가 더 큰 집에 살아야 하고, 내가 더 높아야 하고, 내가 더 유명해야 하고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 드는 감정입니다. 인간에게서 시기심은 원죄만큼 근원적이고 오래되었습니다. 인류의 DNA 안에는 가인의 이 시기심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습니다. 

어느 사막에 유명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마귀들이 그를 넘어뜨리려고 물질과 여자로 유혹하고 두려움 등으로 겁을 주었지만 전혀 요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물이나 불이나 배고픔 등 그 어떤 유혹에도 수도사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모든 마귀들이 유혹에 실패했을 때 대장 마귀가 자기가 한 수 가르쳐 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딱 말 한마디로 그 수도사를 넘어뜨리고 말았습니다. 대장 마귀는 그 수도사의 귀에 “자네 친구 아무개가 수도원 원장이 되었다네.” 하고 들려주었습니다. 그 순간 그 수도사는 “아니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며 그만 시기심에 넘어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시기심은 이처럼 다스리기 어렵습니다. 시기심이 단지 마음 안에만 존재한다면 괜찮겠지만 시기심은 분노로 바뀌고 결국 최초의 형제 살해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그런 점에서 죄의 발단에서부터 조심할 것을 요구합니다. 바로 마음과 입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라” 말씀하며 먼저 마음을 다스릴 것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2) 하여 그 입과 태도에서부터 조심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분노와 미움이 결국 살인에 이르게 합니다. 그 뿌리로부터 다스리지 않으면 시기심이 일어나고 난 연후에는 도무지 다스릴 수가 없습니다. 

시기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그 사람이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온전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시기심의 문제는 상대방을 온전한 한 인간으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그가 가진 재산만 보이고, 그가 가진 잘 생긴 얼굴만 보이고, 그가 가진 성적만 보이고, 그가 가진 인기와 영광만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간이란 것이 어디 그렇습니까? 밝은 면이 있으면 어두운 면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시기하는 그 사람은 인기는 많지만 외롭습니다. 친구가 없고 가족이 없습니다. 그는 재산은 많지만 자녀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그는 1등을 하지만 그 마음은 그 자리를 빼앗길까 늘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능력이 탁월하지만 대신 거의 쉬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가진 눈물과 상처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가 가진 무엇이 아니라, 그 인간 전체를 바라본다면 우리는 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축하하고 위로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가 가진 어두움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내 인생과 그의 인생을 바꾸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그 사람의 인생과 우리에 눈에 보이는 인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가 둘째로서 그 모든 것을 박탈당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제물을 받아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인간 아벨을 보지 못하고 그의 한 면만 보다가 결국 살인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또한 시기심이란 자기가 가진 큰 것을 보지 못하고 남의 손 안에 있는 것을 부러워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가인은 장자입니다. 부모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아벨은 이런 가인을 보며 얼마나 부러워했을까요? 가인은 마치 예수님의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과 같습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둘째에게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고 즐거워하자 큰 아들은 이를 시기하여 몹시 분노합니다.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한 마리 주어 대접한 적이 없거늘 저 못난 자식은 융숭하게 대접한다고 잔뜩 화가 나 있습니다. 

이런 형에게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충고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31-32) 큰아들은 아버지 소유가 다 자기 소유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와 항상 함께 있는 이 기쁨을 모릅니다. 또한 그가 동생을 불쌍히 여기는 아버지의 마음을 가졌더라면 시기심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많은 것을 가졌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보다는 자기 안에 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잘 개발하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그런 점에서 학교에서는 시험 성적으로, 사회에서는 물질의 성취라는 획일적인 기준으로 경쟁시키고 궁극적인 판단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회는 결국 자기 가진 장점을 보지 못하게 만들고,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고 빼앗도록 하는 가인의 시기심을 부추기는 사회가 되고 맙니다. 

또한 시기심이 나는 이유는 작은 것에 연연해 하기 때문입니다. 더 큰 것을 바라보는 사람은 작은 것 때문에 시기하지 않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큰 아들은 염소 새끼와 살진 송아지라는 작은 것을 시기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생환과 화목이라는 더 큰 것을 바라보았기에 시기심이 나지 않았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딱지 가지고 싸우고 장난감이나 게임기 가지고 싸우고 시기합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시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서는 다른 것 가지고 시기합니다. 큰 집이나 큰 차나 명품 가방이나 연봉이나 지위나 명예입니다. 목회자들은 큰 교회 건물, 성도 수, 감투나 명예로 서로 시기하고 질투합니다. 내가 어떻게 진리 안에 거하고 예수님 닮아가고 있는지를 시기할 수는 없는 것입니까?

우리 모두는 더 큰 것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기 일이나 민족을 사랑하는 자는 그보다 작은 것들에 대해서 시기하지 않습니다. 애국지사가 언제 부귀영화를 시기했던가요? 그들은 오직 민족만을 생각했을 뿐입니다. 신앙인들 또한 보다 큰 것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입니다.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큰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우리의 만족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을 닮아가는 이것이 너무 기뻐서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그가 어떤 집에 사는지, 그가 어떤 지위에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다만 그리스도가 없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그를 불쌍히 여길 뿐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없는 것을 안타까이 여길 뿐입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동생을 죽인 형 가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9)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또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두 질문은 우리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질문들입니다. 아담에게 물었던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이었고, 가인에게 물었던 것은 이웃과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할 수 있느냐가 우리 구원을 결정합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에 가인은 어떻게 대답했습니까? 

9절입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 가인은 모른다고 하고 또 자기와 이웃과는 상관이 없다며 전혀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가인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란 말은 어디선가 비슷하게 들어본 적이 없습니까? 맞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심판의 비유에서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심판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영생에 이르는 양의 부류와 영벌에 이르는 염소의 부류로 나눕니다. 그 때의 기준은 헐벗고 굶주리고 목마르고 옥에 갇힌 작은 소자에게 어떤 태도를 취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하게 살았니? 예수 잘 믿었니? 예배 잘 드리고 헌금 잘했니? 이런 것을 묻지 않습니다. 네 가난한 이웃을 향한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물으셨습니다. 

그때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마25:44) 그들은 자기들이 왜 영벌에 처하게 되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웃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변명처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 주변에 가난한 이웃이 있었다면 도와주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알았더라면 헤롯 왕과 당시 서기관들과는 달리 마구간에 태어난 예수님을 경배했을 것이고, 내가 알았더라면 주님을 외면했던 백성들과는 달리 목마른 예수님께 물 한 모금 드렸을 것이며, 내가 알았더라면 유대 관원들처럼 예수님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진리에 열려 있고, 사랑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2천년 전 팔레스타인 땅으로 우리가 되돌아간다 한들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보지 못한 이유는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많은 정보들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그 중에 우리가 인식하는 것은 일부일 뿐입니다. 관심 있는 것만 눈에 들어옵니다. 외면하면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자기 욕망에 갇혀 자기 좋아하는 것만 보려합니다. 보지 못한 것은 주변에 가난한 이웃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실상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고통으로, 외로움으로, 병으로, 장래에 대한 불안으로, 인간관계의 상처로, 물질적인 고통으로 그 영혼은 아파하고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합니다. 웃고 있어도 그 영혼은 울고 있는데 우리는 보지 못합니다. 

왜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말 한마디, 무심코 행하는 행동 하나만 유심히 보았더라도 우리는 그 영혼의 상처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는 뻔뻔하게도 가인처럼 “내가 내 이웃을 지키는 자니이까” 하고 항의합니다. 우리의 항의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심판 기준은 주변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 믿기가 복잡하지요? 그냥 예배만 드리고, 적당히 우리의 헌신을 받아주고, 또 우리가 기도할 때 가끔 응답만 해주시면 될 것 같은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좀 까다롭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일찍이 경험했던 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기 제사만  말없이 받으시는 하나님을 원했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미가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7-8) 하나님은 공의, 인자, 겸손 등 우리 이웃을 향한 사랑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웃을 향한 정의와 사랑이 없는 예배는 받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이웃이 어디 있는지, 내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대한민국은 축복받은 나라입니다. 내 아우 아벨이 눈에 뻔히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바로 북한의 형제들입니다. 요즘 통일의식 조사를 하면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서 낮은 응답이 나옵니다. 북한은 귀찮고 까다롭고 마음에 들지 않으며, 우리 남한만 편히 살면 되지 않느냐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님이 우리를 향하여 “네 형제 북한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신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 “나는 모릅니다. 북한은 나와 상관없고 우리가 북한 형제들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주님은 90년대 말에 수백만의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갈 때, 또 지금도 북한 주민의 3분의 1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데 너희는 무엇하였느냐고 질문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고사하고 지금 다른 세계의 사람들은 부유한 남한과 가난한 북한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나중에 통일이 되어 남한의 부유한 형제들의 모습을 보며, 자기 가족 중 일부를 굶주림으로 보내야 했던 북한 형제들은 우리에 대한 원망이 없을까요? “좀 잘 살면 진작 도와주지......”

저는 우리 사회에 가장 부족한 것이 바로 이 공동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고 지키려는 의식입니다. 이웃의 고통에 대해 외면하고 나만 잘살면 된다고 하는데 실상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웃을 지키지 않고 이웃을 죽였던 가인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14절입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었다” 17절에서는 자기만의 성을 쌓았다고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식이 있으면 서로 지켜주지만 이웃이 사라진 곳에서는 불안과 두려움, 의심만이 쌓입니다. 

한국사회가 이렇게 힘들어진 이유는 이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강남이라는 높은 성만 쌓았지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고 돌보는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현재 비정규직이 800만에 이르고 그들의 평균 월급은 120만원 정도에 불과합니다. 장애인만 400만 명에 이르고, 청년 실업률 또한 매우 높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들에 대해서 외면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 통계를 보니 사회복지 지출이 GDP 대비 10%로 OECD 국가 중 꼴찌입니다. OECD 평균은 23%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그러면서도 국가 경쟁력이 세계 10위권에 들어갔다고 자랑만 합니다.

우리나라 출산율 통계를 보니 1.22명으로 세계에서 꼴찌입니다. 이처럼 출산율이 낮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아이를 낳고 기르기가 비용이 많이 들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집값도 비싸고 사교육비도 많이 들어가니 누가 아이를 낳으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출산과 육아와 관련된 사회복지 비용은 OECD국가 평균의 1/7에 불과합니다. 형편이 이러한 데 아이를 낳자고 캠페인만 벌여서 되겠습니까? 이런 추세라면 40년 후에는 대한민국 인구가 400만 명 정도 감소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성장과 수출 지상주의로만 달리고 사회 복지에 소홀히 한 결과 이제는 성장 동력마저 잠식하는 처지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의 식이 옳습니다. 이웃을 배려하고 지키는 것은 결국 모두를 평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잘 살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성장, 승자독식, 경쟁 위주로만 나간다면 사회는 불안하고 성장도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가난한 이웃을 배려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부유층은 빈곤층을 생각해서 세금을 많이 내어야 합니다.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생각해 주고, 사장은 사원들을 생각해 주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생각해 주어야 합니다. 

강남은 그 외 지역을 배려해 주어야 하고, 수도권은 지방을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대형교회는 중소형교회를 생각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두 자기만의 성을 쌓고 있으니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고 불안해하는 가인의 문화만이 팽배한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공동체성의 회복은 우리 민족의 행복과 발전을 위해서도 꼭 필요합니다. “네 이웃이 어디에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은 단순한 윤리적 요청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정신적 가치입니다.

아벨의 핏 소리

아벨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형 가인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아벨은 정말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간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의 귀에는 묻혀진 것 같지만 하나님의 귀에는 그 어떤 소리보다 크게 들렸습니다. 10절입니다.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호소한다는 단어는 날카롭게 외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연약한 자들은 한숨소리를 매우 민감하게 듣습니다. 

성경에는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모습에 대해서 자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갈의 경우가 대표적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으로서 아브라함의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하갈은 이 일 때문에 사라로부터 핍박을 받고 쫓겨납니다. 하갈이 광야에서 물이 없어 부르짖을 때(창21:19) 하나님께서는 방성대곡하는 하갈과 아이의 소리를 듣고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에게 물을 주시고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축복하셨습니다. 하갈에게는 하나님이 두 번 나타나셨는데 그 때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창16:11)고 말씀하였고, 하갈은 이런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감찰하시는(살피시는) 하나님”(창16:13)이라 불렀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피부병을 앓고 부자 집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던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다만 개들만이 그 헌 데를 핥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마자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눈이요 귀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외면하지만 하나님은 정확히 그리고 큰 소리로 듣고 계십니다.

아벨은 오늘 말씀에서는 아무 말도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가인이 주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평가는 다릅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오히려 아벨이 칭찬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아벨을 “의인 아벨”(마23:35)이라 부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히11:4)라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귀이고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우리의 고통과 눈물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고 답답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그 어떤 소리보다 더 큰소리로 여러분의 신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계십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시56:8) 주님은 소리없이 흘린 우리의 눈물을 하나하나 담고 계신 분입니다.

가인의 표

하나님의 사랑은 아벨에게 뿐만 아니라 가인에게도 부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주셨습니다. 가인의 표는 옛날 사극에 보듯 이마에 죄수라고 썼던 것인지, 아니면 소설 <주홍글씨>의 간음한 여인의 가슴에 새겼던 “A”라는 글자와 같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표시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표를 해주심으로써 누구든지 가인을 죽이는 자는 그 7배에 해당하는 벌을 내리겠다고 선포하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한 번 당황하게 됩니다. 

형제를 죽인 살인자에게 죽음의 심판을 내리기는커녕 너무나도 가벼운 형벌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실상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우리는 에덴동산에서도 일찍이 경험한 바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당장 죽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흉악한 살인자에 대해서 너무 관대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한 단서를 우리는 4장 1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나님은 엄격한 정의의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냉정한 신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인을 낳은 아버지이자 어머니와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자기 아들이 아무리 살인했다고 하여 무정하게 버리고 심판을 내리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사건들이 급격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고통과 사랑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가인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가인의 표가 주어져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 말씀하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것은 다만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계속 하나님을 떠나 살며 이웃을 외면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이 자신의 성을 허물고 에덴으로 돌아오시길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셔서 죄악의 성에서 돌이킬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할 때만이 불안한 삶에서 해방되고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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