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을 향한 갈망 (시 42:1~11)

  • 잡초 잡초
  • 638
  • 0

첨부 1


하나님을 향한 갈망 (시 42:1~11) 
 
 
시편 42, 43편은 대다수의 히브리 사본에서 한 편의 시로 묶여있습니다. 이 시편들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이 시인이 되어 함께 이 시편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1) 나의 영혼은 타는 목마름으로 갈급하게 주님을 찾습니다. 그 모습이 헐떡이며 시냇물을 찾는 사슴 같습니다. 열성 체질의 사슴은 목마름이 엄습하면 오직 물을 찾아 헤맵니다. 하지만 중동의 사막에서 시냇물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작열하는 땡볕 아래서 사슴이 울부짖습니다. 무거운 몸을 지탱하는 가는 다리가 파르르 떨립니다. 목마름에 지친 사슴은 앞발로 땅을 파다가 눈을 부릅뜬 채 거꾸러집니다. 나는 한 모금의 물을 찾지 못해 쓰러진 사슴들을 목격했었습니다. 그 모습이 오직 하나님만을 갈급하게 찾고 있는 내 모습을 투영한 것 같기만 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2) 내 영혼이 갈망하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입니다. 생각 속에만 존재하는 관념이 아니며 불러도 대답 할 수없는 우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교통하며 교제할 수 있는 살아계신 분입니다. 목마름을 해갈하는 한 모금의 생수처럼 하나님과의 만남은 죽어가는 영혼을 소생시킵니다. 하지만 나는 그분 곁에 가까이 나아갈 수 없는 처지입니다. 생명이신 그분과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친근함이 사라진 단절로 영혼은 피폐해졌습니다. 생명의 고갈을 느낍니다. 영혼에 사무치는 사모함으로 이제는 한 순간이 한 순간이 버거워 견디기 힘듭니다.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3).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와 격려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온종일 조롱당합니다. 나의 가련한 몰골을 보면서 사람들은 ‘네 하나님이 계시기나 하냐’고 비웃습니다. 사람들은 쓰러진 사슴을 둘러싼 하이에나 떼같이 무정합니다. 빈정대는 말들이 번뜩이는 송곳니처럼 나의 영혼을 파고듭니다.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을 물어뜯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저항할 힘이 없습니다. 목청껏 소리 질러 울 기력조차 없습니다. 가여운 눈망울에서 눈물이 주르르 떨어집니다. 낮에도 밤에도 남몰래 눈물만 삼킬 뿐입니다.

나는 행복했던 지난날들을 회상합니다.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4). 환호성을 지르며 찬미 소리 드높였던 축제 행렬들,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전에 이르던 일들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나의 입에 미소가 잠간 번집니다. 하지만 이내 가슴이 미어집니다. 함께 예배했던 그들이 지금은 입을 삐죽이고 있습니다. 추억과 비교되는 고난의 현실로 마음 가득 슬픔이 북받쳐 오릅니다. 마음이 상한다는 말은 영혼이 쏟아진다는 뜻입니다. 나는 탈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나는 생명의 기운을 소진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절망의 바닥에서 나의 신앙적 자아가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5). 나는 낙심과 불안 속에서 마냥 녹아내리고 있는 불신적 영혼을 책망합니다. 어찌하여 우울하게 신음만 하고 있냐고 질책합니다.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숙인 고개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도록 권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를 베푸실 때 ‘얼굴을 비춘다’고 표현합니다. 나는 한없이 무능하고 무력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은혜로우십니다. 그분은 당신님을 앙모하는 자를 완벽하게 구원하시는 구원자시며 나의 하나님입니다.

나는 낙망 속에서 주님을 기억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6). 1절의 “하나님”이 드디어 “내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나는 제 삼자 같이 멀게 느껴졌던 그분이 지금은 친밀한 관계로 다가옵니다. 그분은 성소에서만 나와 함께 계신 분이 아닙니다. 성소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방황하며 헤맬 지라도 나와 함께 계시는 내 하나님입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먹이 자식을 잊겠습니까?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가여워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그분은 결코 나를 잊지 아니하십니다(사 49:15).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폭포같이 덮쳤고 나는 그 속에 엄몰되었습니다.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7). 낙심의 때에는 급류를 타고 내려오는 강 상류의 작은 물줄기조차 폭포같이 느껴졌습니다.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재앙 속에 매몰된 것 같았습니다. 둘러싼 모든 환경이 나를 공격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기억해보니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셨습니다. 밤에도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셨습니다(8). 이제도 내 하나님은 번영하는 밝은 날에 자애를 베푸실 것입니다. 재앙같이 어두운 날조차도 찬송하게 하실 것이며,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실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하소연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9). 반석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실 리 없다는 것은 잘 압니다. 언젠가는 힘겨운 이 날들을 돌아보고 감사하며 찬송하게 될 것도 압니다. 하지만 고통스런 현실을 보면 꼭 나를 잊으신 것만 같습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비방하는 대적의 소리는 “내 뼈를 찌르는 칼”(10)같습니다. 내 고통도 고통이지만 하나님께서 나로 인해 모독 받으시는 것을 참기가 힘듭니다.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 어린애처럼 매달리고 싶습니다. 뼛속까지 저며 드는 아픔에 신앙적 자아보다는 본능적 자아가 반사적으로 반응합니다.

나는 다시금 낙망과 불안 속에 있는 영혼을 꾸짖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11). 녹아내리며 신음하던 내 영혼이 절망의 심연으로부터 바닥을 차며 솟구쳐 오르듯 하나님을 향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며 나의 찬양이십니다. 그분을 바라고 사모할 때 절망의 밑바닥에서도 희망이 싹틉니다. 그분은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이십니다. 5절의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라는 표현을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으로 바뀌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과 더욱 신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인과 동화되어 시를 묵상하면서 지난 한 해 우리네 삶이 이와 같았음을 생각합니다. 한 마리 목마른 사슴처럼 한 없이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서, 삐걱거리는 인간관계로 인해서,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현실문제들로 인해서, 불안한 장래 문제를 인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해 왔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신앙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 같은 때도 있었습니다. 고독과 외로움 속에서 사람의 위로와 격려를 기대할수록 돌아오는 것은 실망과 상처뿐이었습니다. 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는 능력과 지혜가 부족할 때마다 하나님을 갈망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저 눈물지으며 하나님을 앙망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망하게 되었구나 생각할 때마다 피할 길을 주셨습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부닥치는 문제들로 영혼이 녹아내릴 때마다, 마음이 무너질 때마다 그분은 우리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서 ‘어떻게 이런 일이’라고 하소연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일들을 통해 한 걸음 더 하나님과 친밀하게 하셨습니다. 더 이상 걸을 힘이 없을 때 붙잡아 주셨습니다. 내가 걸어가는 길이 때로는 굽어 도는 것 같을 때가 있었지만, 그분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를 지켜주시며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나의 고통에 무관심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 앞에 섰을 때, 괴로움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성숙한 신앙적 자아로 행동하기보다 본능적으로 반응합니다. 때로는 그 모습이 전혀 하나님 자녀답지 못하고 하나님 백성답지 못해서 조롱당합니다. 조롱당할 만한 일을 했다는 사실에 절망스럽습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 부끄럽고 송구합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벗어나보려고 하지만 천박한 인격의 수준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내 신앙의 바닥을 확인하는 일에 강한 원수가 동원될 필요가 없습니다. 한 모금의 물 때문에 죽는 사슴처럼 한 마디의 말 때문에 사경을 헤매기도 하니까요. 세속적 욕망을 포기치 못하는 위선된 내 모습을 한 번만 비취주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목마름을 느낀다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살아있다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시인은 갈망하고 낙심하며 좌절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깊은 신앙심을 의심받지 않습니다. 약해졌다 강해졌다 하면서도 그의 신앙은 살아있습니다. 오히려 목마름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증상이 심각하지요. 일 년이 지나도록 은혜에 목말라 보지 못한 사람, 한 번도 마음이 무너져본 일이 없는 사람, 나로 인해 하나님께서 비방 당하심을 몸부림치며 괴로워해 본 일이 없는 사람, 과연 내가 걷는 길이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지 회의적인 생각에 시달리면서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울부짖으며 하나님께 매달려 본 일이 없는 사람이 문제지요.

어린아이는 엄마를 잃었을 때 불안에 떨며 엄마만 찾습니다. 그때는 장난감도 과자도 소용없지요. 하지만 울어도 관심 가져 줄이 전혀 없는 자라면 울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을 독하게 하여 이를 악물고 참겠지요. 우리에게는 마음껏 울며 매달릴 수 있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지난 한해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필요들을 채워주셨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눈물이 변하여 찬양이 되고 낙심이 변하여 감사가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한해 감사제목들을 나누며 마음껏 그분을 찬양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