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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령한 집을 세우는 사람들 (벧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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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집을 세우는 사람들 (벧전 2:1~5)


우리 교회는 지난주일 새생명축제를 통하여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필립얀시가 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라는 책에서 필립얀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영미권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며 저술가입니다.    이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그 책에 있는 한 이야기를 인용하려고 합니다.  

영국에서 열린 비교종교학 회의에서 세계 각국 전문가들이 모여 기독교 신앙의 독특성을 찾아 토론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답을 하나씩 지워갔습니다.  성육신?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한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도 있다. 그것이 기독교를 말할 수 있는 독특성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부활?  죽은 자의 환생 기사 역시 다른 종교에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것,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비교종교학회의 토론이 길어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C.S 루이스(클리브 스태플스 루이스 Clive Staples Lewis)교수가 방을 잘못 찾아 들어왔습니다.  루이스는 옥스퍼드대학의 교수이며, 우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기독교 변증가이며, 작가, 비평가, 영문학자입니다. 그는 “회의자를 위한 사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루이스가 말했습니다.  “토론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그의 질문에 동료들이 대답하였습니다.  “전 세계 많은 종교 중에 기독교만이 기여할 수 있는 바를 찾고 있습니다.” 그 때에 루이스는 “그거야 쉽죠. 은혜 아닙니까?”라고 했습니다. 얼마동안 토론이 계속되었지만, 참석자들도 루이스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값없이, 조건 없이 우리를 찾아오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무한한 은혜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란 인간의 모든 본성과 종교성에 반대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고행을 말합니다. 힌두교의 업보를 말합니다. 유대교의 언약을 강조합니다. 이슬람교에서는 법전대로 살아가라고 합니다.    이들 모두가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받는 것은 우리 기독교뿐이 없습니다.  

‘은혜’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은혜란 받을 자격이 없는데, 일방적으로 조건 없이 베풀어지는 사랑’을 말합니다.  우리는 이 사랑, 이 은혜로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엡2:8-9의 말씀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중에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데, 세상에 사랑할 사람이 나 한 사람밖에 없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하나밖에 없으신 그 아들 독생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하는 저주와 심판을 아들 예수님으로 대신 받게 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의 호의를 선물로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2000년 전에 죽은 예수님이 나를 위하여,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믿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우리의 지성이 아니고, 우리의 선행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히브리서11:6에서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을 힘써 찾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고 복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알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일생을 사시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마지막 역작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가꾸어갈 수 있는 사람을 만드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 당신의 모양을 가진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를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할 때에 악이 없고, 선만을 추구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드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이나, 나무나 흙과 같이 움직일 수도 없고, 자기의 의사를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물질로 창조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진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신학자들 중에는 변증학을 연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이단으로부터 기독교를 변증하고, 무신론자들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선하신 하나님이 선한 세상을 창조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일만 할 수 있게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는 이들이 변증가들입니다.

성 어거스틴이란 분은 유명한 교부요, 4세기 최고의 신학자입니다. 그 분으로부터 가톨릭 신학이 수립되었고, 기독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인간을 이해하면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자유의지란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현대 변증가들은 어거스틴이 말한 ‘자유의지’라는 말을 변증학의 용어로 가져왔습니다.  이 신학을 깊이 살펴보면,  하나님은 지금까지 만드신 어떤 피조물보다 뛰어난 존재, 모든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기로 하셨습니다.  그래서 만물의 영장으로, 만물의 으뜸으로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만물을 만드셨는데, 어떤 것이 보다 더 훌륭한 창조물입니까?  여기 그냥 움직일 수 없는 돌이 있습니다.  그리고 도망갈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돌이 훌륭한 창조물입니까?  아니면 도망갈 수 있는 말이 더 훌륭한 창조물입니까?   당연히 도망갈 수 있는 말이 도망갈 수 없는 돌보다 더 훌륭한 창조물입니다.  

이제 이런 논리를 인간에다 적용해보십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 그리고 자기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사랑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하나님은 만드셨습니다.   하나의 기계나 로버트를 만드신 것이 아니고, 돌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인형이 아니라, 동물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가 자원하여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무조건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선을 행하고, 일방통행식으로, 오로지 하나만 선택할 수 있는 그런 존재로 지으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갈 수 있는 길이 오직 한 길이라면, 그런 일방통행식의 인간이라면 동물이나, 일반 생물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에 세계 모든 인간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고, 선한 일만 할 수 있도록 창조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고의 인간을 만들기로 하셨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선을 행할 수도 있고, 악을 행할 수도 있고, 좋은 일을 선택할 수도 있고, 나쁜 일을 선택할 수도 있는 그런 훌륭한 작품을 지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외람된 말이기는 하지만, 죄를 지을 수도 있는 인간으로 지어주신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은 최고의 피조물을 만드셨는데, 사람에게는 자유의지를 부여하셨습니다.  처음부터 죄와 악의 가능성을 가진 인간, 그러나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런 결단의 존재로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노예의지를 가지고, 다른 것은 택할 수도 없기에 기계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원치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며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하나님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믿음을 기뻐하시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교회에서는 은혜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데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주시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나로서는 일생에 걸쳐 갚을 길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교인들은 천차만별입니다.  다 같은 분들이 아닙니다.  쉽게 신앙이 좋다, 모자란다, 나쁘다, 그렇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이름만 교인이지, 거듭남의 확신도 없고, 구원의 확신도 없이 교회만 출석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성경은 장식품으로 가지고 있고, 오래 다니다 보니 직분도 받았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깊이 읽거나 연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기도는 건성입니다.  눈만 감았다 떴다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를 진솔하게, 알몸을 드러내놓고 더러운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합니다.  그는 적당히 종교생활을 즐기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함께 좋은 시간을 가지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과 사회를 봉사하고, 일주일에 한번 목사님의 말씀을 들어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에 대하여 위안을 받는 것으로 족한 교인들입니다.  이런 명목상의 교인생활을 청산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영적으로 자라지 못하는 ‘미성숙한 교인들’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육신적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있는데, 신앙의 세계에 깊이 들어오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는 이들입니다.  어린아이의 신앙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일생 부족하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자의 길을 걸어가는 온전한 사람들, 성숙한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서에서 제자라는 말은 12제자들에게만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도행전의 교회 시대에 들어오면서 12제자는 사도라고 불렀고, 교인들은 모두다 제자라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제자라는 말에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것은 물론이고, 주님을 따라가며, 주님의 남은 사역에 헌신하며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이들을 제자라고 했습니다.   

제자라는 용어를 광의적으로, 넓게 사용한 사람은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아주 많이 사용되던 제자라는 말이 서신서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서신서의 저자들이 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 헬라 사회에서는 철학자들이 많이 있었고, 그들은 모두다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을 제자라는 말로 사용하면 기독교를 하나의 철학사상으로 오인하고, 기독교 전파에 지장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여 제자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서신서에는 “성도를 온전하게 한다”, “온전한 사람을 이룬다”, “완전한 자로 세운다”,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런 말을 성숙한 사람, 준비된 사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명목상의 기독교인에 머물지 말고, 미성숙한 교인에서, 이제는 한 단계 도약하여 제자의 길,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 베드로전서는 새신자들에게 읽게 하였던 성경이었습니다.  특별히 세례 받은 성도들에게 필히 권하는 성경이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새 신자들과 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베드로전서를 읽게 하였습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는 젖과 꿀을 먹게 하였고, 촛불을 주면서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였습니다. 

1. 자라기 위해서는 버릴 것이 있습니다. 
1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쉬운 번역으로 읽어보았는데 “그러므로 여러분은 모든 악과 거짓을 버리십시오. 위선자가 되지 말고, 시기하며 험담하는 자가 되지 마십시오. 여러분 삶 가운데서 이 모든 것을 없애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유명한 고전1311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 하셨습니다.  

2. 자라기 위해서는 사모하여야 합니다. (2-3)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더욱 그리하라.”

2절 말씀에 "구원에 이른다"고 하였는데,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는데 또 무슨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까? 우리 모든 성도들은 신령한 젖을 사모하면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받았습니다. 이제는 구원에 이르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미 받은 구원은 무슨 구원이며, 이제부터 이루어야 하는 구원은 무슨 구원입니까?  먼저 받은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는 칭의, 의인이라는 말입니다.  이제부터는 성화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화(聖化)라는 말은 성령의 역사로 죄와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의 속성과 같이 거룩함에 참여하는 자로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님 안에서 살면서 성결케 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에 참여하면서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죄에서 해방된 사람은 죄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며, 거룩한 제물, 산 제물이 되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하고,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야 하고, 완전한 인격으로 나아가라고 하셨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은 자라가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3:18절 마지막 구절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3. 신령한 집을 세워야 합니다. (4-5)

4절에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께 나아가자.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요즈음 주택을 건축하는 것을 보면 얼마나 잘 짓는지 모릅니다. 어느 집을 가보면 잘 지은 집과 허술하게 지은 집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아라는 집, 인격이라는 집을 세우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하나님의 집, 신령한 집을 짓는데 산 돌로 집을 지으라고 합니다.   산 돌은 우리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비유하는 그 돌은 사람들에게는 버린바 되었지만, 하나님은 그 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시고 신령한 집을 지으셨습니다. 

이 신령한 집은 하나님의 집이요, 이 신령한 집은 주님의 몸인 교회요, 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이 신령한 집이란 곧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격이요, 성숙한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4.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4-5)

5절을 다시 봅니다.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신령한 집을 세웠으면 그 집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는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스스로 결단하고 책임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하는 일꾼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집에서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강론하고, 백성들의 신앙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지은 죄는 마치 자기가 지은 죄인 것처럼 아파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속죄의 제사를 지내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 각자가 알아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천국을 건설하는 주역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할 일이 있는 사람이요, 이제는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려서 하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꼭 해야 할 일만 골라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하면 죽어도 하고, 하나님이 섭섭하실 일이라고 하면 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자라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커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엡4:13절에서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엡4:15에서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 15)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버릴 것들을 찾아 오늘 버리고 가셔야 합니다. 어떤 악한 것들은 모양이라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려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 좋지 않은 습관은 버리세요. 하나님 앞에 서실 때에 부끄럽지 않아야 합니다. 

실존주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엘 케골’은 “나는 죽지 않으려고 숨을 쉰다.”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고 싶으면 기도하시고 말씀보시고 그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을 쳐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살고 성장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갓난아기들처럼 신령한 젖 곧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면서 예수님의 인격에 까지 신령한 집을 건축하며 자라야 합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버릴 것이 있습니다. 자라기 위해서는 신령한 말씀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집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는 거룩한 제사장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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