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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행 20: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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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사도행전 20:33~35


금실이 좋은 유대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한 쌍의 원앙 같은 부부였습니다. 그런데 불행이 찾아왔습니다. 결혼 후 10년이 되어도 아기가 없으면 이혼하게 되어있는 유대인의 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 부부는 정말 사랑하고 있었기에 서로 헤어지기가 싫었습니다. 하지만 법을 지켜야 한다는 주변 가족들의 극성으로 할 수 없이 이혼해야만 하는 아픈 현실을 맞이합니다. 

부부는 랍비를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좋은지를 물었습니다. 랍비는 딱한 이들의 사정을 듣고 그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랍비가 가르쳐 준 대로 마지막 만찬을 준비하고 모든 가족들을 불러 모으고 남편이 그 동안 살면서 아내의 좋았던 점을 하나하나 이야기 합니다. 듣고 있던 모든 가족들이 감동을 받을 만큼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때 남편이 랍비에게 들은 질문을 아내에게 합니다.“마지막으로 헤어지는 마당에 당신에게 우리 집에서 가장 좋은 것 하나를 주고 싶소.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하나 주겠소.”그리고 그 질문에 아내도 랍비가 일러 준 대답을 합니다.“내가 당신 집에서 가장 가지고 싶은 것은 딱 하나입니다. 그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나는 당신 하나면 됩니다.”결국 모였던 모든 가족들이 이 부부에게 더는 이혼하라고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결코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사람이 혼자라는 사실만으로 이미 불행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내가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줄때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때 내가 느끼는 행복감이 가장 크다고 합니다. 이것이 행복의 법칙인데 우리는 잘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의 행복이 우선이요, 자신의 행복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다지만 다른 사람의 행복이 곧 자기의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최근에 나온 책 중에<그 청년 바보의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고려대학교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입대해서 33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유행성출혈열로 사망한[안수현]이라는 한 젊은 의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추천사의 글처럼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명망가나 의료계의 권위자도 아니었고 학계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의학자도 아닌 거저 평범한 의사였던 청년입니다. 그렇지만 아주 예수를 잘 믿는 청년 의사였고 그가 예수그리스도의 정신으로 환자를 돌보고 사랑했던 이야기를 생전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엮어 놓은 책입니다. 

그 책을 보면서 모든 의사들의 맹세와 서약이 그랬겠지만 좀 특별한 의사의 정신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애썼는지 또한 환자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여느 의사들이 다 그렇겠지만 그래도 뭔가 다른 열정으로 다가오는 느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읽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게 합니다. 그의 행복을 위해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책입니다. 주면서 행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청마[유치환]시인의<행복>이라는 시는 세대를 막론하고 널리 읽혀지는 시입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연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보내는 애틋한 심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부분으로 유명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여러분, 상식적으로 사랑 받는 것이 행복입니까? 사랑하는 것이 행복입니까? 사랑 받는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사랑에 대한 가치관을 물어봅니다. 여러분은 사랑을 받을 때가 행복합니까?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에서 행복한 것입니까? 시인의 고백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진정한 행복은 내가 그를 사랑한다는 데 있다고 합니다. 물론 사랑을 받는다는 것도 분명히 행복입니다. 사랑 받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 받아서 얻는 그 행복보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데서 오는 행복은 그 기쁨의 차원이 비교될 수 없이 다르다고 합니다. 자, 받는 다는 것과 준다는 것에는 깊이 생각해 볼 오묘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아주 의미 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전도여행을 하는 중에 에베소에서 떠나 마게도냐로, 그 후 드로아를 거쳐 밀레도에 도착해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입니다. 그 가운데 주목하게 하는 말씀이 35절에 있습니다. 보면“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바울은 예수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하신 말씀을 자기의 귀로 직접들은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오늘 인용한 이 말씀 그대로를 복음서에 찾아봐도 없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비슷한 말씀은 얼마든지 있고 그 정신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으로 봐서 오늘 이 한마디는 구전 된 예수님의 말씀임에는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주는 것과 받는 것, 어느 쪽이 복되다고 하십니까? 주는 것과 받는 것, 예수님은 어느 쪽을 기뻐하십니까? 이 말씀을 보는 오늘 우리들은 과연 어디에 행복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스스로 한번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마냥 받는 것만 복이 있고, 더 가지는 것만 복이 있는 줄로 알고 있는 우리들의 상식과 가치관을 뒤집어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분명히 주는 것과 받는 것이라는 대립 되는 두 가지를 놓고 주는 것의 그 결과에서 복을 얻으라고 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우리는 보편적으로 이 두 가지를 복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먼저,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복이란 어떤 것입니까? 가지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까? 잃어버리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까? 통상적으로는 내가 얻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내가 가지는 것, 그것도 더 많이 가지는 것을 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빼앗아서라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 과정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빼앗든, 강도짓을 하든 심지어는 도적질을 하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결과를 놓고 복이냐 저주냐를 판가름 하려고합니다. 결과가 가졌으면 복이요, 못 가졌으면 복이라는 생각조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행복은 가진 자의 것이라는 논리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못 가진 자는 당연히 불행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고 공식화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마치 운명처럼 나는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불행해도 된다는 자포자기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건 문제 있습니다. 이런 좋은 말이 있지요.“가난은 불행이 아니라 조금 불편할 뿐이다.”분명히 소유와 행복은 별개입니다. 

또 하나의 복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주는 자의 행복이 있습니다. 주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행복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주는 것 자체가 기쁨입니다. 무엇을 주었느냐, 얼마를 주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주었다는 것만으로 기뻐할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의 행복은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 주는 자만이 아는 행복입니다. 그리고 이 행복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많아서 주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만 저가 더 기뻐하는 것을 보니 주어서 내가 행복합니다. 보세요. 이 주고자 하는 마음이란 게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마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것이 복입니다.
 
사람의 불행이 무엇이냐 하면 빼앗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불행한 것입니다. 뭐 하나 줄때 마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주지 못하고 꼭 빼앗기는 기분으로 줍니다. 때로는 체면 때문에 주기도 하고, 무엇무엇 때문에 할 수 없이 준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줄 수 있는 것들이고 또한 마땅히 주어야만 하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먼저 주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주는 것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마지못해 주면서 그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게 행복일 수 있겠습니까? 

또 의무감에 매여서 주는 것도 썩 행복한 것이 못 됩니다. 추호의 주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 나에게 주어진, 내 명성에 걸 맞는 의무를 행해야하기에 하는 수 없이 내어 준다면 그 마음에 무슨 기쁨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사람이 한 평생을 이렇게 늘 빼앗기는 마음으로 산다면 이 사람 도대체 언제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중요한 한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준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거기에 말할 수 없는 쾌감이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은 자유 함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무엇을 받으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받았으니 뭐라도 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자란 시골에서는 고구마를 삶아도 옆집과 나누어 먹고, 옥수수를 삶아도 옆집과 나누어 먹는 정이란 게 있었습니다. 그

런데 옆집에서 무엇을 가져 올 때 마다 저희 어머님이“빈 그릇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다.”그러시면서 꼭 뭔가를 담아서 보냅니다. 하다못해 김장김치 한 포기라도 꼭 담아 보냅니다. 받은 빈 그릇을 그대로 보내는 게 아니라는 것이 우리 어른들의 정서요, 마음이었습니다만 하여간 받는 다는 것이 때로는 줘야한다는 부담으로 적용할 때가 많습니다. 사랑 받는다는 것은 사실 한편으로는 좋은 것이지만 받은 사랑만큼 반드시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것입니다. 그래서 주는 자만이 언제나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유 함, 그것이 곧 복입니다. 중요한 얘깁니다.

세계적인 부자였던[록펠러]는“어느 정도 벌면 만족하겠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웃으며“1달러만 더 벌면 만족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1달러를 더 벌었을 때에 거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돈을 벌어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43살에는 미국의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다 55세 된 어느 날 암에 걸리게 되고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게 됩니다. 

눈앞에 캄캄해진[록펠러]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병원 복도를 쳐다봤을 때 벽에 걸려 있는 문구가 눈에 들어 왔습니다.“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그 문구에 그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그때 병원 한구석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서 가봤더니 환자인 여자 아이는 구석에 앉아 울고 있고 병원비가 없어 입원을 시킬 수 없다는 병원 측과 아이를 입원시켜 달라는 부모의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를 본[록펠러]는 갑자가 가슴 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기운을 느꼈습니다. 머릿속에 강렬한 깨달음을 얻은[록펠러]는 즉시 비서를 불러서 자신의 이름을 절대로 밝히지 말고 여자 아이의 입원비를 대신 지불하게 합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병원을 찾은[록펠러]는 회복된 여자 아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록펠러]는 그 순간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기적 같게도 자신의 암도 회복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때부터[록펠러]는 나눔의 삶을 살았고, 무려 43년이나 더한 98세까지 장수하고 생을 마쳤습니다. 지금도<록펠러재단>은 그의 정신으로 인류복지 증진을 위해 많은 이들을 돕고 있는 단체입니다. 그는 인생을 마감하는 자리에서 남긴 말이“삶이 이렇게 행복한 것인 줄 미처 몰랐다. 내 인생의 나머지 43년은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과정이 몇 년입니까? 아니 몇 년 남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남은 인생에 아직도 받을 것만 남아 있습니까? 받은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나요? 나머지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오늘 사도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33절 말씀입니다.“내가 아무런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바울은 청렴결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34절에 말하는바와 같이 손수 천막을 만들어 비용을 마련하고 일행들과 함께 썼다고 말합니다. 바울도 물질에 욕심을 내었다면 더 벌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벌었다고 자기만 쓴 것이 아니라 나누어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행복입니다. 복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나를 본 받아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만큼의 삶의 모습을 보여준 사도바울의 당당함은 오늘 우리를 부끄럽게까지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비록 바울이 인용한 말씀이지만 주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우리는 얼마까지 받으려고 합니까? 얼마를 더 가져야 다 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얼마든지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와 언제든지 줄 수 있는 신앙의 여유를 기지고 살아간다면 진정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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