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너희가 죽으면 살리라 (요 12:24~26)

  • 잡초 잡초
  • 6402
  • 0

첨부 1


너희가 죽으면 살리라 (요 12:24~26)

     
오늘 읽은 본문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따라 오늘 아침에는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좋은 아침인데 죽음이라는 주제가 너무 어둡지 않느냐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고 깨면 날마다 사고와 사건 그리고 전쟁과 질병으로 인한 죽음 소식을 들으며 살고 있습니다. BBC 방송 뉴스를 들을 때마다 거의 매일 아프칸에 파견된 영국 군인들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지금 죽기에는 너무 젊고 아까운 나이의 사람들이 머나먼 이국 땅에서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물론 그 자리에는 아프칸 본토 사람들의 더 많은 죽음이 있지만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을 뿐입니다.    

스와인 플루의 위력은 전 세계를 긴급상황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매일 아침 신문에서는 어디서 몇 사람이 죽었고 지금까지 몇 사람이 죽었다는 통계를 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죽음과 죽음 소식은 언제나 내 곁에 있고 나에게도 언젠가는 찾아오는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 중에 죽지 않을 분 있나요? 누구에게나 찾아오게 될 죽음은 너무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고 무시하며 살 수도 없습니다. 죽음이란 일찍 찾아오고 더디 찾아오는 개인 차이는 있지만 빈부귀천을 물론하고 누구나 한 번은 경험해야 할 일이고 피할 수 없이 맞아들여야 한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평합니다. 다만 어떤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는 개인의 문제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감지하셨을 때에 제자들에게 십자가의 도를 가르치기 시작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는 곧 고난과 죽음의 길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새로운 삶의 길입니다. 마태와 마가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마16:24,25;  막8:34, 35; 눅9:23, 24)고 하셨고, 요한복음에서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는 심고 거둠의 자연법칙을 비유로 죽음과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면 잃게 될 것이지만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할 것이다’는 말은 예수님만 하신 것은 아닙니다.시대는 서로 다르지만 ‘죽기를 각오하면 살지만 살려고 요행을 바라면 죽을 것이다’ 는 비슷한 명언들이 역사의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필사즉생’(必生卽死) ‘필생즉사’(必生卽死)  혹은 ‘필생즉사’(必生卽死)  필사즉생’(必生卽死)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중국의 전국시대 병법가 오기라는 사람이 쓴 오자병법(吳子兵法)에서,「.....必死則生(필사즉생),幸生則死(행생즉사)....」라고 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요, 요행히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오” 라는 말인데 이 명언이 변형되어  '죽기를 각오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라는 뜻을 지닌 ‘필생즉사, 필사즉생’(必生卽死 必死卽生), 혹은  ‘생즉필사(生則必死) 사즉필생(死則必生)’  등의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이 말을 인용하여 ‘必死則生(필사즉생),必生則死(필생즉사), 즉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전선 12척으로 왜선 133척과 맞서 싸워야 하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장수들을 소집한 충무공은 절대적으로 열세인 전투력을 정신력으로 극복하기 위해 "살고자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전쟁에 임할 때 살고 싶어 움츠리고 목숨을 부지하려는 자는 전쟁에 패배할 것이고, 죽을 각오를 다해 싸우는 자는 승리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오자병법과 충무공의 말은 영적 싸움터에 나와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일맥상통하면서 한편으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군사로 모집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전투부대의 총사령관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휘 아래 세상이라는 영적 싸움터에서 싸움하는 사람들입니다.  싸움은 싸움이로되 세상의 싸움과 성격이 다르고 상대가 다른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적들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어두움의 영들과 치열하게 싸워야 하는 싸움입니다.    

내 몸을 사리고 내 생활의 편안함을 위해 귀찮음과 희생을 꺼려하는 군사는 어찌하든지 살려고 몸을 움츠리지만 결국 영적 싸움에서 죽고 맙니다.  살고자 하면 죽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적 군사들은 죽음을 두려워말고 싸우는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영적전투는 세상의 전투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상의 전투는 상대방을 죽이고 내가 살아남지만 영적 전투는 먼저 내가 죽어야 싸움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죽었는데 무슨 싸움을 더 싸울 수 있느냐구요?  그것이 영적 싸움입니다. 내가 펄펄 살아있고서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싸울 수 없습니다.     

전쟁터로 나가는 군인은 먼저 고된 훈련을 통과하고서야 군인다운 군인으로 준비됩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군사로 부르심  받은 사람은 먼저 죽음을 통과해야 강한 군사로 싸우게 됩니다.  예수께서 ‘죽어야 산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죽음을 통과해야 합니까?  자신을 이기는 죽음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자기 부인은 나를 비움이요, 나의 옛 사람을 버리는 단계입니다.    

내가 죽어야 한다 또는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nothing으로 솔직하게 인정함입니다. 나를 something으로 나타내 보이고 싶은 그 마음을 내려놓는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조차 우쭐대고 싶은 나를 비우고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심입니다. 내 욕심, 자존심, 자만, 자랑, 이기적인 마음, 공명심, 내 마음에 앙금처럼 가라앉아 틈만 나면 뒤집혀 올라오는 수많은 상처들 그리고 더럽고 부끄러운 죄성까지...  나를 부인하고 날마다 죽는 삶을 가리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내가 어떻게 2천년 전 예수가 달린 십자가에 함께 달릴 수 있습니까? 예수께서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실 때 나의 죄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믿음고백이 곧 나의 죽음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는 나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죽음의 형벌을 받을 사람이지만 예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 죄가 더 이상 나를 영원한 죽음에 가두어 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로 인하여 구원을 얻었고 주 안에서 새 생명을 가집니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함은 나의 옛 사람이 죽고 주 안에서 새 생명을 얻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나의 옛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고 이제 나는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삶을 살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경험하고 새 생명을 얻은 새 사람입니다.    영적 군사가 되어 죄와 싸운다는 말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의에 대하여는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었다 함은 죄에 대하여 반응하지 않는 사람, 아니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죽었으니 어찌 거기에 생명이 있겠습니까? 전에는 죄에 대하여 수시로 반응하고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옛 사람이 죽은 후에는 죄를 멀리합니다. 아니 죄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지 못합니다. 아주 죽었기때문입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세상은 싸움터입니다. 생존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일등이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강박관념을 진리로 믿고 죽기살기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전쟁터입니다.    친구도 우정도 없고 나에게는 오직 경쟁상대만 있을 뿐입니다. ‘전쟁에서 2등은 없다.  오직 1등만 살아남는다 ’는 구호를 외치며 경쟁사와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 거짓과 술수라도 동원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전투자세로 세상을 삽니다. 이런 싸움이야말로 내가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는 이기적 싸움이며 결국은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예수께서 ‘죽어야 산다’고 말씀 하심은 다른 사람을 죽여야 내가 산다고 하심이 아닙니다. 세상은 남을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 합니다. 내가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땅에 떨어져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자신을 죽음에 넘기움으로 많은 사람을 구원하신 예수께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으신 모델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 예수를 섬기고 따르는 삶을 산다고 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 받는 것이요  그분이 가신 길을 뒤따름입니다.     

한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본받은 순교자들이 거룩한 피를 흘린 터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일제가 식민정치를 하던 시절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습니다. 기독교계가 이에 항의하고 거부하자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라는 말로 선동하였고 많은 교인들이 신사참배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평양 산정현교회를 시무하던 주기철 목사님은 정면으로 항거하다가 일본 순사들에게 가혹한 고문을 당하며 탄압을 받았습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예수를 버리고 내가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요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하며  ‘일사각오’ 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설교를 하였습니다. 결국 1938년 평양 감옥에 투옥되어 5년간 옥살이 하던 중 1944년 감옥에서 별세하였습니다.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교한 주기철 목사님이 순교 직전에 쓴 고난의 명상록이 전해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오는 고난을 이제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무슨 낯으로 주님을 대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이제 내가 당하는 수욕을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 영광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 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어떤 말로 대답하리이까? 

주님을 위하여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에 주님이,
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고 물으신다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으리이까?

사람은 어차피 한 번은 죽어야 하는 정해진 삶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태어나고 살다가 때가 되면 죽음의 길을 가는데 그 길은 아무도 피할 수가 없습니다. 목숨이 두개라면 한번은 시험삼아, 연습삼아 살아보고 두번째는 제대로 살 수 있을텐데 아쉽게도 우리에게는 단 한번의 기회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어진 삶을 다 산 후에는 그 삶에 대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내가 죽은 후 세상 사람들에게 받는 평가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받는 평가가 있습니다.

앞에서 예를 든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 신앙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아 용기를 북돋아 주는 믿음의 선배로서 평가 받을 수 있습니다. 아니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불의에 굴복하여 비굴하게 살다가 친일파의 명단에 올라 두고두고 비겁자로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영광스럽고 또 두려운 평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생을 판단하십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사람으로 서게 될 것인지는 지금 나의 삶에 달려있습니다.    

일사각오의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지금 당장 죽음을 찾아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모두 북한으로 들어가 김정일 정권에 맞서 전도하다가 순교자가 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아프칸이나 이라크로 들어가 그리스도를 전파하다가 장렬하게 순교하라고 밀어부치는 것도 아닙니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내 삶의 현장에서 순교자로 살기를 바랍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불의한 방식으로 재산을 축적하고 그 불의한 재물로 흥청망청 물쓰듯 살고 있을 때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정직한 수입으로 검소하게 사는 것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걷고 있는 순교자의 길입니다. 학생들이 시험장에서 점수 한 점 더 얻으려고 너도나도 부정행위를 할 때 정직하게 시험 치르면 낮은 점수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나 홀로 정직하게 살면 손해보는 것을 뻔히 알지만 그래도 부정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탈락을 각오하는 일입니다. 정직함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은 성적을 얻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죽기를 각오하는 일입니다.    

지금 평화의 시기에 순교자 정신으로 살기를 힘씁시다.  평안할 때 불의와 타협하고 부정한 성공을 탐하는 사람이 정말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켜야 할  긴박한 순간에 순교자의 자리에 설 수 있으리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순교자는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평안할 때  요행심이나 불의와 부정이 나를 유혹할 때 자기의 욕심과 유혹과 맞서 나를 비우는 사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전15:31) 하였습니다. 날마다 죽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양초가 자신의 몸을 불사를 때 비로소 어두움을 밝히는 빛을 드러내고 부뚜막의 소금은 자신을 녹여 음식의 맛을 내게 합니다. 하물며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들이 자신을 태우고 녹이지 않은 채 쌩쌩하게 살아서 제자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다 말할 수 있을까요?    우리 모두 죽읍시다!  자살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를 가진 우리나라의 자살 건수를 더 올리자는 말이 아닙니다.   참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가 죽는 자리로 나아가자는 말입니다.   내가 죽고야 비로소 새 생명이 있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