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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굴로부터의 탈출 (막 1: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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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로부터의 탈출 (막 1:14~15)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성당정교인 로마 카톨릭교회가 부패와 타락의 동굴이 되고 말았을 때 그 구교에서 떠나고 나온 신교입니다. 이처럼 떠나고 나온 것을 기념하여 지키는 것이 종교개혁주일인데 금년이 492주년이 됩니다. 

개혁(改革)이란 한문 글자의 뜻은 가죽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주일을 보내면서 우리교회와 우리 성도들이 작은 개혁이라도 이룰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풀라톤이라는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가 있었는데 그가 남긴 이야기 중에 "동굴의 비유"가 있습니다. 한 종족이 범죄로 인해서 깊은 동굴에 갖히게 되었습니다. 발은 족쇄에 묶이고 동굴 밖으로 나가는 모든 길들은 차단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종족들은 그곳에서 자손을 낳고 살게 되었고 오랜 세월이 지나자 동굴 밖이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살게 되었습니다. 동굴 밖의 이야기는 전설 속에나 남아 있는 그런 것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둥굴속은 어둡고 동굴이 가지고 있는 그 퀘퀘한 냄세며 습한 공기 등은 이제 체질화 되서 별 상관이 없이 잘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한 사람이 어렵사리 동굴 밖을 나가게 되었는데 동굴 밖은 정말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찬란한 태양과 신선한 공기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나무와 풀들과 곤충과 새들과 짐승들 너무나도 아름다운 세계었습니다. 이 사람은 어렵사리 나온 그 동굴로 다시 되돌아가서 자신의 종족에게 밖의 세계를 이야기하고 동굴에서 나갈 것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동굴안에 있는 사람들은 동굴에 길들여져 있었고 그 생활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도 않았고 왠 정신나간 사람이 헛소리쯤 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급기야는 종족회의를 열어서 풍속을 해치고 혹세무민하는 사람으로 낙인을 찍어 이 사람을 화형에 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동굴이란 우리가 본래적으로 추구하고 살아야 할 것이 아닌데도 그것에 나도 몰래 길들여져서 그것을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가고 있는 것들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과 동등됨을 버리시고 둥굴과 같은 이 세상에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둥굴에서 자라셨습니다. 그분만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똑바로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만이 참 구원이 무엇인가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설교하시고 동굴 안에 갖혀 있으면서도 이제는 동굴에 길들여져서 그곳이 가장 좋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는 이미 구약종교는 타락할 대로 타락했습니다. 유대종교, 율법 종굔느 갈데까지 간 종교였습니다. 이것으로는 희망이 없다할 만큼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빛이왔으되 어두움을 더 사랑함으로 빛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에게 사형선고를 하고 십자가에 달아 죽여버렸던 것입니다. 동굴 속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전설로나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하나님나라가 가까이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통하여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다고 하셨으며, 하나님 나라가 너희 중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은 둥굴속에 갖혀살던 사람들에게 둥굴 밖의 세계를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둥굴 속에 갖혀있는 이스라엘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전해주신 복음과 같은 세계를 원치도 않았고 처음부터 그런 하나님 나라를 바라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백성들을 현혹하고 신성을 모독하는 자라는 누명을 쒸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종교생활에 길들여지게 되자 하나님보다는 그들은 습관적인 종교인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도 굳어지고 길들여지고나면 형식적이되고 외식적이 되어서 더 나은 것을 향하여 올라가 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안정만 바랄 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자칫 하면 습관과 전통과 교리의 둥굴에 갖혀살다보면 정말로 볼 것을 보지 못하고, 들을 것을 듣지 못하고, 들어가야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가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가장 나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둥굴 밖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고 사는 것이 우상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탈출해야 할 나의 동굴은 무엇입니까?
내가 나가야 할 동굴은 무엇입니까? 

왕상19:13~14에 보면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엘리야가 자기의 생명을 찾는 자들을 피하여 동굴속에 숨었을 때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찾아오셔서 그 동굴에서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섭다고 언제까지 동굴속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동굴속에 숨어사는 것이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숨어 있는 동굴에서 이 시간 주의 말씀을 따라 "나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라고 하는 분의 시 한편의 줄거리를 제가 소개해 보겠습니다. "황량하고 거친 산속에 살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나서 허둥지둥 둥지에 돌아왔습니다.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보았습니다. 발버둥을 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이 둥지를 떠나면 꼭 죽을 것 같아 안간힘을 썼으나 폭풍이 워낙 거세어서 둥지에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날개를 펴고 폭풍을 타고 올라갔습니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그대로 날아갔습니다. 끝없이 날아갔습니다. 얼마동안 날아갔을 때 폭풍은 멎었습니다. 조용해졌을 때에 땅을 내려다보니 넓고 푸른 초원이 있었습니다. 생전 보지 못한, 전에 살던 곳과는 비교도 안되는 아름다운 초원이 눈 앞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새는 행복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자기의 태어난 둥지를 떠나지 않겠다고 몸부림을 칩니까? 
지금까지 해온 것, 익숙한 것 그것이 풀라톤이 말한 동굴이 아닙니까? 묵묵하고 퀘케한 동굴에서 언제가지 헤메야 하는 것입니까? 
  
해묵은 전통과 고집의 동굴을 탈출해야 합니다. 허상의 동굴을 버리십시오. 
나라고 하는 우상도 다 버리고 동굴에서 벗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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