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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롬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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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롬 2:1~11)


미국 동부에 가면 보스턴이라는 아주 유명한 도시가 있습니다. 그 보스턴에는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알려진 하버드대학이 있습니다. 그 하버드대학의 정문에는 비석이 하나 놓여있는데 그 비석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말라.’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2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이런 말이 이 비석에 쓰이게 된 데는 아주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동부가 아닌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아주 부유한 억만장자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일생동안 아주 열심히 돈을 모았습니다. “여보! 우리가 이 돈을 좀 뜻 깊게 사용하고 싶어요. 특히 후진들을 키우는 교육 사업에 이 돈을 쓰면 어떨까요?” 그래서 부부가 의논하다가 “우리가 세계적인 명문 하버드대학의 총장을 만나서 이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의논합시다.” 그래서 그 노부부는 서부에서 동부까지 먼 길을 차를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버드대학 정문에 도착했습니다. 

수위에게 “내가 총장님을 좀 뵈러 왔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이 노부부의 모습이 너무 수수하기 때문에 아마 수위는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매우 불친절하게 그들을 대응했습니다. 부인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하버드대학 같은 대학 세우려면 얼마나 돈이 많이 들까?” 그 이야기를 듣고는 이 수위는 아주 노부부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총장을 만나지 못하고 그들은 성가신 사람으로 취급되어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이 노부부는 할 수 없이 차를 돌려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재산을 다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버드대학에 버금가는 그런 좋은 대학을 우리 지역에 세우면 어떨까요? 그래서 그들이 낸 돈을 가지고 세운 미국의 명문대학이 서부의 스탠포드대학입니다. 아름다운 건물이 들어서고 교수가 모집되고 학생이 모집되고 개교하는 날, 그 축하의 자리에 바로 하버드대학의 총장이 초대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스탠포드대학이 생겨진 그 유래를 듣게 되었을 때 하버드대학 총장은 깜짝 놀랐습니다. 너무 너무 마음이 쓰렸습니다. 그 수위 한 사람의 실수가 이 엄청난 투자를 가로막았던 것입니다. 

그는 돌아오면서 결심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하버드대학 정문에 비석을 세우고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이런 놀라운 어귀를 거기에 기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위는 사람의 외모만 보고 판단했기 때문에 바로 그런 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설교의 제목을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우리도 종종 남을 판단하는, 아니 사람을 속이 아니라 외모로, 외형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일 로마서 1장 후반부 부분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상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욕대로 그들을 버려두셨습니다. 이제 그들은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더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우상을 숭배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버려두셨는데 그들은 이제 성적으로 타락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심지어는 동성애의 죄를 범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셨는데 이제 그들은 합당치 않은 죄악을 쌓아갑니다. 21가지 죄의 목록을 우리가 읽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와 수군수군 대는 것, 비방하는 것, 잘 난체 하는 것 등 여러 가지가 소개됩니다. 

바로 이 죄의 결과들은 사형에 해당된다고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일 우리가 살펴본 이런 많은 죄의 목록은 바로 이방인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율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본능대로 살아갔기 때문에 이런 죄를 지으며 살아간 것입니다.

  이제 사울은 장면을 바꾸어서 오늘 로마서 2장 1절 이하에서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이런 죄악의 담을 쌓아가고 있는데 그러면 유대인 너희들은 어떠냐? 율법은 알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너희들은 정말 의로우냐?” 하고 묻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잘 알고 선민의식, 선택된 민족, 그리고 율법과 할례를 주장하는 그들 역시 죄인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이 짓는 제일 큰 죄목, ‘너희를 판단하는 사람’이라고 사도바울은 명명하고 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여러분! 유대인들은 너무나 쉽게 이방인들을 정죄하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인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율법도 모르고 할례도 모릅니다. 하나님도 알지 못합니다.”라고 그들을 멸시하고 판단했습니다. “너희가 이방인들을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하나님의 정죄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유대인들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판단에 대해서 많은 교훈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가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눈 속에 있는 티와 들보는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나의 전봇대 같은 큰 허물은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 속에 티는 보고 비판하고 판단한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남을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남을 정죄하는 그 정죄로 너희도 정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죄에는 둔감합니다. 왠지 나는 의로운 것 같고 목사가 아무리 죄에 대해 설교해도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의 허물을 찾기가 쉽습니다. 타인에게는 매우 비판적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특별히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소개되는데 바리새인은 사람들과 따로 서서 아주 구별되고 거룩하게 서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하고 불의하고 간음을 행하는 자들과 같지 않고 이 세대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합니다.” 여러분! 그는 자신은 토색하지 아니했다고, 불의하지 않다고, 간음하지 않았다고, 그리고 이 세대가 바로 죄인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뭔가 마음속에 나는 남보다는 선하다는 자의식 속에 교만의 탑을 쌓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결코 성경은 우리가 남을 판단할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왜 우리가 남을 판단하면 안 될까요? 오직 판단하시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을 감히 판단할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만이 우리를 판단하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될까요? 판단은 결국 자신을 판단 받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남을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도 정죄를 받지 아니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너희가 남을 판단하면 너희의 판단으로 너희도 결국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장 놀라운 황금률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내가 남을 사랑하면 그도 나를 사랑할 것이오. 내가 남을 존경하면 그도 나를 존경할 것이오. 내가 남을 판단하면 그도 나를 판단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에게는 판단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죄인이 또 다른 죄인을 판단한다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똥 묻는 개가 재 묻는 개를 탓한다.” 어찌 보면 이런 형상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남을 판단합니까? 뭔가 자신은 더 의롭다는 그런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남보다 더 도덕적인 사람이야. 나는 남보다 더 의로운 사람이야. 이런 생각들이 우리의 뇌리 속에 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결코 누구도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인 것입니다. 여러분! 검사고 판사라고 해서 그들이 더 의롭습니까? 우리 사회에 검찰청장 후보가 여러 사회적인 악을 행해서 참으로 추궁을 당하고 곤궁을 당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지 않습니까? 대법원 판사가 사회적인 죄를 지어서 지탄을 받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검사, 판사라고 해서 죄가 없어서 남에게 죄를 선고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설교하는 목사라고 해서 여러분보다 더 의롭고 더 순결해서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유대인들은 마치 자신들은 의로운 백성들이오 이방인들만이 죄인들이라고 그들을 멸시하고 판단하고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우리들도 그 유대인들의 잘못된 관습을 그대로 배워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오랜 역사 동안 율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오랫동안 율법에 친숙해질수록 그들이 율법의 정신을 알고 율법의 진리를 행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의 본질은 잃어버리고, 율법의 정신은 상실해버리고 오직 율법의 껍데기만 가지고 남을 정죄하는데 율법을 잣대로 사용했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남을 비난하는데 그들은 율법을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 범할 수 있는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래 묵은 그리스도인, 더 훌륭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때로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오래된 포도주는 그것이 숙성되어서 더 맛있고 값이 비싸다고 합니다. 10년 된 포도주와 100년 된 포도주는 그 값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마 더 오래된 된장 맛이 더 좋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오래 묵은 유대인들, 그들은 위선적이 되고 외식 적이 되고, 주님의 책망 받는 단골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에 빠져서 자기들은 선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어떤 잘못에 대해서 자신에게는 매우 관대합니다. 자신이 좀 시간에 늦으면 “서울 도로가 워낙 복잡해서 좀 늦을 수도 있지 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남이 늦으면 “저거는 만날 지각만 해. 쟤 때문에 우리가 만날 늦어.” 

남에게는 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에 보니 이런 유머가 나옵니다. 남이 그랜저 타면 촌놈 출세했다고 놀립니다. 내가 그랜저 타면 품위유지를 위해서 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이 연애하면 스캔들이라고 흉보고, 내가 연애하면 로맨스라고 자랑합니다. 남이 과속하면 난폭운전이요, 내가 과속하면 시간절약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남이 신길동 살면 촌 동네에 산다고 하고, 내가 신길동에 살면 나는 그래도 뉴타운에 산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본질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서야 합니다. 제발 이제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타인을 선한 눈길로 바라보는, 주님의 눈길을 회복해야 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죄악 가운데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본문 4절과 5절 말씀을 읽습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오늘 유대인들이 이런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죄를 쌓아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아직 임하지 않으니까 그들은 생각합니다. ‘아 내가 의로워서, 우린 특별한 민족이니까, 우리는 선민이니까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서는 심판하지 않으시는구나.’ 마치 자신들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가지고 길이 참으시는 이유는 그들이 회개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멸망당하지 아니하고 회개의 은혜를 입게 하기 위해서 오늘 주님께서는 오랫동안 기다리고 계시는데 우리는 그 주님의 길이 참으심과 용납하심을 멸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끔 경험하는 착각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어려운 일을 당하는데 나만 안 당하는 것 보면 내가 굉장히 의로운 가봐. 다른 사람과 나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그러나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기를 지금 기다리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 보니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고집을 가지고 회개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회개하지 아니하는 그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 마음 속에 어떤 잘못된 고집으로 굳게 뭉칠 수가 있습니다. 이 고집은 신념과 확신과는 다릅니다. 어떤 잘못된 편견, 이것이 바로 고집인 것입니다.

어떤 가문에 너무 고집 센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집에 손님이 왔습니다. 그래서 아들에게 “야! 너 시장에 가서 음료수 좀 사와라.” 명령을 했습니다. 아들이 음료수를 사러 갔는데 몇 시간을 기다려도 아들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들을 찾으러 아버지가 나왔습니다. 동네에 조그만 다리가 있는데 아들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음료수를 사 가지고 오다가 어떤 행인과 마주쳤는데 서로 양보하지 않고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몇 시간 동안 서로 마주보고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 아버지도 보통이 넘습니다. 가서 아들에게 “야 너 빨리 그것 가지고 가서 손님 가져다 드리고 와. 여기는 내가 지킬게.” 그리고 아버지가 대신 대치하고 있습니다. 양보하면 될 텐데 얼마나 고집이 센지. 

여러분! 유대인들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들은 고집을 피우다가 결국 하나님의 진노의 불 가운데 넘어지고 맙니다. 결국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서 70년 동안 노예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집입니다. 여러분! 고집은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여러분! 고집 피워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신앙적으로 하나님 앞에 고집 피워서는 안 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또 여기 보니 회개치 않는 마음이 이제 심판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회개치 않는 마음, 이것은 강퍅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 말씀이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그 말씀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설교를 해도 자신은 죄인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어느 날 목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축도를 하고 앞에 가서 교인들과 인사하는데 어떤 집사님이 나오시면서 아주 밝은 얼굴로 “목사님! 오늘 설교가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 아쉬운 것이 있습니다.” “아니, 뭐가 아쉽습니까?” 목사님은 설교를 잘못했는지 알고 “뭐가 잘못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이렇게 좋은 설교가 뭐가 잘못되었겠습니까? 오늘 김 집사가 꼭 들었어야 하는데 오늘 김 집사가 불행히 안 나왔네요.” 여러분! 그 설교는 자기에게 향한 설교지 어떻게 김 집사에게 향한 설교입니까? 바로 우리가 회개할 사람이고 우리가 바로 깨져야 할 존재인 것입니다.

부부들도 그렇습니다. 가정주일에 목사님이 가정에 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아내 여러분!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남편은 가정의 머리인 것입니다. 남편 여러분! 아내를 귀히 여기고 자기 생명같이 여기십시오.” 그 설교를 하는데 남편이 아내를 쿡쿡 찌릅니다. “좀 잘 들으라고.” 

여러분! 그 설교는 바로 내가 잘 들어야 할 설교인 것입니다. 바로 오늘 내게 주는 설교. 여러분들은 혹시 설교를 들을 때 거북스러움을 느끼지 않습니까? 혹시 불편함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날은 은혜 받은 날인 걸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내가 은혜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오늘도 목사님이 나를 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마음이 불편해지면 그것은 은혜 받는 설교입니다. 오늘 내가 회개해야 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회개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고집과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예수님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회개하지 못하고 무서운 심판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 밭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씨가 떨어지는데 어떤 마음 밭은 자갈밭입니다. 어떤 마음 밭은 돌밭입니다. 어떤 마음 밭은 가시밭입니다. 어떤 마음 밭은 딱딱한 길가 밭입니다. 씨앗이 떨어져도 튀어나갑니다. 거기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자라지 못합니다. 결국 다 죽어버립니다. 

여러분!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수없이 예배를 드려도 그것은 헛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수많은 예배를 드려도 하나님이 받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옥토라는 것은 물이 스며들 수 있는 밭,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밭,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밭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옥토인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니, 여러분의 마음을 이제 옥토로 바꾸어주시옵소서, 주님 앞에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님! 내 마음을 깨뜨려 주옵소서. 내 마음을 갈아엎어 주옵소서. 내 마음을 기경하여 주옵소서.” 여기서 은혜가 시작됩니다. 

어떤 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 좀 예배드릴 때마다 은혜 받았으면 좋겠어요.좀 마음에 감동이 되면 좋겠고, 뜨거워지면 좋겠고, 눈물도 흘리면 좋겠어요.” 그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너무 아름답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본인의 마음 밭이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이 옥토가 되지 않으면 어떤 생명의 씨앗이 떨어져도 열매를 맺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씨앗 탓만 합니다. 내가 은혜 받지 못하는 것은 설교 탓이라고 변명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오늘 내가 옥토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옥토가 되면 그것이 어떤 씨앗이든 내게서 발아하고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영신교회 성도님들의 마음이 옥토로 변화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이제 회개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향해서 또 무서운 말씀을 선언하십니다. 본문 6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읽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아주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아니하고 남을 판단하는 그 행위대로 그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정직한 일을 많이 한 그 행위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남을 판단하고 고집과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 그 행위대로 우리를 보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설 것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 보니까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오늘 고집 센 유대인들, 그들은 바로 악을 쌓아가고 있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쌓아가고 있었습니다. 참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설교자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죄를 짓고 있다면 그 죄의 고리를 끊어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치 우리가 적금을 붓는 것과 똑같습니다. 은행에 가서 매달 얼마씩 적금을 붓습니다. 많이 붓고 오래 부으면 나중에 만기가 되어서 적금을 많이 받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반복해서 계속 죄를 쌓아 가면 그것이 적금처럼 되어서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를 여러분에게 쏟아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진노와 분노의 이런 심판을 쌓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인생입니까? 오늘 성경은 말합니다.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하는 면류관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의 축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참으십시오. 인내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선한 삶을 사십시오. 그것이 바로 영광의 면류관을, 영생의 면류관을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심판하신다고 엄히 경고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심판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느냐가 주님 앞에 설 때의 우리의 모습을 결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지막으로 주님은 11절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이야기를 오해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속을 보고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외형을 보고 판단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속마음을 보고 주님은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신문이나 TV를 보면 많은 죄를 지은 죄인들이 소개됩니다. 그들은 그 죄가 발각되어서, 겉으로 들어나서 법의 심판을 받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드러나지 않은 죄가 더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그 죄가 드러나면 법의 심판을 받을 텐데 우리는 은밀하고 교묘하게 죄를 짓기 때문에 마음속에 그 죄를 숨겨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그 숨겨진 죄까지도 경고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 설 때는 그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악의 밑바닥까지 다 엎어놓으시겠다고 하십니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 죄를 숨길 수가 없습니다.

어찌 보면 이방인들은 그 죄가 단순합니다. 그리고 밖으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율법을 모르고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오히려 교묘하게 남을 판단하고 멸시하고 비판하는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도덕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이라고 해서 성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십시오. 어느 날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예수님! 이 여인을 어떻게 할까요?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인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이 만약에 돌로 쳐서 율법대로 죽이라고 했으면 사랑이 없다고 말할 것이고, 그냥 용서해서 보내라고 하면 율법을 여겼다고 할 것입니다. 주님은 뭐라고 하십니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아무도 돌로 칠 수 없었습니다. 그들도 간음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성적인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그 마음에 짓는 죄까지도 주님은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까지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법 앞에 선 적도 없는데, 경찰에게 끌려간 적도 없는데, 나는 재판 받은 적도 없으니 의롭지.’ 아닙니다.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는 죄가 더 크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강퍅한 마음을 깨트려야 합니다. 고집 센 마음을 녹이셔야 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이 말씀 앞에 스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매우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그도 범죄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했습니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나단 선지자가 와서 그 사실을 책망하고 경고할 때 다윗은 그 앞에 엎드립니다. 통회하면서 회개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위대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 우리도 그렇습니다. 죄를 숨기지 마십시오. 마음을 자꾸 강퍅하게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자신을 드러내십시오. 죄를 회개하십시오. 자백하십시오. “주님! 저의 길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십시오. 십자가의 보혈로 자신의 죄를 씻어버리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설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죄가 팽배할지라도 하나님은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 성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속에라도 죄를 담지 마십시오. 오늘 주님의 말씀처럼 긍휼과 자비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시고,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시고, 형제를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나 자신을 보십시오. 오늘 주님의 은혜 가운데서 아름답고 거룩한 삶을 이루어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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