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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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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롬 12:1~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살지만 실은 두 종류의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물질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세계입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가질 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도 갖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국가에 세금을 바치고 국민의 의무를 다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롬 13:7). 성경은 국가를 악의 세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사와 성경을 살펴보면 세상 나라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불의를 자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불완전하고 타락한 인간들이 다스리기 때문에 어느 국가나 사회든지 악이 상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어떤 국가는 마귀의 도구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하나님 나라는 불의가 없는 공의로운 나라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본분을 다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본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전자는 이 땅에 사는 동안만 유효하지만, 후자는 영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 번째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이 말씀하는 ‘이 세대’란, 세속화된 삶의 방식, 또는 이 세상의 풍조를 가리킵니다. 세속적인 삶의 방식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삶의 방식과 맞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2장에 보면, 이 세상 풍속을 좇는 것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르는 것을 같은 부류로 분류합니다. 이 세상의 풍습을 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 풍습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리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속화된 삶의 방식과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살면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대도 본받으면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죄악 세상과 하나님 나라는 모든 면에서 항상 대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19)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21)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육체가 원하는 것과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 것은 곧 육체가 원하는 것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결과는 성령님의 뜻을 거슬러 악을 행하게 될 뿐입니다. 

데마는 한 때 사도 바울의 동역자로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의 마음속에 세상이 들어왔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안일함을 동경하자 그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지루하고 따분하게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사명을 저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살아가면, 마치 기차가 레일에서 탈선하여 넘어지듯이 믿음의 길에서 이탈해서 타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대를 따라 살면 육체의 욕심을 만족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영혼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맙니다. 세상 즐거움을 찾아다니기 시작하면 점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되고 드디어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 시대의 황금만능주의 풍조를 경계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황금숭배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습니다. 인격보다 돈을 더 우선시하고, 사람보다 돈이 대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황금만능주의를 따라 살아가는 것은 이 세대를 본받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돈은 생활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인생의 목적이나 숭배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돈 앞에 엎드려 절하고 섬깁니다. 우리는 이 같은 황금만능주의를 단호하게 거부해야 합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고 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들 가운데서 돈궤를 맡아 관리했는데 그만 돈에 대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요한복음 12장 6절에 보면,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받으실 것이라고 하시자 더 이상 돈을 빼돌릴 희망이 없음을 알고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가룟 유다 뿐 아니라, 오늘날도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6장에 이르기를 “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했습니다. 그런즉 성도님들께서는 돈을 사랑하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 하나, 우리는 이 세대의 특징인 쾌락주의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향락을 추구하는 열정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우리 사회의 도처에서 향락산업이 번창하고 있으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오락을 찾아 즐기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락을 즐기고, 향락에 마음을 빼앗기면 경건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어렵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주전 8세기 중반에도 오락이 성행했습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금식하는 날이나 안식일에도 오락을 즐겼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저들을 책망하시기를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그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사 58:5)고 하셨습니다.

오늘날도 성도들은 주일을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주일성수의 방법은 먼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주의 일에 봉사하고, 또는 병든 신자나 어려운 일을 만난 형제들을 심방하고, 시간이 남으면 몸을 편히 쉬어야 합니다. 봄가을에 꽃놀이, 단풍놀이를 가느라 예배를 등한히 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주일에는 오락을 삼가야 합니다. 

레위기 10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시기를 “9)너나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아서 너희 사망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영영한 규례라 10)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11)또 여호와가 모세로 명한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으로부터 구별된 생활을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의 자격을 받은 성도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성도답게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고,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산 제사”란, “산 제물”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는 소나 양이나 염소를 잡아서 제단 위에 얹어 놓고 불사르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번제든, 속죄제든 제물을 불로 태우는 방식은 같습니다. 이 때 제물로 바칠 짐승을 산 채로 바치지 않고 반드시 죽여서 토막을 내어서 제단에 올려놓고 태웠습니다. 그러던 것이 신약시대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자기의 몸을 제물로 삼아 십자가에 달려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셨고, 이로 인해 구약시대의 제사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이후에도 한 동안 예루살렘 성전에서 짐승을 제물로 삼아 제사를 드렸으나, 주후 7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성전이 무너진 이후로 짐승을 제물로 바치는 제사는 중단되었습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기 몸으로 속죄 제사를 드려주심으로써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의 제물로 바친 짐승은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자기 몸으로 속죄 제사를 드려주셨으므로 더 이상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가 소용이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신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우리 몸을 속죄 제물로 드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완성하셨으므로 더 이상 속죄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속죄 제사가 아니라 번제의 성격이 더 합당할 것입니다. 번제는 아침과 저녁에 하나님께 드렸는데, 하나님께 헌신하는 뜻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하신 ‘산 제사’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매일 매일의 삶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기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물은 죽은 것이므로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 것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제물로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제물은 그런 죽은 제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 자신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자원해서 하나님께 바쳐지는 산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 몸을 제물로 바치는 성도는 더 이상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살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제물로 바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는 자기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인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기 전에 우리는 죄의 포로였는데,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사셔서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이전의 주인이던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6장 20절에 이르기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그 날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됩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의 영광을 위해 살아갑니다. 그들은 자선을 베푸는 것조차 자기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 그러나 그 같은 삶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무가치한 삶에 불과합니다. 이 땅에서 백세를 살아도 평생을 자기를 위해 살았다면 무의미한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면에, 세례 요한처럼 짧은 생애를 살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면 가장 값진 인생으로 하나님의 인정과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 보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거룩함은 속됨의 반대말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보면, 제사장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속되고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먹지 말아야 했으며, 성막에서 직무를 행하기 전에 반드시 물로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결혼을 할 때에도 반드시 처녀를 아내로 삼아야 했습니다. 이처럼 속된 것으로부터 구별되이 행하는 것이 거룩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려는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으로부터 자신을 멀리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몸은 성령을 모신 성전이 되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우리 몸이 거룩하신 성령을 모신 성전이 되었음을 깨닫고 항상 거룩함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칠 때, 하나님께서는 이를 영적 예배로 받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예배로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드린 것으로 예배생활을 다 한 줄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 자체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하고,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려면,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고 안일을 탐한다면, 아무리 형식을 갖추어서 예배를 드릴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사야서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11)…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물의 많고 적음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의 마음 중심이 올바른지를 보십니다. 마음이 거짓된 사람은 아무리 살지고 기름진 제물을 무수히 바칠지라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마음이 정결한 사람은 가난하여 겨우 비둘기 한 마리를 바칠지라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자기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이에 대하여 에베소서 4장에 이르기를 “21)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과연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찐대 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생각에서 나오고 우리의 생각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말과 행동이 깨끗하려면 먼저 마음이 정결하게 되어야 합니다. 마음은 더러운데 말과 행동을 깨끗한 척 꾸미는 것은 위선입니다. 그러나 위선은 오래가지 않아서 그 거짓됨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불꽃같으신 눈으로 우리의 폐부를 살피시며, 우리의 숨은 생각까지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마음에 악이 남아 있다면 아무리 많이 기도할지라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합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사 1:15)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하신 대로, 죄 용서를 받아 우리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의 일로 범죄하고 나서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았을 때 즉시로 하나님 앞에 엎드려 회개하며 간구하기를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정하게 변화 받지 못하면 작심삼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새 마음을 받은 사람은 지속적으로 새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로서, 어거스틴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두뇌가 총명하여 학문적인 성공을 거두었으나 그의 마음은 죄악에 깊이 물들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열일곱 살의 나이에 어느 젊은 여자와 동거를 시작해서 사생아를 낳았습니다. 더구나 어거스틴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의 가르침을 혼합해서 만든 마니교에 심취해서 젊은 날을 보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살 때에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았고 주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의 눈물어린 기도로 인해 그는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 후부터 그는 마음이 새롭게 되어 남은 생애를 온전히 주님을 위해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사도 바울 이후로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서 기독교의 진리를 파수하는데 큰 공헌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하나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함으로 때 묻은 마음을 정결한 새 마음으로 변화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을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기쁘시게 해 드리기는커녕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은혜 가운데서 밝고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서론에서 말씀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국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정욕과 재물에 대한 욕심에 사로잡혀 살아갈 것이 아니라 구원 받은 성도로서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 타락한 세대를 본받지 말고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고,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서 살며, 죄를 회개함으로써 날마다 마음이 새롭게 변화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늘 순종하심으로 성도님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영적 예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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