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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게 있는 것으로 (행 3: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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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있는 것으로 (행 3:1~26) 
 
 
3-7장은 예루살렘에서 복음 사역을 기술합니다. 오순절 성령님의 강림을 기점으로 교회가 태동하여 아름다운 자태를 갖추었습니다. 이와 함께 교회를 훼방하고 무너뜨리려는 패역한 세대(2:40)의 반신국적 세력이 등장합니다. 외부적으로는 막강한 권세를 이용해서 교회를 핍박했고(4장), 내부적으로는 위선적인 신자들을 통해 교회의 부패를 유도 했으며(5장), 

가장 교묘하게는 교회가 본질적인 사역보다 많은 일들에 분주하도록 변질시키려했습니다(6장). 그 때마다 교회는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반신국적 세력들을 막아내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더욱 잘 증시하는 모습으로 성장해갔습니다. 그 후에 사마리아와 땅 끝으로 확산되어가지요.
 
3장은 앉은뱅이 치유 사건(1-10)과 몰려든 사람들을 향한 베드로의 설교(11-26)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었는데(2:43), 유독 이 사건을 선별해서 상세하게 기록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사건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더욱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가 핍박 받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을 계기로 당국자들의 눈에 가시처럼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교회도 40년 이상 된 불구자를 고친 것을 계기로 예수님께서 당하셨던 핍박을 계승하게 됩니다(4:22). 이 사건 속에서 유대교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교회의 독특한 특징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삼시와 육시와 “구시”(오후 3시)에 기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도 관습에 따라 성전에 올라갔습니다(1). 갑자기 태동하고 급속히 불어나는 성도들을 돕기 위해서 기도할 필요가 절실했겠지요. 기도 시간에는 성전에 많은 사람이 모였으므로 말씀을 가르치거나 전도하려는 목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동일한 시간에 사도들과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성전에 온 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면서 앉은뱅이”인 그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미문”곁에 앉았습니다(2). 구걸생활의 달인이 된 그는 어느 시간 어느 장소가 동냥이 잘되는지 알았겠지요. 그는 사람들이 구제를 거절하기 가장 힘든 시간과 장소를 택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미문은 이방인의 뜰에서 이스라엘 여인의 뜰로 들어가는 니가노르문(Niganor Gate)인데, 고린도의 구리로 덧입혀졌으며 은과 금으로 된 것들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문’ 앞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 발생했습니다. 선천적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성전에 들어가려는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평소처럼 구걸했습니다(3). 

두 사도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우리를 보라”했습니다(4). 앉은뱅이는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봅니다(5). 그동안 그를 불쌍히 여기고 주목했던 사람들의 일반적인 도움 방식은 좀 더 많은 구제금을 주는 일이나, 잘 구걸할 수 있도록 그를 날마다 옮겨주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의 도움은 대단히 독특했습니다. 그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명하면서 오른손으로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러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베드로의 손을 통해 역사했습니다. 

평생 동안 걸음마 한 번 못해봤던 앉은뱅이의 발과 발목은 즉시 튼튼해졌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나님을 찬미하기도 했습니다(6-8). 앉은뱅이가 기대한 것은 좀 더 많은 구제금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님께서는 인간의 작은 기대와 소박한 소망을 초월하는 놀라운 은혜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구제의 손길이 앉은뱅이에게 큰 도움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늘 사람에게 의존해서 구걸해야 하는 삶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에게 부담 주는 삶을 계속 살았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손길은 그로 스스로 걸으며 구걸 없이 살 수 있는 인생이 되게 했습니다. 성전에 와서도 늘 사람들로부터 ‘무엇을 얻을까’만 생각하던 그로 하나님을 찬미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게 했습니다. 이 사건은 교회의 사역은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며, 모태에서 태어난 자연인의 상태보다 상승적으로 회복시키는 독특성을 가졌음을 계시해줍니다.

만일 사도들이 은과 금을 가졌다면 그것으로 구제했을 것입니다. 6장을 보면 교회가 구제에 크게 힘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사도들 개인은 은과 금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은금이 없어도 더 귀히 여기는 미문처럼, 그들에게는 은금보다 더 귀히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그 이름이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멸시되고 불명예스럽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참으로 귀히 여겼습니다. 그 이름으로 말하며 그 이름으로 행했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에게도 그 이름에 대해 증언합니다. 무엇보다 귀하신 그분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되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신약 교회는 처음부터 은과 금처럼 일반사람들도 힘 있게 여기는 외적인 요소들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불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으로는 마땅히 높여야 할 분을 높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외인들은 전혀 가지지 못한 대단히 독특한 것, 바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의지하여 역사를 만들어갔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원이 필요한 상황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처럼 신약의 교회는 구원을 위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 이름을 의지함으로써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폭발적인 능력으로 사역하였고 하나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높였습니다.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했음은 기적 발생 이후의 태도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기적 자체를 기이히 여기며 놀랐고 그 기적을 일으킨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며 몰려들었습니다(9-11). 그때 베드로는 성령님께서 기적을 행하신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고, 그 기회를 놓치지도 않았습니다. 

잠시라도 그 이름에 돌려져야 할 영광을 가로채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 베드로는 즉각 무리들의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립니다.

베드로는 이 사건이 개인의 능력과 경건의 능력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증거로 해석합니다(13). 당시 청중들은 예수님을 이방인에게 넘겨주었었고, 빌라도가 석방하려 했을 때도 “거룩하고 의로운” 분을 부인하며 대신에 살인자를 풀어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14). 이처럼 그들은 “생명의 주”를 죽였으나 하나님께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습니다(15). 그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앉은뱅이를 “성하게” 했습니다. 그 이름이 사라져버리기는커녕 도리어 영화롭게 되셨기 때문에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앉은뱅이를 “완전히 낫게”했다고 증언합니다(16).

생명의 주님은 죽어서 사라지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살아계셔서 세상 끝 날까지 교회와 함께 하십니다. 당신님의 증인들과 함께 계시며 필요하다면 한 순간에라도 앉은뱅이를 완치시키는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능력이 주님을 대적한 죄인들을 향한다면 참으로 두려운 일이겠지요. 교회가 사람들로 죄인임을 깨닫도록 애쓰는 것은 단지 두려워하게 하려는 목적이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이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다는 사실과 그들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이 어긋나버리지 않고 오히려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선지자들의 모든 예언을 “이와 같이” 섭리하여 성취하셨음을 먼저 말합니다(17-18).

그런 후에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19a).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지성적인 측면’과 생명의 주를 대적했음으로 인하여 두려워하며 뉘우치는 ‘감성적인 측면’과 방향을 돌이켜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의지적인 측면’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렇게 회개할 때 “죄 없이 함”을 받게 됩니다.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입니다. 40년 이상 스스로 걷지 못하고 늘 구걸하며 살았던 앉은뱅이가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한 것과 같은 새로운 인생을 맛볼 것입니다. 온전히 회복되어 기쁨으로 뛰면서 하나님을 찬미하던 자와 같은 날이 그에게도 임할 것입니다.

당시의 청중들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던 메시아를 보내주셨을 때 제대로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기쁨으로 메시아를 맞이할 기회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20).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에 머물러 계시겠지만 재림하실 그 날입니다(21). 재림하시는 분은 모세가 “나 같은 선지자”라고 예언했던 바로 그 분입니다(22). 사무엘로부터 모든 선지자들의 예언도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했는데 그 씨도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회개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면 재림하시는 날에 하나님 백성에게서 잘려나가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23).

베드로의 설교는 유머도 없었고 간증도 없었고 예화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말씀을 들은 사람들 중에 믿는 자가 많았습니다. 남자의 수만 약 오천이었습니다(4:4). 그 일은 앉은뱅이 한 사람의 회복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욱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자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찬미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과 경건으로 된 일이 아닙니다. 

영원한 저주로 멸망할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히 회복되는 일은 오직 당신님의 선택하신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성령님의 능력으로 된 일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님께서는 증언하는 자의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셨습니다.

교회에 은과 금은 없을지라도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어떤 계기로든 말씀과 더불어 그분의 이름이 증언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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