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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리라 (히 6: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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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반드시 네게 복을 주리라 (히 6:13~15)


사람은 누구나 다 복을 받아 누리기를 원합니다만, 복을 받길 원한다 하여 복을 받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복 받길 원했습니까? 봄이 되면 대문마다“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는 글귀를 써서 붙였습니다. 밥그릇 안팎에도“복(福)”字, 수저에도“복(福)”字를 새겼습니다. 여인들의 치마 자락에도“복(福)”字, 옷고름과 소매 끝에도“복(福)”字를 새겼습니다. 덮고 자는 이불에도, 베개에도“복(福)”字를 새겼습니다. 온통“복(福)”字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뿐입니까? 정월초하루 날에는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복을 빌었습니다. 지금도 정월초하루 날이면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소원을 빌기 위해 동해를 찾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월대보름이 되면 달을 향해 복을 빌었습니다. 산을 넘을 때면 산마루의 서낭당 나무를 향해 복을 빌었습니다. 산 속의 맹수를 향해서도 복을 빌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바위를 향해 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무를 베어다가 잘라 일부는 화목으로 쓰고 그 나무를 다듬어서 어떤 형상을 만들어 세워놓고 그 앞에 복을 빌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건물 기공식이나 어떤 행사를 시작하기 전 그 행사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죽은 돼지머리 앞에 절을 하며 복을 빌기도 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처럼 복을 받고자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원하던 복을 받아 누린 적이 있었습니까? 5천년 유구한 역사를 살아오면서 단 한번이라도 의식주 걱정 없이 살아온 날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토록 복 받길 염원했는데 왜 바라는 복은 오지 않았을까요? 이는 복이 있는 곳도, 복을 받는 방법도 전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금을 캐고자 아무 곳에나 땅을 파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처럼 복을 받길 원하는 우리들에게 복의 근원이 어디이며, 복을 받는 비결이 무엇인가에 대해 밝히고 이는 것이 본문입니다. 

一. 복은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요?

축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축복은 하나님께로부터 임하게 됩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성도들은“복의 근원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찬양을 했으며“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 드리고...”라고 예배시간마다 찬송했습니다.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본문 14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하셨습니다. 또한 사무엘상 2장 6절~7절에 하나님이 축복의 근원이심을 밝히시기를“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경을 비롯한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지구상에서 자유를 누리며 부유하고 살아가는 선진국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나라들입니다. 비기독교 국가가운데 선진국이 된 나라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처럼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본문 히브리서 6장 14절에 말씀하시기를“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본문을 쉽게 이해하려면 창세기 12장 1절~3절의 말씀을 참고해야 합니다. 창세기 12장 1절~3절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되“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은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을 받을만한 남다른 자격이 있어서 부르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복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지역은 하나님을 섬기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을 섬기는 곳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역시 우상을 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의 직업은 우상장사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브라함의 아버지가 손수 만든 우상을 팔고자 집을 나간 사이에 아브라함이 우상 창고에 들어가서 모든 우상들을 다 부수고 가장 큰 우상 하나만을 남겨두고 그 우상의 손에 몽둥이를 들려놓았다고 합니다. 밖에서 돌아온 아버지가 우상 창고의 문을 열자 우상이 다 부서져 있었습니다. 

깜짝 놀란 아버지는 아들의 소행임을 알고 아브라함을 불러 야단을 쳤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말하기를“아버지 제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낮에 우상 창고에서 무엇이 막 부서지는 소리가 나기에 가 보았더니 저 큰 우상이 몽둥이를 들고 작은 우상을 다 때려 부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이놈아, 저것은 나무로 만든 것인데 어떻게 다른 것을 부순단 말인가?”하며 야단을 쳤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아버지, 그러니 이제 우상을 그만 만들어 팔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전혀 알지 못하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영혼과 육신의 축복을 약속하셨으며 그 약속하신 대로 넘치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 받는다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복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것이 곧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이며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캄캄한 흑암 속에서 살고 있던 아브라함을 밝은 빛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불행의 늪에서 허덕이던 아브라함을 행복의 자리로 인도하셨습니다.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아브라함,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세상을 떠난다면 영원한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입니까? 이토록 크신 은혜와 사랑을 값없이 받아 누린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만 그 큰 은혜를 베푸셨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만한 자격이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췬 우리 인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로마서 3장 10절~18절에 밝히시기를“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를 삼으시고 넘치는 축복을 주시고자 저와 여러분들을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온 것이 내 자신의 의지적인 결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6장 44절 말씀하시기를“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하셨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기쁨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찬송과 기도와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또한 타락한 인간의 본성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아니면 그 누구도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말씀하시기를“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시되 그냥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추한 죄를 해결하시고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피로 죄 값을 치르고 우리들을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24절에 말씀하시기를“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멸망을 받을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은 무엇입니까?

1. 생명의 복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소망하는 축복은 무엇일까요? 장수의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장수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한결같은 소망일 것입니다. 그토록 장수를 원하지만 실제적인 우리들의 생명은 어떻습니까? 신약성경 야고보서 4장 14절에 말씀하시기를“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시편 90편 10절에도“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잠간입니다. 어떤 분은 세월의 빠름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0대는 기어가는 듯하고,
20대는 걸어가는 듯하고, 
30대는 뛰어가는 듯하고, 
40대는 수레를 탄듯하고, 
50대는 말을 탄듯하고, 
60대는 나는 듯하고, 
70대는 바람처럼 스쳐가는 듯하고, 
80대는 번개처럼 지나간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훌쩍 지나가고 마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은 이 짧은 생명에 대해 얼마나 강한 집착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이 세상의 생명에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 말씀하시기를“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원한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우리들을 부르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주된 목적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처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또 다른 세계, 그곳은 우리들의 죄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직접 다스리시는 나라입니다. 그곳은 이 세상의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를 직접 목격한 바울사도는 로마서 8장 18절에 밝히기를“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이 운명하신 후 비겁하게 도망갔던 사람인데, 맛모섬에 귀양 가서 천국의 놀라운 광경을 보고 요한계시록이라는 성경을 기록했습니다. 대부분의 제자들이 도망갔던 사람들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죽기까지 십자가와 부활과 천국을 증거 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체포해 죽이던 사람인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죽기까지 십자가와 천국을 증거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1절에“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는“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 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없다면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천국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고, 내일 세상 종말이 와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사 가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교부 터툴리안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는 순례자이며 우리의 확고한 지위는 내 본향 천국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은 “천국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므로 우리 그리스도들은 이 세상 어디서 살든지 유랑의 장소이다.” 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2:11에는“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고향을 찾아가는“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본향은 어디입니까? 그곳은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가신 하늘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이 영원한 세계를 위하여 마태복음 6장 19절~21절에 당부하시기를“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변소 바꾸는 인생”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한 젊은 부부가 10년 동안 안 먹고 안 쓰고 절약해서 변소가 바깥에 있는 집 한 채를 장만했습니다. 얼마 동안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변소가 바깥에 있으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또 10년 동안 허리띠를 졸라매서 화장실이 집안에 있는 집을 샀습니다. 얼마나 따뜻하고 편리한지요. 하지만 그새 애들이 자랐으니 아침마다 화장실 전쟁입니다. 

그래서 또다시 10년 고생 끝에 화장실이 두개 있는 큰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만 얼마 후에 늙고 병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일평생 변소 세 개 바꾸다가 마친 인생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 화장실만 바꾸다 가는 인생은 아닙니까? 

2. 번성의 축복입니다. 

본문 14절에“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은 영적인 축복만 아니라 육적인 축복도 풍성하게 주시는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2절~7절에 말씀하시기를“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네 대적들이 일어나 너를 치려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패하게 하시리니 그들이 한 길로 너를 치러 들어왔으나 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다 이루어졌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그들은 숫자적으로는 소수민족에 불과하지만 이 세계를 움직이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의 경찰국가라면 그 미국을 실제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브라함의 후예들인 유대인들입니다. 

더 아나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은 모두 영적인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의 조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나라는 반드시 번성합니다. 국토의 크기에 상관이 없이 번성합니다. 기후조건에 상관없이 번성합니다. 부전자원의 유무에 상관없이 번성합니다. 하나님께서 번성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가 북유럽 국가들이며 또한 우리나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릅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승리와 행복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풍요로움의 종교입니다. 

四.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1.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세기 12장 1절~2절) 이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을까요? 그는 지체 없이 순종했습니다. 

그의 순종에 대하여 히브리서 11장 8절에 기록하기를“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라면 절대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이 아브라함 이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시는 까닭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자식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의 심정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래서 신명기 10장 12절~13절에 말씀하시기를“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행복을 위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순종은 행복으로 나아가는 지름길입니다.

2. 아브라함은 오래 참았습니다. 

본문 14절~15절 말씀에 아브라함의 인내하는 삶에 대해 밝히시기를“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인내하는 사람만이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린 사람들은 모두 인내한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리라 하신 하나님의 약속은 25년 뒤에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는 자를 사랑하시며 복 주십니다. 야고보서 5장 7절~8절 말씀에“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하셨습니다. 

서양 속담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쓰던 도구를 다 경매 처분하는데“이것은 팔지 않음”이라고 붙인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낙심”이라는 도구였다고 합니다. 사탄은 언제나 실패하도록 미혹하는데,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하여 낙심케 하므로 포기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낙심하여 포기하므로 실패하게 되는 근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참지 못하는 조급함입니다. 서양 격언에“참는 것은 아픈 곳에 바르는 고약이다.”라고 했습니다. 상처에 바른 고약이 그 상처를 치료하듯, 인내는 우리들의 소망을 이루는 양약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생활환경은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것들로 가득 합니다. 문명의 발달이라는 것이 대게는 사람의 마음을 조급하게 하는 것들인 것 같습니다. 

옛날에 가장 빨리 만들 수 있는 음식은 국수를 삶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국수를 삶아 먹는 불편을 덜어 주는 대용식으로 단 십분만 끓이면 먹을 수 있는 라면이 등장하여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10분을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단 1분이면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인스턴트 식품 용기의 뚜껑은 거의가 깡통 따개로 한참을 따야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뚜껑에 붙어있는 고리를 손가락으로 당기기만 하면 되는 원터치 캔으로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소식을 주고받으려면 편지로 3~4일이 걸렸습니다. 그 후 전화가 있어서 어디서나 연락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전화도 사람이 집에 있어야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 불편함을 덜어주는 이동통신 핸드폰이 나왔습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통화가 가능합니다. 편지도 이메일로 즉시 보내고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본인이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열어봐야만 전달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이들은 이메일 대신 핸드폰 문자를 더 많이 이용한다고 합니다. 

먼 곳을 왕래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옛날에는 경상도나 전라도에서 한양까지 가려면 두세 달이 결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열차를 타고가면 두 시간 반이면 됩니다. 이처럼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기다리는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문명의 이기(利器)가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는 좋은 면이 있지만 반면 사람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드는 부작용도 낳고 있습니다. 조급한 마음은 기다리지를 못하고, 어려움이 있을 때 인내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 30장 18절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야고보서 5장 11절 말씀에는“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하셨습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기다리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아 누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서양 격언에“하늘은 기다릴 수 있는 자에게 모든 것을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시편 37장 7절에“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 축복하시고자 부르셨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축복과 이 세상에서 번성의 축복을 주시고자 부르셨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전혀 자격이 없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받아 누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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