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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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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막 5:25~34)
  

사람이 살아가면서 ‘살기가 힘들다’고 느끼게 되는 것 중의 하나는, ‘나하고 통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살아가면서 사람 사이에 벽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과 몸을 부딪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통한다.’라는 느낌보다는 ‘혼자’라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이 ‘소외’의 감정은 비단 정서적으로 민감한 몇몇 사람만이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느끼는 인간 실존의 보편적 감정입니다.
우리에게는 부모에게 할 수 없는 얘기가 있고, 친구에게 할 수 없는 얘기가 있고, 직장 동료 사이에 터놓고 할 수 없는 얘기가 있고, 동기간에 할 수 없는 얘기가 있고, 심지어 부부 사이에도 할 수 없는 얘기가 있습니다. 

결국 ‘소외’는 어느 시대든지 어느 사회든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고 살지 못할 때, 그리스도인이라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밀접하지 못할 때 끊임없이 경험해야하는 삶의 고통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이런 소외 속에 살아가던 한 여인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여인이 소외를 당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질병 때문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앓고 있던 병은 혈루증입니다. 
이 병은 하혈하는 병입니다. 

레위기 15장에서는 이 병을 ‘유출병’이라고 했는데, 아주 ‘부정한 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한군데만 인용해 보지요!

레 15:3-5절 “그의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함이 이러하니 곧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든지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막혔든지 부정한 즉 유출병 있는 자가 눕는 침상은 다 부정하고 그가 앉았던 자리도 다 부정하니 그의 침상에 접촉하는 자는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마치 지금 온 세계가 ‘돼지 인프루엔자’(swine influenza)환자를 격리하듯이 그 당시에는 유출병을 전염성이 강한 부정한 질병으로 여기고 유출병 환자들을 격리했습니다.

또 본문은 이 여인이 혈루증으로 앓은 기간을 열두 해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12’란 숫자는 하늘의 수인 ‘3’과 땅의 수인 ‘4’를 곱한 완전수입니다.
즉 이 여인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았다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길고 긴 세월을 고통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혈루증으로 인하여 이 여인은 다음과 같은 소외를 맛보았을 것입니다.

㉠ ‘종교적인 소외’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즉 유출병은 부정한 병이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실제로 그 여인은 그 병으로 인해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으며, 예배에도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았다’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겠어요?
유한한 인간으로부터 버림 받아도 정신 이상이 되고, 자살을 하는데 하물며 영원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가 영적으로 무디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 것이 차라리 천만다행인지 모릅니다. 
만일 그것을 느낀다면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 또 이 여인은 ‘사회적인 소외’를 뼈저리게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부정한 여인으로 성 바깥으로 쫓겨났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도, 사랑하는 자식들로부터도 차츰 외면당했을 것입니다. 
우리말에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12년 동안 앓았다면 누군들 그 곁에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건강하십시오! 
연세가 들수록 건강하셔야 합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단절을 경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 그리고 이 여인은 ‘경제적인 소외’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막 5:26절에 보면,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여인은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방법과 노력을 다 동원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양의, 한의, 민간요법......... 좋다는 것은 다 해봤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가진 돈을 다 쓰고 말았습니다. 
이 환자에게 돈이라도 있었다면 그 돈 때문에라도 그를 찾아오는 사람이 있었겠지요?
긴 병은 그 여인에게 돈 한 푼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경제로 인하여 또 다른 소외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종교적인, 사회적인, 경제적인 소외로 힘들게 살아가던 여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그 모든 소외의 원인이 된 혈루증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이 이야기가 성경에 나온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 일어날 기적으로 믿고 받아들이길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혈루증 여인이 되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고침을 받읍시다.

오늘 저는 본문을 중심으로, 
㉠ “이 여인의 치유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 “왜 예수님은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이 여인의 치유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막 5:27절에 보면, 두 가지 결정적인 사실이 이 여인에게 치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끼어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기서 “듣고”와 “손을 대니”라는 동사를 주의해보십시오! 
바로 이 사실이 여인의 질병을 고친 것입니다. 

1) “듣고” 

여러분, 복음서를 읽다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구원을 받고, 치료를 받고, 인생이 새로워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사건들을 보도하는 대목마다 “듣고”라는 단어가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요 5:24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니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생명 얻는 위대한 역사는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롬 10:13-15절을 보겠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구원 얻는 놀라운 역사도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에서도 이 여인의 운명은 예수님의 소문을 들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자마다 삶이 변화됩니다.
운명이 달라집니다.
팔자가 바뀝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이라는 사실입니다.

2) “손을 대니”

그 여인은 밀고 밀치는 사람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 여인은 혹시나 하는 어떤 기대와 소원으로, 막연하기는 하지만 어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28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적사건을 통하여 거듭거듭 확인하는 진리는, “행동하지 않는 믿음은 전혀 믿음이 아니다.”, “행동하는 믿음이 이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여인에게도 행동을 주저하게 만드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정한 몸으로 예수님을 만져서 그를 부정케 해서는 안 된다는 양심의 고발이 그의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이 일이 발각되었을 때 비난을 받게 된다는 생각이 그의 행동을 주저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런 내면의 회의와 두려움을 쫓아내고 행동했던 것입니다.
행동하는 믿음! 
그는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 순간 이 여인은 손끝을 타고 밀려오는 치료의 힘을 느꼈습니다. 
혈루의 근원이 말랐던 것입니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홍해를 가른 모세는 행동하는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유대전승에 의하면 모세가 지팡이를 들고 서 있을 때는 홍해가 갈라지지 않았답니다.
그가 홍해에 발을 옮겨 물이 무릎에 차이고, 허리에 차이고, 가슴에 차이고, 목에 차일 때까지 바다는 갈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윽고 물이 코까지 차오를 때, 그래도 모세가 주저하지 않고 믿음으로 나아갈 때 홍해는 갈라졌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행동하는 믿음이 기적을 일으킴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2. “예수님은 왜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을까요?” 

30절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예수님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질문은 다소 우문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고, 예수님께 접근하려고 서로 밀고 당기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의 손이 예수님의 몸에 닿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때문에 제자들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라고 볼멘소리로 대답을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다른 시선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제자들의 시선입니다.
제자들은 그냥 무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많은 무리 가운데 유독 혈루증 여인을 보셨습니다.
32절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그렇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우주 속에서 먼지 같은 나를 하나님께서 바라보고 계신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렇게 바라보신 사람들의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노아도, 아브라함도, 모세도, 세례 요한도, 바울 사도도, 삭개오도, 막달라 마리아도........
그들은 우리처럼 평범했으나 그들의 시선이 그들을 바라보고 계시는 주님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삶은 비범해졌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할 때마다 생각나는 찬송이 있습니다.
찬송가 134장입니다.
혈루증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을 잡습니다.
주님이 둘러보십니다.
여인의 시선과 주님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주님의 눈빛은 무슨 색깔일까?
주님의 시선에는 무엇을 담았을까?
연민, 사랑, 동정...........

2절을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그 사랑의 눈빛과 음성을 나는 잊을 수 없겠네 
그 갈릴리 오신이 그 때에 이 죄인을 향하여 
못자국난 그 손과 옆구리 보이시면서 하신 말 
네 지은 죄 사했다 하실 때 나의 죄 짐이 풀렸네
그 갈릴리 오신 이 능력이 나를 놀라게 하였네 
내가 영원히 사모할 주님 참 사랑과 은혜 넘쳐 
나 뵈옵고 그 후로부터 내 구주로 섬겼네 

이제 예수님이 여인을 바라보시고, 질문하신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이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그 순간이 지나면 “자신의 치유가 어쩌면 우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그때 내가 너무 흥분해서 내 병이 나은 것은 예수님의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내 병이 나을 때가 된 거지. 그렇게 약을 많이 먹었는데....... 그 약 효력이 어디 갔겠어?”
이런 생각에 사로잡힌다면, 이 여인은 병을 고쳤는지는 모르지만, 그 인생을 고치는 믿음을 갖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2) 또 이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능력을 고백하도록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면, 구원을 받았다면, 병 고침을 받았다면, 사랑을 체험했다면, 기도응답을 받았다면 반드시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속에 묻어둔 30년보다 3초의 고백이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서양 격언이 있습니다.
고백해야 합니다.

이 고백을 우리는 ‘간증’이라고 합니다. 
이 고백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전도를 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믿음을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게 이런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내 병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이 내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주님이 내 삶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막 8:38절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고백이 믿음을 성장시킵니다.

3) 결국 예수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이 여인의 믿음을 키우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세상에 믿음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찬송가에는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라고 고백하지 않아요? 
믿음은 살리는 것입니다! 
믿음은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승리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중요한 가장 큰 이유는 믿음은 관계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 막 5:3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여기보세요! 

주님은 이 여인을 ‘딸’이라고 부릅니다.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는 피상적인 만남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딸’이라는 특별한 부녀관계를 맺게 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관계가 맺어진 것이지요!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과 이 여인 사이는 부녀 관계로 맺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딸’이라고 불리면 다 된 것이 아닙니까? 
내가 주님의 딸인데 무엇을 걱정하겠어요? 
먹을 것을 걱정하겠어요? 질병을 걱정하겠어요? 살아갈 일을 걱정하겠어요? 
주님은 이 여인에게 이런 믿음을 주시려고 ‘누가 손을 대었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 예수님에 대하여 ‘듣는’ 것이 구원의 출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이 듣도록 전해야 합니다.

㉡ 행동하는 믿음이 이적을 일으킵니다.

㉢ 세상에 믿음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된 것입니다.
이 소외당한 여인이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딸이 되어 참 평안을 얻은 것처럼 여러분도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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