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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시 들어야 할 복음 (롬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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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들어야 할 복음 (롬 1:8~15)


 I. 들어가는 말 

오늘 아침 우리가 읽은 로마서 전체의 중심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그것은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사함 받고 의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가장 복된 소식을 말합니다. 바울은 바로 이 복음을 위하여 로마서를 썼습니다. 그래서 로마서의 서론에 해당하는 1장 1절부터 17절까지의 짧은 절수 안에서 바울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무려 7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14절에서 자신은 바로 그 복음에 빚진 자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바울은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한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잡아서 죽이던 자였습니다. 바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요...죄인 중에 괴수”(딤전 1:13, 15)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이런 모든 악행을 용서하시고, 오히려 그를 주님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엄청난 긍휼과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이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엄청난 빚을 진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그의 삶은 바뀌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다 갚을 수 없는 엄청난 사랑과 은혜의 빚을 진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복음에 빚진 자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하였습니다. 

II. 몸 말 

1. 왜 로마교회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였나?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 15절에서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 교회에 있는 교인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로마 교회의 교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믿는 자들의 무리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복음은 주로 누구에게 전하는 것입니까? 주로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은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복음이란 안 믿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전해야 한다는 상식을 넘어서,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였을까요? 

1) 로마의 교인들 
우리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로마에 있는 너희”기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것은 6-7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15절 “로마에 있는 너희” 6절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거기에 보면 로마교회의 교인들에 대한 명칭이 세 가지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1)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 받은 자들 
먼저 이 말씀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에 있던 너희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바 된 그리스도의 것들이란 말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 
그 다음에 바울은 계속해서 7절에서, 로마에 있는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와 사망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을 살리시기 위하여 그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로마에 있는 너희는 바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3)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 
뿐만 아니라 바울은 세 번째로, 7절에서 로마에 있는 너희를 향해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자”라는 뜻입니다. 원래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됐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는 말은 그들이 도덕적으로 거룩한 사람들이라는 말이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세 가지 신분을 가진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할 신분의식이기도 합니다. 

2) 다시 들어야 할 복음 
이제 우리는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갑시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인 로마의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바울이 혹시 지금 무엇인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더군다나 오늘 본문 8절 말씀에 의하면, 로마 교인들의 믿음은 온 세상에 “전파”되어 있었습니다. 즉 로마 교회 교인들의 믿음은 여러 지역에 소문이 날 정도였다는 말입니다. 로마 교회는 ‘믿음이 있는 교회’였습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 16장 19절에서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로마 교회 교인들은 믿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순종함도 있는 교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의 순종은 소문이 날 정도였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이런 교인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이유가 더더욱 궁금해집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믿음이 좋고 신앙생활 잘하는 교인들을 보고 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참으로 심각하게 로마의 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고 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 말은 바울이 로마의 교인들에게 찾아가 복음을 전하려고 여러 번 시도했었다는 말입니다. 아직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1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너희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이런 집요한 의지를 보아서, 바울이 지금 뭔가를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울이 이렇게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던 모습 속에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사실 많은 성경학자들이 논란을 했습니다. 성경 주석을 찾아보니까 무려 10가지 이상의 설명이 있습니다. 이 시간에 그 모든 내용들을 다 설명드릴 수는 없고, 결론만 말씀드리면, 그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결론이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슨 대단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너무나 당연하기에 잊고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즉 복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도 내가 복음을 전하겠다”는 바울의 이 말은, 복음은 로마교회에 또 다시 들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도 계속해서 들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3) 로마교회에 복음이 다시 들려져야 했던 이유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이에 대해서 대답을 하려면, 잠시 로마교회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이 지금 이 로마서를 쓰고 있는 때보다 적어도 20년 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물론 로마 교회를 누가 세웠는지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러나 적어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 서신을 쓰고 있을 당시에, 로마 교회는 이미 약 20년에서 25년이라는 역사와 전통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벌써 로마 교회 안에는, 첫 믿음의 순수성과 첫사랑의 열정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던 첫 번째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로마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었고, 이방인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혼합공동체였습니다. 즉 로마 교회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혼합체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방인들이 오히려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집단 사이에 문제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원에 대한 서로 다른 신학적인 입장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 유대의 율법을 준수할 것을 요구했고(특별히 할례를 받을 것을 강조), 그 결과 그들 사이에는 갈등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로마교회 교인들 가운데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플러스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 지킴을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그들이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던 두 번째 이유였습니다. 

더욱이 세 번째로 그 당시 로마는 전 세계의 죄악을 다 모아놓은 그런 도시였습니다. 우상을 섬기고, 동성애를 하면서 성적으로 문란하고 (롬 1:26-27) 타락이 극에 달해 있었고,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전 세계를 지배하는 교만한 도시, 그것이 로마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아니하고(롬 1:21), 온갖 죄악의 불꽃들(롬 1:29-31)이 넘실대는 도시가 바로 로마였습니다. 이렇게 로마는 전 세계의 모든 죄악을 다 모아놓은 죄악의 진열장과 같은 도시였습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세워진 로마교회는 유혹과 도전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비록 로마교회는 세워진지 25년이나 되었고, 그 믿음과 순종이 소문난 교회였지만,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상당히 문제가 많았고, 그 믿음이 흔들릴 가능성이 아주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외적으로 그 당시 로마의 환경은 충분히 로마 교인들의 신앙에 도전적인 상황이었고, 또한 내적으로도 믿음과 율법의 관계로 인한 갈등, 그리고 첫사랑의 감격과 열정을 잃어버리는 문제 등, 로마교회의 교인들 가운데는 이런 문제로 갈등을 겪고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구요? 11절 말씀을 보십시오..(“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여러분, 우리가 어떤 믿음이 좋고 흔들림이 없는 사람을 보고, “야, 내가 네 믿음을 좀 견고하게 만들어야겠다”라고 말하나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너희의 믿음을 견고케 해야겠다”는 이 말 속에는 무슨 뜻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까? 그것은 로마 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어떻게 되고 있다구요? 흔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바울은 여러 가지 문제들로 말미암아 그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로마교회 교인들을 다시 한 번 견고하게 세워주기 위하여,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은사란 곧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은 복음을 통하여 “믿음의 감격”과 “믿음의 열정”을 잃어버린 로마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불을 다시 붙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은혜가 아닌 율법을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첫사랑의 감격을 잃어버린 성도들에게, 여러 가지 세상적인 유혹에 직면해 있는 그들에게, 복음을 다시 한 번 전함으로 그들에게 영적 재각성을 불러일으키기 위하여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로마서를 쓰게 된 중요한 동기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2.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우리들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 복음이 다시 필요하지 않습니까? 로마 교회 교인들에게 이 복음이 다시 들려져야 했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 복음이 다시 들려져야 하지는 않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필요로 하는 사람은 오늘날 교회밖에 보다 교회 안에 더 많이 있다”고 말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다시 한 번 깨어져야 할 사람이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그 굳고 교만한 마음이 녹아져야 할 사람이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고, 예수님의 이름 앞에서 자신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은혜를 받아야 할 사람이 교회 밖이 아니라 교회 안에 더 많이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앞서 우리 믿는 이들이 가져야 할 3가지 신분의식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와 관련하여 여러분에게 한 번 도전과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1)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것(고전 3:23)이라고 하는 확신과 감사가 있습니까? 나는 사나 죽으나 오직 예수의 것(롬 14:8)이라고 하는 고백이 있습니까? 

제가 한 동안 담임목사로 섬겼던 교회에서 그 당시에 46살 밖에 되지 않던 한 성도님이 갑자기 뇌졸중으로 미쳐 손을 쓸 틈도 없이 세상을 뜬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참 잊을 수 없는 이들 가운데 한 분입니다. 그 한 주전만 해도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한 성도를 심방했을 때에, 같이 가서 그 성도를 향해 “성도님, 나와 함께 기도원을 한번 가자”고 웃으면서 위로하던 그가, 불과 닷새 뒤에 그렇게 갈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그 황망함 가운데서도 그 분을 보내드릴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항상 이렇게 고백하던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많이 배운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웃으면서 제게 이렇게 말하던 분이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가방 끈이 짧아요”라고 말입니다. 많이 못 배웠다는 거지요. 그는 하루 벌어 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던 그런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나 맑고 순수한 심령을 소유한 분이었는지 모릅니다. 그가 언젠가 제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 나 같은 죄인을, 나같이 보잘 것 없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으면 지옥의 땔감으로 밖에 쓸 수 없는 나를 위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삼아주시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목사님, 저 예수의 것입니다. 저 예수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감격으로 고백하던 분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분이 가신 곳이 어디인지를 너무나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그 황망함 속에서도 그를 주님께 보내드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제가 감히 여러분들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밤에 내가 그렇게 부름을 받는다면 “아멘! 주님 저를 주님계신 곳으로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에 이 질문에 혹시 우리 가운데 단 한 분이라도 확실하게 고백할 수 없는 분이 있다면, 오늘 이 설교는 바로 그를 위한 것입니다. 그가 바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사람입니다. 교회에 10년을 다녀도, 20년을 출석해도, 교회의 집사라 해도, 권사라 해도, 장로요, 목사요, 신학교 교수라 해도 이 확신이 없다면 그가 바로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사람입니다. 

2)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인가? 
그 다음에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에 대한 확신과 감사가 있습니까? 나는 “복음에 빚진 자”라고 하는 확신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나 같은 죄인 살리신”(305장)을 부를 때에 내 마음에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있습니까? (“수지 맞았습니다” 간증 이야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는 죄로 말미암아 죽어 마땅한 나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심에 대한 감격이 내 심령 속에 있습니까? 만일에 저와 여러분의 심령 가운데 이 감격의 눈물, 이 감사의 눈물이 메말라 있다면, 바로 저와 여러분이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3) 나는 성도인가? 
우리는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부름 받은 거룩한 백성들이요, 왕같은 제사장임을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들은 성도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성도가 무엇입니까? 거룩한 백성입니다. 

거룩한 백성은 무엇입니까? 구별된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예배를 드릴 때에는 성도인 것 같은데, 교회만 나가면 성도인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인지가 구별이 안 됩니다. 누군가가 한국교회에는 “광주리 교인”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광주리가 물속에 있을 때는 그 속에 물이 가득 차지만, 광주리를 물속에서 올리면 광주리 속의 물은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새어 버립니다. 

이같이 교인들 가운데도 교회 안에 있을 때, 특별히 예배를 드릴 때에는 신앙이 충만한 것 같고, 성도(구별된 백성)인 것 같으나, 세상 속으로 나아가면 도무지 성도인지 아닌지 구별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거짓말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욕하고, 부정직한 행동을 하고, 도무지 세상과 구별된 모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사회에서 부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하면 꼭 거기에 교인들이 끼어 있습니다. 이런 한국교회를 향하여 지금 세상 사람들은 ‘개독교’라고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비난하는 말을 들어보면, 솔직히 많은 경우에 우리 교회가, 교인들이 그 빌미를 준 내용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정말이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되게 살라고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정도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정말 “나는 구별된 자”라는 자의식, 나는 성도라는 자의식이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3.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한다.
 
여러분,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은 또 다시 우리들에게 들려져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들려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다시 듣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항상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를 묵상하고 감사하세요. 그것이 복음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첫째로, 먼저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모든 값을 치러 주셔서 내가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감사하십시오. 그것이 복음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바 된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고전 3:23, 6:20, 7:23). 

그런데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기 위하여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무엇으로 우리의 죄의 값을 다 치루고 참 자유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아무리 고행을 하고, 선행을 한다 한들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로또복권에 당첨이 되어 수십억, 수백억을 교회 앞에 헌금한다고 한들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룰 수 있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갚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어 주셨습니다.(다 이루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입니까? 무엇이 복음입니까? 이것보다 더 귀한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까? 

그러므로 둘째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를 쉬지 말고 묵상하고 감사하세요. 그것이 복음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누구입니까? 우리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늘 묵상하고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복음을 계속해서 다시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또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이 엄청난 사랑을 받을 만한 무슨 자격이 있습니까?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하나님의 이 엄청난 사랑을, 십자가에서의 그 귀한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저를 위해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이야기입니까? 그러므로 내가 얼마나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을 입고 있는지를 계속 묵상하십시오. 그것이 복음을 다시 듣는 것입니다. 

또한 셋째로,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도임을 순간 순간 기억하십시오. 나는 누구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입니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기에 넘어지고, 실수하고, 또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사탄은 우리를 이렇게 공격합니다. “그것 봐라. 네가 그러고도 성도냐? 네가 그러고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내가 바로 너의 그 연약함 때문에, 너의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 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고 너를 내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내 백성으로 구별하여 세웠느니라. 그리고 내 아들 예수의 피는 너의 과거의 죄와, 현재 너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짓는 죄, 그리고 앞으로 지을지도 모르는 모든 죄까지도 다 용서하고도 남는다. 네가 너의 죄와 실수를 순간 순간 고백하기만 하면 말이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 해도, ‘너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나의 소유된 백성’”(벧전 2:9)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래서 우리는 성도가 되어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복음이 아닙니까? 무엇이 복음입니까? 내가 값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는 것, 내가 사랑을 받을 만한 무슨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남들보다 더 잘나고, 똑똑하거나, 가진 것이 더 많은 것도 아닌데, 나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고, 성도로 삼아주심, 바로 이것이 복음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이 귀한 사실들을 감사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복음을 계속해서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늘 복음을 계속해서 들을 때, 은혜가 메말라 병들어 버린 우리의 심령 위에 은혜의 단비가 내리게 됩니다. 그리고 그 말라 비틀어진 심령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은혜의 단비를 맞고 소생하는 기쁨과 감격이 되살아 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만 들어도 또 다시 눈물이 흐르며, 내 심령 깊은 곳에서 감사와 감격이 넘쳐 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복음에 빚진 자된 심령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4. 복음에 빚진 자된 아이 이야기 

여기 이 복음에 빚진 자된 심령으로, 죽어서 사랑하는 아빠를 예수님께 인도한 한 초등학생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예수님을 너무나 잘 믿었습니다. 초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받아, 복음에 빚진 자된 심령을 소유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부모님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그 사실을 너무나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자신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으나, 엄마 아빠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예수님을 나만 믿어서는 안 되는데, 아빠도 믿어야 되고, 엄마도 믿어야 되는데” 이 아이는 늘 이 빚진 자된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안 믿는 아빠를 보고 날마다 예수 믿자고 졸라대었습니다. 주일이 되면 엄마보고 교회가자고 졸라댑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들은 단지 그 아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귀엽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늘 대답하기를 “그래 그래, 너부터 먼저 믿어. 엄마, 아빠는 틈이 나는 대로 믿을게” 하면서 늘 적당히 넘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이 아이는 교통사고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부모의 슬픔은 무엇으로도 달랠 길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천국으로 보낸 후, 이 아빠가 죽은 아들이 사용하던 방에 들어가 그 아이의 유품을 하나 하나 만져보았습니다. 아이의 땀내음이 나는 옷도 만져보고, 아이가 읽으며 웃고 즐거워하던 동화책도 만져보고, 아이의 손 떼가 묻은 장난감도 만져보고, 쓰리고 아픈 가슴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노트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노트는 아이의 일기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기장을 펴본 아빠는 기절할 것 같이 놀라고 말았습니다. 죽기 며칠 전에 아이가 쓴 일기의 내용이 눈에 확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이런 기도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우리 엄마, 아빠 꼭 예수 믿게 해 주세요. 하나님, 엄마 아빠가 예수 믿기 위해서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죽어도 좋아요. 내가 죽어서라도 엄마, 아빠를 예수 믿게 해 주세요” 
이 아빠는 그 아들의 유언과도 같은 기도문을 읽다가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후회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도 중요한 것인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생명까지 내어놓고 내가 믿어야 할 일이었던가?” 마침내 그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교만과 죄를 회개하고, 자신의 아들이 그렇게도 원했던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생명과 자신의 구원을 맞바꾼 셈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이 이야기의 아버지는 바로 지난 반세기 동안 전 세계에서 수많은 청년들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 대학생 선교회(C.C.C)의 국제본부 부총재입니다. 
사랑하는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이 어린아이의 복음에 빚진 간절한 심령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의 주변에 아직도 복음을 모르고 사는 형제, 자매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생각나는 이름과 얼굴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 분들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들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지 않습니까? 만일에 그렇지 못하다면, 저와 여러분은 로마교회가 복음을 다시 들어야 했던 것처럼 복음을 다시 들어야 합니다. 

III. 나가는 말 

새문안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다시 들은 복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의 귀한 피와 물로 값 주고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엡 1:7).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목숨까지 내어 놓으신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누가 뭐라 해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택한 받은 성도요,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리고 이 은혜는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 그러기에 복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의 복음을 다시 들은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변에 아직도 이 복음을 듣지 못해서 죄와 사망 가운데 헤매고 있는 이들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품고 있는 태신자들을 향해 나아가 이렇게 전하십시오. 

당신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당신도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은 당신이 믿기만 하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 나아가 이 귀한 선물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승중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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