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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적의 힘과 부동의 상대 (단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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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의 힘과 부동의 상대 (단 3:1~7)


당신의 과거가 어떠하든지, 당신의 생각이 어떠하든지, 주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다음 주 주일 1부 예배 후 아동부 학생들은 중국으로, 청년부에서는 필리핀으로 Vision Trip을 떠납니다. 흔히 단기 선교라고 지칭하는데, 현지의 선교사님들을 통해 조언을 들어 보면, 단기적으로 선교가 가능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선교한다 하고, 오히려 장기적으로 체류하며 선교하는 현지 선교사님들이 오히려 어려움에 처할 때도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학 중 하게 되는 짧은 기간의 현지 체험 자체가 필요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말도 덧붙입니다. 이 기간을 통해서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는 중요한 체험을 하면서 비전을 갖고 키워 나가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라는 말을 하면서 단기 선교라는 말보다는 Vision Trip 이라는 말로 부르면 좋겠다는 대안을 제시합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Vision Trip을 떠나는 우리의 젊음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들이 Vision Trip을 떠나기 전 훈련의 한 과정으로 지난 목요일 서울 한강에 있는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다녀왔습니다.
미지의 땅, 조선에 복음을 들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다 삶을 바친 선교사들과 순교자들.
그 분들은 주님을 영접하고, 그 분이 생명의 창조자시오,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한 분들이, 그것에 반한 이 땅의 무소불위의 권력에 맞서 싸우시던 믿음의 승리자들이십니다.

‘무적의 힘’을 나타내던 이 땅의 권세 앞에, 그것에 굴복할 수 없어서 움직일 수 없는 부동의 믿음으로 맞서던 믿음의 승리자를 생각하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끊임없이 반복되어 기술된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이 기록된 유일한 이유를 찾으라고 한다면 이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죽음의 자리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또 하나의 놀라운 구원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한 무리들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보살핌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무적의 힘을 휘두르는 느부갓네살에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이 부동의 상대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를 살펴 보며 2주간에 걸쳐 함께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1. 무적의 힘.

느부갓네살은 신바벨론의 강력한 왕입니다. 애굽과의 갈그미스 전투 때 유다 왕 여호야김 왕이 배신하자 노한 느부갓네살 왕이 유다의 왕족들이 포로로 잡혀가는데 이 때가 제1차 포로기입니다. 그 후 3차에 걸쳐 포로로 끌려가고 결국 남유다의 종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이 때는 바벨론이 세계를 제패한 시대였고,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시대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 권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때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은 극에 달하여 자신을 상징하는 금 신상을 세워 그 금신상에 예배하고 절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의 모습만으로도 기세등등한 무적의 힘, 느부갓네살의 위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단3:1-7)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육십 규빗이요 너비는 여섯 규빗이라. 그것을 바벨론 지방의 두라 평지에 세웠더라. 2 느부갓네살 왕이 사람을 보내어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관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을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게 하매 3 이에 총독과 수령과 행정관과 모사와 재무관과 재판잔과 법률사와 각 지방 모든 관원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의 낙성식에 참석하여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신상 앞에 서니라. 4 선포하는 자가 크게 외쳐 이르되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언어로 말하는 자들아. 왕이 너희 무리에게 명하시나니 5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라. 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7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언어를 말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이 세운 금 신상에게 엎드려 절하니라.

1절을 보니 금신상의 높이는 60규빗, 한 규빗이 45cm이니 27m입니다.
2-3절에서는 낙성식은 주변의 각 나라 축하 사절단들까지 왔습니다.
4절에 한 ‘선포하는 자’가 수많은 백성들 앞에서 ‘크게 외쳐’ 왕의 칙령을 전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인종과 언어가 상이한 각 나라 백성들이 모인 바벨론 제국의 이 초대형 의식에서 느부갓네살 왕의 절대적인 명령은 누구에게나 적용되었고 예외란 허용되지 않는 기세입니다.

5, 7, 10, 15절에서 나오는 악기들의 면면은 오늘날로 치면 4관 편성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악에 맞추어 금신상에게 절을 하는 것이 오늘 의식의 하이라이트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의 경고는 섬뜩하게도 매우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단3:6) 누구든지 엎드려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맹렬히 타는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라 하였더라.

이럴 때 우리 입에서는 저절로 신음소리가 나옵니다.
도무지 어떤 다른 방법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없어집니다. 질 것 같습니다. 그리고 끝내 포기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의 앞장인 2장과 연결시켜서 3장을 생각할 때, 이 장면은 대단히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2장에서 바벨론 왕은 꿈을 꿉니다. 그의 꿈에는 장차 이루어질 역사의 방향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가 담겨 있었습니다. 이 꿈을 다니엘이 해석합니다. 해석을 들은 느부갓네살은 감동을 받아 기뻐하기까지 했습니다.
2장 45절에서 다니엘이 꿈에 대한 해석을 끝냈을 때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단2:46-47)  이에 느부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고 명하여 예물과 향품을 그에게 주게 하니라. 47 왕이 대답하여 다니엘에게 이르되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네가 능히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었으니 네 하나님은 또 은밀한 것을 나타내시는 이시로다.

그는 감격한 나머지 다니엘의 하나님이 진짜 신이라는 고백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다음에 예측할 수 있는 사건은 무엇이겠습니까? 감동을 받고 이런 고백까지 나왔으니까 이쯤 되어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회심을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정석인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은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을 높여서 도지사로 임명하고 출세를 시켜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3장으로 넘어가서 곧장 느부갓네살 왕은 금으로 신상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대뜸 거기에 절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느부갓네살이 다니엘이 해몽할 때에 순간적으로 “야, 내가 꾼 꿈의 내용 까지 알고 그것을 해석까지 하는 저 다니엘의 신, 참 신통하구나. 놀랍구나”라고 감동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에 인 감동에 불과했습니다. 학자에 따라서 그 꿈과 금신상을 세운 시기의 연차를 적게는 5년에서 길게는 20여년 까지 보기도 합니다. 그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서 감동은 옛 추억에 불과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감동이 신앙의 고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고 인사할 때 “은혜받았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 설교자는 기쁩니다. 저도 역시 그 기쁨이 큽니다.

그런데 우리 조금 심각하게 생각해 봅시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떻다구요. 그래서 어쩌자구요.
사람들은 열린 음악회를 통해서도 감동을 받습니다.
아침 설거지하다 보게 되는 아침 드라마, ‘하얀 거짓말’을 통해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감동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드라마를 통해 감동받고 어떻게 되었나요?
수련회를 가서, 혹은 찬양을 하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감동하고 은혜 받고 눈물까지 흘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증거의 척도일 수는 없습니다.

감동은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신앙에 감동(눈물)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감동만으로는 사람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맞았어. 네 하나님이 진짜로구나. 귀신같이 맞히는 걸?”
이런 고백을 한 후 즉각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하는 느부갓네살 왕의 모습을 보십시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습니다. 설교를 듣고 “그럴 듯하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상태가 더 나빠지기가 일수 입니다.
나에게 던져진 말씀이 참으로 내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꿀 때까지, 주 앞에 순종할 때까지 감동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를 다스리시는 주님이 내 안에 거하시느냐가 핵심 포인트입니다.
그렇게 한 때 감동만 했었던 느부갓네살은 3장에 와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우상을 세우고 자기의 권세가 미치는 모든 이들에게 그 우상을 향하여 절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명령을 어기면 불로 태우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누가 항거할 수 있나요? 여기서는 그 명령의 합당함과 부당함을 논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지금 그것을 논할 여유가 없습니다. 살고 싶으면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음악 소리에 맞추어 넙죽 엎드려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실인 것입니다.
당시 이 말을 듣고 있던 일반 대중들이 이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든지 쉽게 마음의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는 일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오히려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 이상스러울 지경입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이라면 겪지 않아도 될 어려움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빈정거립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에게 준비된 풀무불처럼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빈정거림과 무시와 따돌림의 풀무불을 준비해 놓습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압력 때문에 타협을 하면서 적당히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이란, 양쪽을 모두 취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무적의 힘을 만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포로로 잡혀 온 것처럼,  598년에 여호와긴 왕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온 사람들 중의 제사장이었던 에스겔 선지자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동시대의 선지자였던 예레미야가 눈물로 유다의 멸망을 예언하였던 것에 반하여,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비전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멸망당한 조국이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느냐며 낙담해 있을 때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골짜기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곳에는 뼈가 가득한 곳이었고, 뼈의 상태를 말랐다라고 까지 표현할 만큼, 어떤 소망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겔37:1-2)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내게 임재하시고 그의 영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골짜기 가운데 두셨는데 거기 뼈가 가득 하더라. 2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소망을 선포하지만, 패망한 아픔 때문에, 어떤 소망도 갖고 있지 못하고, 오히려 무엇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겠느냐며 지레 포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현재 모습이 뼈로, 그것도 마른 뼈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겔37:3)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시험문제를 받은 어떤 학생이 답을 몰라 헤메다가 이런 답을 남겼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지를 채점하시는 교수님은 이렇게 점수를 매겼답니다.
“하나님은 100 점, 너는 빵점”

우리는 그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비록 마른 뼈였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가니 이스라엘의 큰 군대가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힘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심이 결국 마른 뼈로 하여금 하나님의 큰 군대가 되게 하심처럼, 우리 삶의 메마름이나, 넉넉하지 않음, 연약함, 죄 많음은 결코 문제 거리가 될 수 없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에게 골리앗은 “무적의 힘”입니다.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모욕하지만, 이스라엘의 장수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합니다.
상대방은 ‘무적의 힘’이었던 골리앗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아무리 상대할 사람을 불러내지만 어느 누구 하나 나서지 못합니다.
두려워 떱니다.
상대해 보기 전에 이미 기가 질려 죽은 듯 숨어 있습니다.
도무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백성과 군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말 골리앗이 무적의 힘이었을까요?

다윗은 골리앗이 우습게 보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무적의 힘’의 원천은 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들고 나간 물맷돌, 이것은 설사 골리앗이 맨 몸으로 나올지라도 그를 대항할 무기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지금 골리앗은  칼과 창과 단창으로 무장하고 나오고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 골리앗 앞에서 호령하고 있는 다윗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지금 연약한 소년의 몸과 거대한 무적의 힘처럼 보이는 장수간의 싸움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공포스럽게 만든 자와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와의 대결입니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자와의 대결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와의 대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다윗은 물매에 돌을 넣어 돌리고, 그것으로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을 우리가 잘 알고 믿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물맷돌을 던진 것이 아니라 믿음에 기초한 거룩한 분노로 골리앗을 상대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눈에는 골리앗이 무적의 힘 같지만,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다윗에게는 무적의 힘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힘으로 골리앗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모두 ‘무적의 힘’이라며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무적의 힘’은 따로 있다며 그 이름으로 나선 다윗.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바로 다윗이 믿고 섬기던 그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의 첫 목회 이후, 어렵고 힘들 때마다 즐겨 부르던 찬양입니다.

70장. 피난처 있으니
1절 /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2절 / 이 방이 떠들고 나라를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3절 / 만유 주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 데 없네.
4절 / 높으신 하나님 우리를 구하니 할렐루야
        괴롬이 심하고 환난이 극하나 피난처 되시는 주 하나님.

오늘 저와 여러분 앞에 오직 하나님만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이 땅의 것이 ‘무적이 힘’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적의 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 순간의 감동으로 살아가는 자 되지 마시고,
무적의 힘이신 예수 그리스도 편에 서 있어 영육 간에 승리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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