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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깊은 곳에서 (시 13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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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곳에서 (시 130:1~8)

 
바다는 깊이를 측정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세계에서 가장 깊은 바다는 필리핀 동쪽에 있는 마리아나 해구라고 주장합니다.  이곳은 깊이가 보통 일만 미터가 넘는다고 추정합니다.  1960년 미국의 잠수선인 ‘트리에스테 호’는 바다 거의 밑까지 잠수한 적이 있었으나 해구의 바닥까지는 누구도 탐사하지 못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깊은 곳에 물고기가 산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과학자들이 바다 깊은 곳에 사는 물고기들의 사진을 찍어서 공개를 했습니다.  이곳은 완전한 어두움의 세계이고, 또한 이 정도의 깊이면 수압이 1,600마리의 코끼리가 누르는 압력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 곳에서 물고기가 삽니다.  그 물고기 이름을 ‘snail fish’라고 하는데, 우리말로는 ‘꼼치’라고 부릅니다.  자세히 보면 올챙이 같고, 꼬리가 있어서 이렇게 이름을 붙였습니다.  깊은 바다에도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자연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에 생명체는 신비로울 뿐입니다.

오늘 우리는 시편을 읽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시인도 깊은 곳을 강조합니다.  지금 시인이 인생에 깊은 곳에 처한 것입니다.  바다의 깊은 곳처럼, 인생에도 깊은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곳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처한 고난과 시련을 말합니다.  빠져나올 수 없는 어려움입니다.  너무도 깊어서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입니다.  그것은 바다 깊은 곳처럼 깜깜합니다.  하지만 바다 깊은 곳에 꼼치가 살듯이, 그는 절망하지 않고 꿈틀거리고 움직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으로 극복해 갑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믿음의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과연 시인이 수심 깊은 곳에서 한 것이 무엇일까요?

우선, 기도입니다.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깊은 곳에서 주께 부르짖었나이다 주여 내 소리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시인은 깊은 곳에서 먼저 기도합니다.  보통 기도가 아니라 부르짖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냥 기도할 수 없어서 통곡하고 애통하며 울부짖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깊은 곳에서 시인이 보여준 모습입니다.

부르짖는 기도는 어떤 기도일까요?  이것은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는 기도입니다.  먼저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보통 말할 때와 절박한 순간에 말하는 말이 다르듯이, 보통 기도와 부르짖는 기도가 다릅니다.  이 말의 어원은 2가지 의미에서 사용됩니다.  

하나는 해산하는 여인이 절규하는 것에서 나온 말입니다.  해산할 때 여인이 어떻게 합니까?  고통과 아픔 속에서 절규합니다.  바로 그 소리입니다.  또한 이 말은 사람이 위급하고 절박한 순간의 구조와 도움을 요청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만약 산속 깊은 곳에 홀로 남아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어두움이 깔려오고, 우둑우둑 비까지 내립니다.  이런 때 누군가에게 구조를 요청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떻게 말하겠습니까?  그때에도 조용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조용한 사람도 그때는 소리를 지르는 법입니다.  누구 없느냐고, 도와달라고 목이 쉬어라고 부르짖을 것입니다.  부르짖어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입니다.

또한 부르짖는 기도는 솔직한 기도입니다.  지금 나의 사정과 형편을 그대로 표현하는 기도입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아버지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숨길 것, 부끄러운 것이 뭐가 있습니까?  

우리가 그런 심정으로 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나의 형편을 그대로 털어놓는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먼저 나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속을 잘 드러내지 못합니다.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문화이고, 심지어는 돈독한 신앙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파도 자꾸 숨기려고 합니다.

서양문화는 노출의 문화이고, 동양문화는 숨기는 문화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옷은 노출이 심하지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가립니다.  이런 동양문화는 유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유교문화의 양식(樣式)중에 하나가 바로 체면문화입니다.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쬐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대부(士大夫)의 가문에서는 아무리 자식이 귀여워도 그것을 겉으로 나타내는 것을 금기시 했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감정표현을 억제시킨 것입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특히 한국인의 특징인 '무표정'은 바로 그러한 금기문화의 산물이라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매일 표정 없이 누구와도 싸울 것 같은 험악한 표정들은 감정을 억제당한 분노의 표시이고, 뿌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체면문화는 실리보다는 명분을 중시합니다.  명분은 남을 의식하는데서 시작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부끄럽다, 남의 눈이 있지 않느냐, 남들이 뭐라고 하겠느냐.'를 따졌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굳어져 살아왔고, 자기감정을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달아야 합니다.  좋을 때 좋은 것을 표현하고, 힘들 때 힘든 것을 말해야 합니다.  감정의 표현이 있어야 자기도 건강하고 모든 사람을 건강하게 합니다.  울 때 울어야 합니다.  많이 울어야 하고, 남자도 울어야 합니다.  남자가 더 많이 울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특히 깊은 곳에서 아플 때 더욱 표현해야 합니다.  부르짖는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지금 나의 심정을 아뢰어야 합니다.  아프다고, 힘들다고, 괴롭다고 말해야 합니다.  성경에 소개된 믿음의 사람들은 인생의 깊은 곳에서 이처럼 부르짖는 기도로 나아갔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다윗이요, 한나입니다.  

본문도 다윗이 지은 시라고 추정합니다.  다른 시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의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시18:6)...”  또한 한나도 정말 서럽고 괴로울 때 마음이 아플 때 눈물과 통곡으로 성전에 엎드렸습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우리는 부르짖는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강같이 임하고, 빠져나갈 길이 환하게 보일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자기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3절과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하게 하심이니이다“  시인은 인생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런데 간구하면서 자신이 죄가 많은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 회복과 구원을 요청할 자격도 없음을 발견합니다.  만약 주께서 죄를 따진다면 감히 설수가 없음을 배웁니다.  이것이 깊은 곳에서 발견한 시인의 고백이고, 또한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평온할 때는 자기를 잘 돌아보지 못합니다.  돌아볼 시간이나 여유가 없습니다.  하지만 고난이 오고, 아픔이 삶에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비로소 이제 자신을 봅니다.  믿음의 사람일수록 아주 깊이 자기를 들여다봅니다.  내가 죄인이고, 감히 하나님 앞에 설수 없는 사람인 것을 눈물로 호소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난과 관계없이 이제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인생의 깊은 곳에서 발견하는 진리이고, 또한 이것이 우리의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오묘한 손길입니다.

저는 종종 병원에 심방을 갑니다.  병원에 가면 왜 그렇게 환자가 많은지 정말 깜짝 놀랍니다.  평상시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만큼 환자가 많다는 것이겠지요.  투병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어느 때 내가 환자가 된 착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분명 격려하러 갔는데 도리어 내가 위로를 받고 오는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환자들이 성숙한 것을 느낍니다.  환자들에게 많이 듣는 것은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말입니다.  하나같이 그렇게 고백합니다.  병원에 오기 전에는 그냥 평범하게 보였는데, 아프고 난 뒤부터 세상이 달리 보인다는 것입니다.  세상만이 아니라 사람도 달라 보이고, 모든 것이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이 달라진 것은 없고, 사람도 달라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달리보이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기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아픔의 순간에 자기를 보게 되니 모든 것이 달리 보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깊은 곳에서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이것은 분명 놀라운 변화요, 놀라운 안목입니다.  세상이 달리 보이는 것만큼 세상을 새롭게 사는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도, 아픔도 매번 무익한 것만은 아닙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자기를 돌아보는 힘이 생겼으니 유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육신을 잃고 영혼을 살릴 수 있다면, 몸은 힘들어도 영혼에 새로운 힘을 얻는다면 이것보다 큰 유익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래서 
시편의 저자는 이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시119:71)

인생의 깊은 곳에서 이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제 세상이 달라 보여야 합니다.  매일 보던 사람들도 달리 보여야 합니다.  삶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섭리임을 깨닫고 수용해야 합니다.  인생에 어느 것도 버릴 것이 없음을 배워야 합니다.  깊은 곳에서 자기를 돌아보며, 성숙한 믿음의 사람으로 더 소중한 것을 얻으며 극복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본문 5절과 6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  시인은 인생의 깊은 곳에서 부르짖으며 기도하고, 자기를 돌아보며 하나님을 깊이 만나더니, 이제 기다립니다.  기다리겠다고 다짐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이 인생의 깊은 곳에서 보여준 모습입니다.  깊은 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기다림을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전쟁이 많던 시대에 파수꾼은 아주 중요한 일을 맡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밤새도록 졸음을 이기며 적진을 살피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군대에서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보통 3시간 초소에서 지내는데 시간이 가질 않습니다.  한참 간 것 같은데 겨우 10분, 30분이 지났을 뿐입니다.  날씨가 쌀쌀하고, 음산한 날은 더욱 시간이 가질 않습니다.  피곤하고, 졸음이 엄습해 보면 시간이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때만큼 괴로운 순간이 없습니다.  3시간이 마치 3일, 3달 같은 지루함을 갖게 합니다.  그래도 기다리면 결국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리고 교대하는 시간이면 먼동이 트는 아침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곤 했습니다.  

이것이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는 모습입니다.  바로 그 모습 그대로 지금 여기 시인은 인생의 깊은 곳에서 아침을 기다립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기다리고, 또한 회복을 기다립니다.  결국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하나님이 끌어 올려주셨습니다.  그래서 40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여러분, 삶은 한마디로 기다림의 연속입니다.  인생은 기다림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신앙 역시 기다림입니다.  기다리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기다리지 않은 것이 하나라도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주부가 쌀을 씻어 밥통에 올려놓고 기다려야 밥이 됩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 빨리 먹으려고 해도 기다리지 않으면 밥이 되지 않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려 놓고 기다려야 합니다.  아무리 베테랑의 농부라도 기다리지 않고 열매를 거두는 방법은 없습니다.  비행기에 몸을 싣고 기다려야 목적지에 도달합니다.  비행기에서 지겹다고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다림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대표적인 속성 중에 하나가 바로 기다림,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기다림 때문에 내가 살고,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인내하지 않고 그때그때마다 우리의 잘못한 대로 벌을 내리신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가장 잘 표현한 것이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이십니다.  탕자가 집을 나간 뒤부터 아버지는 아들을 기다립니다.  한순간도 아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오늘도 내일도 돌아올 날을 기다립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돌아올 때 맨발로 나가서 아들을 맞이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참고 또 참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십니다.  오늘도 죄 많은 나를 기다리시는 그분의 은혜와 사랑이 있기에 내가 힘과 용기를 갖고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깊은 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오직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고통과 시련에서 건져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의 신앙에서 하나님의 뜻은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이런 믿음으로 오늘도 기다리십시오.  조금만 더 인내하십시오.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제 깊은 곳에서 빠져나갑니다.  어둠이 지나가고 새벽이 옵니다.  모든 고통과 아픔이 지나가고 회복의 은혜가 임합니다.  한순간에 역전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곳이 인생의 깊은 곳이라도 낙망하지 마십시오.  그곳에서 부르짖고, 자기를 돌아보며, 조금만 기다리면 기가 막힐 웅덩이와 깊은 수렁에서 우리를 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삶의 현장에서 말씀을 통해 위로받으시고 말씀을 붙잡고 한주간도 승리하며 살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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