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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스라엘의 우회 (출 13: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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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우회 (출 13:17~22) 
 
 
❚거룩한 우회

운전을 하다보면 가끔 길이 막혀 있고 표지판에 “우회하시오”(迂廻, 멀 우, 돌 회 자를 쓰며 영어로는 detour라고 하지요)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길은 안 되니 다른 길, 먼 길로 빙 돌아가세요.” 이런 뜻입니다. 그러면 시간도 낭비하는 것 같고 “지금 바쁜데 왜 돌아가라는 거야?” 하고 솔직히 짜증도 나지요. 하지만 그 우회하라는 표지판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도로공사를 하고 있든지 안전 문제가 있든지 말입니다. “에이 재수 없어, 바쁜데 뭐야” 하고 그 길로 강행하게 되면 산사태로 끊긴 길을 만나든지 큰 코 다치게 됩니다. 그러니까 고집 부리고 내 뜻대로 하려고 들지 말고 “돌아가시오” 하고 좋은 말로 할 때 잘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회(detour)입니다.

성경에도 이 ‘우회’가 나옵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로 못 가고, 이 길이 분명히 지름길인데, 이 길로 가면 빠른데 하나님이 ‘우회’라는 안내 표지판을 세우고 빙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시간 낭비 하는 것 같고 내 뜻대로 못 가서 짜증나지만 실은 그 안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들어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회하는 길은 멀고 귀찮지만 반드시 운전자를 보호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돌아가기 귀찮다고, 혹은 내 본디 계획과 다르다고, 비효율적, 비생산적이라고 그 길을 강행하여 가면 위험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답답하고 오래 걸리더라도 그 뜻을 깨닫고 순종하면 꼭 좋은 일이 생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성경에 나오는 우회를 ‘거룩한 우회’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또 신앙생활 하면서 때로는 돌아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천천히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기다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빠르다고, 효율적이라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매미는 가을 한 달 동안 맴맴 울기 위해 애벌레로 땅속에서 6년에서 17년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예수 믿고 돌아오는 데 수십 년 걸린 분이 있습니다. 왜 이제야 예수 믿게 되었는가, 왜 이제야 하나님께 돌아왔나 후회도 되고 그 긴 세월이 허송세월 같고 아까울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좀 멀리 돌아왔을 뿐 이제 주님께 돌아왔으니 제대로 찾아온 것입니다. 

어떤 분은 큰일을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참고 기다리며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갑니다. 흥선 대원군은 안동 김씨 세력이 권력을 쥐고 똑똑한 왕족들을 제거하던 시절에 상가 집에 찾아가 밥을 빌어먹고 미친 척 하면서 숨죽이고 기다리다가 결국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위에 올렸습니다. 바로 고종 임금입니다. 때를 기다리며 힘든 길, 먼 길을 빙 돌아간 것이지요.

이렇게 하나님이 다 깊은 뜻이 있어서 우회 표지판을 세우고 우리에게 돌아가라고,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이 바로 ‘거룩한 우회’입니다. 오늘부터 이 성경에 나오는 거룩한 우회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우회’ 즉 하나님이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먼 길로 빙 돌아가게 하신 사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길치 이스라엘

먼저 성경퀴즈 하나 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방황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안 물어봐서 그랬답니다. 저는 정말 ‘길치’입니다. 길눈이 어두워서 길을 정말 못 찾아요. 그래서 운전할 때 이만저만 고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늘 길을 잘 못 찾고 잘 잊어버려 돌아갈 때가 많습니다. 대개 부부 중 하나가 길눈이 어두우면 다른 하나는 밝아서 잘 찾아간다는데 저희 아내도 어지간한 길치라서 우리 부부가 함께 길을 찾아가려면 헤맬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저는 길을 잘 물어보는 편입니다. 길을 찾아가다가 잘 모르면 차를 잠시 세우고 지나가는 사람이나 가게에 길을 물어봅니다. 하지만 끝까지 고집 피우고 안 물어보는 사람도 있다고 하네요. 어떤 부부는 길 찾아가다가 운전하는 남편이 부인 말 안 들어서 부부싸움 하고 이혼까지 했다나요?

오늘 본문에도 ‘길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광야에서 똑바로 가면 며칠이면 갈 길을 못 찾아 헤매서 자그마치 40년이나 걸립니다. 그런데 길을 못 찾아서, 길눈이 어두워서 40년을 헤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부러 헤매게 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성경을 못 믿겠다고 합니다. 실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간 거리는 얼마 안 됩니다. 

출애굽 해서 가나안까지 직선거리로 대략 320킬로미터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곧바로 가면 1주일이나 열흘 정도 걸릴 거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약자와 가축도 딸렸으니 아무리 천천히 갔다 쳐도 한 달 이상 걸릴 거리가 아닙니다. 지금 성지순례를 가면 차로는 불과 몇 시간이면 가는 거리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거리를 40년이나, 그것도 장정만 60만 명, 남녀노소 다 치면 거의 200만이나 되는 인원이 헤매고 다녔다니까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이 이런 계산까지 했더군요. 가나안 땅까지의 직선거리는 대략 320킬로미터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루 평균 22미터, 시간 당 1미터도 못 간 셈인데 밤마다 텐트 치고 아침마다 걷어 가나안 땅을 향해 북동쪽으로 하루 22미터씩 거북이, 아니 달팽이 속도로 갔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하다못해 200만 명을 한 줄로 죽 세우기만 해도 수십 킬로미터는 될 텐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는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사실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200만 이스라엘 백성이 열흘이나 넉넉잡고 한 달이면 갈 길을 일부러 40년 동안이나 헤매게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말도 안 되지만 하나님이 마음먹으시면 얼마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윤형방황’(輪刑彷徨)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사람은 눈을 가리면 똑바로 걷지 못하는데 100미터쯤 가면 결국 원을 그리면서 제자리를 맴돌게 됩니다. 이 현상을 바로 ‘윤형방황’이라고 합니다. 여러 해 전 중앙아프리카에서 행방불명 된 등반가가 13일 만에 돌아왔습니다. 그는 과일과 풀뿌리로 연명하며 하루 12시간씩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길을 잃어버린 장소와 그를 발견한 장소는 약 6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12일 동안 12시간씩 걸었다고 가정하면 약 250킬로미터를 걸은 셈인데 결국 6킬로미터도 안 되는 거리 안에서 뱅뱅 맴돌며 250킬로미터를 헤맨 것입니다. 세상에도 이런 현상이 얼마든지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마음먹고 일부러 그렇게 헤매게 한다면 까짓 40년이 문제겠습니까? 상식적으로, 과학적으로 안 되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마음먹으시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일부러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이나 빙빙 돌며 헤매게 하셨는가? 열흘이나 한 달이면 갈 길을 그 많은 백성이 40년 동안이나 빙빙 돌다가 결국 스무 살이 넘어 출애굽한 장정은 여호수아와 갈렙만 빼고 다 죽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거룩한 우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한 우회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일까요? 함께 살펴봅시다.

❚우회의 이유

무엇보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 방황이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말씀합니다. 민수기 14장 3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인 사십 일의 하루를 일 년으로 쳐서 그 사십 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 하셨다 하라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한 사람씩 뽑아 열두 명의 정탐군을 가나안 땅에 파견합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두 명의 정탐군이 보고를 하는데 그 가운데 열 명은 야단났다고 보고합니다. 정말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맞는데, 포도송이 하나를 두 사람이 막대기에 꿰어 들고 와야 할 정도로 비옥하고 좋은 땅인데 문제는 거기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엄청나게 세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사는 성읍은 크고 견고한데다가 사람들 자체가 덩치가 크고 강해서 우리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은 엄청나게 큰 거인들이라서 우리가 그들 앞에 서면 ‘메뚜기’ 같다면서 우리가 쳐들어가면 절대 이길 수 없다고 겁을 줍니다. 열두 정탐군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아니라고, 비록 그들이 강하게 크지만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고, 그들은 우리의 밥이요 먹이라고 보고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두 사람의 말을 믿지 않고 나머지 열 사람의 말을 믿습니다.

여기에 민주주의의 맹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 때문에 참 좋지만, 저도 민주주의가 좋다고 생각하지만 문제는 뭐냐? 다수결이라고 반드시 옳은 결정을 하라는 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다수가 어리석은 결정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도 10대 2라는 절대 다수의 보고를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리석은 결정을 합니다. 

밤새도록 통곡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하며 왜 우리를 이곳 광야까지 끌고 나와서 죽게 하냐고, 지금이라도 그냥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배은망덕한 백성들에게 크게 진노하십니다. 그래서 징벌을 내리시는데 정탐군들이 정탐한 40일을 하루 당 1년씩 쳐서 40년 동안이나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40년 동안 올바른 보고를 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빼고 열 명의 정탐군을 비롯한 모든 성인은 광야에서 다 죽고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가 민수기가 말씀하는 광야 40년 방황의 이유입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마치 이스라엘의 죄악 때문에 벌을 받아서 그 가까운 거리를 40년 동안이나 헤맨 것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물론 징벌의 의미도 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 했고 열 명의 정탐군이 비신앙적인 잘못된 보고를 했습니다. 벌 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징벌 이전에 이 이스라엘 백성의 40년 광야 방황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보호와 훈련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보호하시는 하나님

첫째, 광야 40년 방황은 보호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 출애굽기 13장 17절을 봅니다.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무슨 뜻입니까? 분명 빠른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17절에 나오는 ‘블레셋 길’입니다. ‘블레셋 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리 잡고 살던 애굽의 고센 땅에서 가나안을 잇는 가장 짧고 좋은 길로서 약 250킬로미터의 해안 길입니다. 아주 좋은 지름길이요 넓게 뻥 뚫린 완전 하이웨이입니다. 이 길로만 가면 열흘이나 한 달 안에 충분히 가나안으로 가고도 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이냐? 1970년 중엽에 도단(T. Dothan)이라는 이스라엘 고고학자가 가자 지역을 발굴하면서 놀라운 발견을 합니다. 발굴 과정에서 애굽의 변경 수비대가 이 블레셋 길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음이 밝혀진 것입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애굽은 이 요충지대를 관리하기 위해 변경 수비대를 파견하고 곳곳에 요새를 건축해서 튼튼하게 지켰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무리 가깝고 좋은 길이라도 이 길로 가면 틀림없이 이 애굽 수비대와 전쟁을 치를 것이 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애굽의 최정예병들이 구축한 견고한 호랑이굴 속으로 들어가면 아주 힘들고 어려운 전쟁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늘 광야에서 조금만 불편하거나 힘들면 투덜대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틀림없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것입니다. 겨우 애굽을 벗어났는데 여기서 또 애굽 군사들을 만난다며 두려워하고 언제나 그랬듯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큰 징벌을 하나님께 받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일을 미리 예견하시고 가까운 길을 놔두고 험하고 먼 광야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먼 길로 돌아가게 한다고 해서 결코 그들을 방치하거나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본문 21~22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은 이 광야 40년 방황 동안 한 번도 이스라엘을 그냥 내버려두거나 방치하지 않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십니다. 배고플 때는 만나를 내리시고 목마를 때는 반석을 쳐서 물을 내십니다. 무서운 적군이 쳐들어오면 하나님은 친히 여호와 닛시, 이스라엘의 깃발이 되고 총사령관이 되셔서 그들을 물리치게 도와주셨습니다. 하나님은 40년 방황 동안 단 한 순간도 이스라엘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키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일부러 우리를 먼 길로 돌아가게 하거나 기다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답답할 수 있습니다. 짜증도 납니다. 왜 가까운 길 놔두고, 왜 편한 길 놔두고 나를 이렇게 멀고 힘든 길로 가게 하냐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엄청난 사랑의 보호가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엄마가 초등학교 2학년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 오늘부터 학교 갈 때 늘 다니던 그 길로 가지 말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다른 길로 가렴.” 왜 그랬을까요? 늘 다니던 길은 가깝지만 요즘 차들이 워낙 쌩쌩 달려서 사고가 많이 납니다. 불량한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어머니의 사랑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 초등학교 2학년 녀석이 “엄만 내가 나이가 몇 살인데 그래요? 이제 나도 다 컸으니 알아서 갈 겁니다.”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엄마의 깊은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자기를 보호하려는 엄마의 계획을 모르고 불평하고 짜증내며 자기 고집대로 하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보호 계획입니다. 우리가 철이 없을 때 이 계획을 잘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때론 반항하고 내 고집대로 강행하려고 합니다. 좀 멀리 돌아가는 것이 귀찮고 힘들어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반드시 큰 코 다칩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부모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멀리 돌아가는 길을 하나님이 나 혼자 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그 먼 길을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지키고 인도하십니다. 언제나 나와 동행하고 나를 지켜주십니다. 그러니까 그 길이 좀 멀고 힘들어도 안심하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소년을 용사로 키우기 위해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디안 소년들을 야생동물들이 들끓는 숲속에서 밤을 지내게 하는 시험을 통해 훈련을 함으로써 소년들의 담력을 키웠습니다. 이 시험 날 밤, 짐승들이 우는 캄캄한 숲속에서 소년은 얼마나 무서웠겠습니까? 하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자기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자기를 지키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아들 몰래 아버지는 아들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하기 위해 밤새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 뜻에 절대 순종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길로, 좀 멀고 힘들더라도 순종하여 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훈련시키시는 하나님

두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방황은 훈련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라도 빨리 광야로 통과한 후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편안하게 살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장기간 광야에 묶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 훈련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그 훈련 프로그램은,

첫째로, 앞서 말씀드린 순종 훈련입니다. 기본적으로 늘 불순종하고 원망하는 것이 몸에 밴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대로 가나안에 빨리 들어가게 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가나안 땅에 살며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징벌을 받아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40년 동안 그들을 헤매게 하시면서 순종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둘째, 말씀 훈련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 머물게 한 이유는 율법을 주시고 율법대로 사는 생활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을 때 그들을 시내산으로 인도해 자그마치 1년 동안 거기에 살게 하면서 십계명을 주고 율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광야생활 내내 만나를 주셨지만 육신의 양식인 만나만 준 것이 아니라 영의 양식인 말씀을 주며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 8장 3절에서 광야 40년을 회고하는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셋째,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광야생활 40년 내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위만 바라보고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니 백성들은 40년 내내 이 구름기둥, 불기둥이 가면 따라 가고, 멈추어서면 함께 멈추어 서는 삶을 살았습니다. 천막을 치고 살았던 그들은 언제든지 떠나갈 준비를 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니 위만 바라보고 산 것입니다. 하늘만 바라보는 삶이었습니다. 또한 만나와 메추라기를 바라보며 매일매일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늘만 바라보고 살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넷째, 길을 묻는 훈련입니다. 설교 첫머리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이나 방황한 이유가 길을 안 물어봐서였다고 했지요? 진짜입니다. 길도 잘 모르면서 고집 세고 자존심 세서 안 물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아프리카 선교사 스탠리 존스가 정글 한복판을 탐험하는데 가이드가 키가 큰 잡초와 무성한 덤불을 칼로 자르며 길을 안내했습니다. 아무리 가도 끝도 없어 보이는 정글입니다. 

그는 더위와 피로에 지쳐 말합니다. “여기가 어디요? 도대체 어딜 가는지 알고나 가는 거요? 길은 어디 있소?” 노련한 가이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바로 길입니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등반가들은 반드시 셰르파라는 네팔인 안내인을 데리고 갑니다. 그곳의 길과 지형에 익숙한 사람을 데리고 가야 험한 산을 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길을 물어야 합니다. 가장 길을 정확하게 아는 분에게 말입니다. 누구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요 14:6)고 말씀하신 예수님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하나님의 자녀로 준비하는 훈련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에 걸맞게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왕자들은 아주 혹독하고 철저한 훈련과 교육을 받습니다. 왕자에 걸맞게, 장차 왕이 되기 위해 대충 넘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인 독수리는 일부러 새끼를 천 길 낭떠러지에서 밀어버립니다. 맹수의 왕인 사자도 새끼들을 절벽에서 밀어버립니다. 왕이 되려면 훈련 제대로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왕의 자녀가 되어 왕으로 살려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살려면 기나긴 훈련, 철저한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하나님은 그 자녀요 백성인 이스라엘을 순종 훈련, 말씀 훈련, 하나님만 바라보는 훈련, 길을 묻는 훈련, 하나님의 자녀로 훈련시키기 위해 일부러 먼 길을 우회해 40년 동안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절대 빠른 길, 편한 길만 찾아서는 안 됩니다. 지름길만 찾아 가려 하면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녀로 훈련 받을 수 없습니다. 

지금 혹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우회하시오”라는 표지판을 세워놓고 돌아가게 하시더라도, 때로는 힘든 길, 외로운 길, 실패의 길을 가게 하시더라도, 또 오랫동안 기다리게 하시더라도 그것은 절대 징계도, 여러분을 미워해서도 아님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바로 여러분을 더욱 능력 있고 위대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기 위한 과정임을 기억하시고 우회하여 묵묵히 순종하여 믿음으로 그 길을 가시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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