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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영광스런 신분, 성도 (엡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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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영광스런 신분, 성도 (엡 3:7~9) 

     
지난 번 런던에서 노회가 열렸을 때 집사직에 대한 주제로 장시간 토론이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서리 집사라는 명칭이 없는데 유독 우리 한국 교회에 서리 집사라는 직분이 있고 또 권사라는 직분도 있습니다. 본래 성경에서 말하는 집사는 안수하여 세운 집사 즉 안수집사를 말합니다.    안수집사는 한 번 그 교회에서 안수하여 집사로 세움을 받으면 항존직으로 그 교회의 집사로 섬기는 반면 서리집사는 임시직으로 매년 임명을 합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연초에 직분자 임명을 할 때 어쩌다 서리집사 명단에서 누락이 되면 마음에 상처를 받아 교회를 나오지 않거나 아예 다른 교회로 옮겨가버리는 분들도 간혹 있습니다. 왜 하필이면 서리집사라고 이름하느냐 물으니 좀 불경스럽긴 하지만 어느 분이 우스개 소리로 말하기를, 가을 낙엽이 서리를 맞으면 우수수 떨어지듯 된서리를 한 번 맞으면 언제라도 떨어져 나가는 시한부 집사니까 서리집사라고 하여 한 바탕 웃은 적이 있습니다.    

왜 한국교회는 성경에도 없는 서리 집사직을 만들어 집사 직분에 대한 오해를 가지게 하고 또는 그 소중한 의미를 가볍게 만들고 있느냐는 지적을 받곤 합니다.  서리집사라는 이런 독특한 이름이 왜 나왔을까 배경을 생각해보면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의미로서는 일군을 준비시키는 훈련의 단계입니다.  ‘서리’(署理)라는 말이 어떤 조직에서 결원이 생겼을 때 그 직무를 대신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니 안수집사가 없는 교회에 서리 집사가 그 직무를 대신하기 위하여 임명될 수 있는 셈입니다.  또는 어떤 분이 아직은 나이도 어리고 예수 믿은 연수도 길지 않아 안수집사로 세우기에는 이르지만 교회의 훌륭한 일군 노릇을 하고 있으니 서리집사로 임명하여 훈련 기간을 거친 다음 언젠가 안수집사로 세우는 준비 과정으로 봅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좀 궁색한 변명처럼 보입니다만, 교회를 오래 다니는 사람인데 딱히 부를 호칭이 없어서 집사라고 불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르기 편하게 너도나도 그냥 집사님이라고 부르고 있는 경우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용하는 ‘아저씨, 아줌마’ 보다 훨씬 부르기 좋고, 세상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사장님, 사모님’ 보다 더 거룩해 보이는 호칭이라 교회 안에서 통상 그렇게 부르는 습관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박사님들도 많고 교수님들도 많아 여기저기서 ‘김 박사, 이 박사...’ 부릅니다만 교회 안에서는 그보다 더 좋은 호칭이 ‘김 집사, 이 집사...’ 입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 박사님들, 교수님들 머지 않아 집사님이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교회 안에 목사, 장로 , 집사 등  직분이 없고 모두가 동등하게 형제와 자매로 부르는 곳도 있습니다.  연세 드신 분을 부를 때 장로님인지 집사님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잘못 부르면 상대방에게 실례가 되어 우물쭈물할 때도 있는데 그 교회에서는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형제와 자매이니 어쩌면 부르기도 수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 정서에서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 부모님 같은 연세 많은 어른을 ‘형제님, 자매님’ 하고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낯설고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승주 형제가 박 장로님을 ‘박현철 형제님’ 하고 부른다면?   대단히 다정할 것 같은데 왠지 어색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이런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하여 교회 출석 1년만 되면 자동적으로 서리집사로 임명하여 집사라고 부르니 한결 편하더랍니다. 결국 편리위주에서 나온 발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집사직에 대한 책임의식이 흐려지고 직분의 가치도 소중이 여김을 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집사는 말 그대로 일을 잡은 사람이라는 뜻이니 열심히 봉사하는 일군입니다.  성경 본래의 의미는 수종드는 사람을 가리켜 집사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열심히 섬기고 수고하는 일군이 되어야 마땅한데 집사로 임명을 받았지만 이름만 집사일 뿐 아무런 책임도 의무도 못하고 일년을 지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목사와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직분은 말 그대로 교회의 일군을 부르는 직분명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에 걸맞는 헌신과 봉사를 기대하는 전문적인 일군을 일컬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의 직분은 세속적인 계급이 아니고 그 어떤 직분도 가볍게 여기고 아무렇게나 나누어주는 명예직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교인들이 자주 오고가는 해외 이민교회에서 일군으로 세우면 금방 떠나곤 하기 때문에 일군을 임명을 할 때 고민을 많이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공식으로 임명은 하지 않았지만 전에 다른 교회에서 집사로 일하시던 분이 오시면  편의상 집사 호칭을 합니다.    금년 우리 교회에 년초에 임명한 열 분의 서리집사님들이 있습니다.  우리 집사님들이 모두 주의 교회에서 맡은바 사명에 성실함으로 섬겨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칭찬듣는 일군들로 일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운영위원회를 모여 교회의 재정 운영에 대한 보고를 듣고 토의하는데 우선 이런 일부터 앞장을 서보시는 것이 어떨지요? 

오늘 아침에 직분에 대한 말씀이 중심 주제가 아닌데 서두가 좀 길어졌습니다. 성경에서 교회의 직분 말고 일반적으로 신자들을 부르는 용어 가운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신약의 서신서들을 기록한 사람들이 교회와 개인에게 편지를 보낼 때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의 주제인 ‘성도’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지만  ‘형제들아’ 라는 호칭을 더 많이 사용합니다.   베드로와 유다는 주로 ‘사랑하는 자들아’ 하였고,  야고보는 ‘내 형제들아’ 는 말을 사용합니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또는 ‘형제들아’를 주로 사용하는데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라는 용어를 12회 사용합니다.   

구약에서 성도는 택한 백성,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 성도란, 혈통적 또는 지리적으로 구별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특히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사도 바울이 주로 사용한 호칭입니다.  바울은 교회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서두에 안부를 전하면서 성도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면,  “로마에 있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로마서 1:7) 라는 식입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라는 용어를 아홉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성도란, 거룩한 무리 혹은 구별된 무리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를 가리켜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풍성한 영광을 함께 나누는 특별한 무리들이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있는 신령한 복을 받는 사람들(엡1:3)이며,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엡1:4-5).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찬미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며(엡1:6),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과 사랑의 삶을 살도록 요청을 받는 무리들입니다(엡4:1).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G8 정상들 모임에 참석한 이명박 대통령이 교황을 만나 우리 나라 천주교 초기에 순교한 분들에 대한 시복시성(諡福諡聖)을 청원하였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설명드리면, 조선조 천주교 신유박해(1801년)를 전후하여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성인으로 추대해달라고 청원했다는 말입니다.   천주교에서는 덕행이 뛰어났던 사람이 죽은 후 그 사람을 기리기 위하여 성인으로 추대하는데 성인으로 선포되면 전 세계 천주교 신자들이 공적으로 공경하는 대상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명예로운 성인으로 인정을 받으려면 교황청 전례위원회에서 추기경들과 주교들의 엄격한 심의를 거쳐 교황이 최종 결정을 합니다.     이만하면 성인 추대가 대단히 영광스런 일입니다.    

물론 천주교가 말하는 성인과 오늘 성경이 말하는 성도는 같은 차원은 아닙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초기 기독교 교회를 세워갈 때 그런 제도를 만든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만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시는 성인이 될까요?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성도라 부름을 받았음은 무엇인가요?  교황 어르신이 재가를 해줘야 하나님이 부르신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닐텐데요. 하나님이 우리를 정하여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또한 의롭다 하시며 의롭다 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하셨으니(롬8:30) 이보다 분명하고 또 영광스런 일이 있을까요? 

까다로운 교황청 심의도 안 받고 거저 얻은 것처럼 너무 쉽게 성도 호칭을 받으니 이 영광스런 신분이 귀하게 생각되지 않은 것 아닌가요?  박사 학위를 따고, 금뱃지를 얻으며, 대통령 자리에 오르는 것처럼 고된 과정을 통과한 후 얻은 신분은 그 자리를 얻은 사람에게 뿌듯한 성취감도 있고 자긍심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수고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성도 곧 ‘거룩한 무리’ 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하니 너무 싱겁게 여겨집니다.   자수성가 하고 모험심과 도전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내가 노력하고 땀흘려 수고하여 얻은 열매를 자랑스러워 합니다.  그렇게 얻어야 내 얼굴이 서고 큰 소리도 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거저 주셨다고 하니 별로 매력이 없어보입니다.    거기에 내 공로와 땀이 배어 있지 않으니 남보기에 생색이 나지 않아 성도라는 이 영광스런 신분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은혜의 영광(엡1:6)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너희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2:8)고 하였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라고 부름을 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그것을 스스로 자랑하지 못합니다. 혹 자랑한다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랑할 뿐입니다. 예수 믿고 새롭게 변화된 나의 인생을 돌아보고, 예수 믿고 전혀 달라진 내 삶의 자세를 보고 내 스스로 놀라워 자랑하고픈 것은 내 자신이 아니라 나를 영 딴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을 나의 것처럼 자랑할 수 있는 이것이 성도가 가지는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3:8) 하였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일군으로서 부르는 직분명이고, 바울은 사도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성도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성도 아무개이지 목사, 장로, 박사, 회장 아무개 혹은 대통령 아무개가 우선이 아닙니다. 그만큼 성도라는 신분이 영광스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처럼 풍성한 은혜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고 이 영광스런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찬송하자고 권합니다.     

본래 흉악한 죄인이었던 자신을 불러 성도의 반열에 서게 하신 것도 감지덕지한데 모든 성도 중에 가장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를 불러 이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이방 사람에게 전하는 일군으로 세워주심을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의 선물이었습니다. 바울의 이런 감사고백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John Netwon은  ‘나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이런 찬송이 우리 모두의 감사고백이길 바랍니다.    
     
영어 성경에서 saints는 세상에 알려진 유명한 성인, 성자만을 의미하지 않고 우리 평범한 그리스도인을 지칭하는 영광스런 이름입니다. St Paul 또는 St Peter 그리고 St Augustine 등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 이름 앞에 Saint 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둡니다.   사도 바울이 대단한 분임은 틀림없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감히 따라잡기 벅찬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분처럼 될 수 없으니 처음부터 포기하고 다만 그런 성인들을 우러러보며 우상시하는 것이 옳은가요?    

옛 성도들이 우리보다 훨씬 믿음의 진보를 이루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들의 거룩한 삶에 이르도록 분발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경건한 삶을 살았던 선배들을 본 받아 그들의 경지에 이르는 것도 옳지만 더 나아가 우리의 최종 목표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도로 부르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바로 이것을 위함이며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비에 ‘대통령 노무현’이라는 딱 여섯 글자만 새겼다고 합니다. 그걸 가리켜 사람들은 소박한 묘비라고 말합니다. 유명한 사람들의 묘를 호화롭게 꾸며놓은 것에 비교하면 일국의 대통령이었던 분의 묘비로서는 정말 소박하다고 아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세상적으로 볼 때 이 세상에서 대통령 호칭보다 더 화려한 호칭은 어디 있을까요?  아무리 묘비를 소박하게 만들었다지만 거기에 대통령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놓으면 그 자체로 묵직한 느낌이 있습니다.   대통령이라는 신분이 주는 무게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날고 뛰는 사람들이 그렇게들 그 자리에 오르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보다 우선이  ‘성도 아무개’ 라는 거룩한 신분입니다.    하나님 앞에 누구나 차별 없이 동등한 신분이 바로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특권을 가짐과 동시에 성도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이 따릅니다. 에베소서는 성도로 부름을 받은 개인들과 그 성도들이 모인 교회의 영광이 어떠함을 상세하게 설명한 후 그러므로 은혜로 부름을 받은 성도 혹은 교회로서 이 은혜의 복음을 나누는 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명령합니다. 각 성도들이 몸 담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거룩한 백성의 도리를 다하고 영적 싸움터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라고 격려합니다.   
   
에베소서 4장1절에, 부르심을 받은 성도답게 살라고 강조합니다. 성도답게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거룩한 백성답게 산다는 것인데, 술 마시지 않고 담배도 피지 않으면 거룩할까요?    성경 많이 읽고 성경 공부 모임에 열심히 참석하고 가끔 금식도 하면서 기도하면 거룩한가요?  겉으로 보이는 그런 삶도 성도답게 사는 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성도의 표준은 아닙니다.    버려야 할 더러운 습관과 어두움의 일들이 있고, 힘써 따라야 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소극적으로는 세상이 인정하는 윤리적인 삶을 실천하는 것이고, 보다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신 것처럼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랑을 행하여 하나님을 본 받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성도는 가정에서부터 성도답게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가정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현장이어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 성도로서 구별된 삶의 모습을 실천하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하나님의 사랑이 실천되는 가정이 성도의 마땅한 삶의 자리입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일터에서 거룩한 백성의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종들은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고 성실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눈가림만 하여 거짓으로 일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일하듯 정직하고 성실한 자세로 일하며 사는 것이 성도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예수를 믿는 상전들은 종들을 대할 때 자신들 역시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정직과 공평으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높은 지위에 있음을 무기 삼아 아랫사람들을 협박하고 괴롭게 하여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것은 성도로서 마땅하지 못한 행동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라면 사람들이 알아주는 사장 , 회장, 박사, 국회위원 그리고 대통령 혹은 장로, 목사 이전에 성도로서 올바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도의 신분을 소홀하게 여기고 사람들 앞에서 드러나는 직책만 앞세우고 살려고 할 때 우리를 통해 드러나야 할 하나님의 거룩함이 훼손되고 높임 받아야 할 그리스도의 이름이 빛을 가리움을 당합니다. ‘교회는 다니는 것 같은데 사는 모양은 우리나 별로 다를 바가 없네, 예수 믿는 사람도 별 수 없구만, 사람 사는게 다 같지 뭐.   적당히 타협하고 눈감아 주면서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되지....’   이런 방식으로 살다보니 성도가 세상과 구별된 모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다가  실망하면 사람들은 정반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몇 갑절 더한 멸시와 험악한 비난을 퍼붓고 맙니다. 

옛날 로마시대에 자신의 정직과 고결함을 말할 때 ‘나는 로마인이다!’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는 그보다 훨씬 고상한 구호가 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나는 성도다!’   알렉산더 왕의 이름과 똑같은 병사가 있었는데 그 병사의 행실이 대단히 좋지 못하여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살았답니다.    ‘알렉산더 이 바보 같은 놈’, ‘알렉산더 이 나쁜 놈....’    한 번은 알렉산더 왕이 부대를 방문하러 왔다가 이 병사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겁에 질린 병사가 왕 앞에서 부들부들 떨면서 ‘제 이름은 알렉산더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왕은  ‘알렉산더, 너는 오늘부터 네 이름에 합당하게 살든지 아니면 이름을 바꾸라’ 명령했다고 합니다.    

성도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광스런 그 신분과 그 이름에 합당한 사람으로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마음에 두고 한 주간 자신을 돌아보며 내가 성도로서 얼마나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인가 생각하는 기회를 가집시다.   성도와 그리스도인으로 살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거룩한 이름을 떼고 그냥 자연인으로 내 살고픈대로 마음껏 살 것인가?    이 땅의 것에만 관심을 두고 아둥바둥 싸우며 살 것인가, 오늘 내게 주어진 기쁨과 슬픔 영광과 치욕 이 모든 것들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 것인가?    거룩한 고민을 하는 한 주간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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