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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져 주시는 하나님 (창 32:2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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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주시는 하나님 (창 32:24~30)
  

우리 인생은 만남의 존재라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 여정을 통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선 부모님을 만나고, 형제자매들을 만납니다. 
친구들을 만나고 스승을 만납니다. 
배우자를 만나고, 자식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누구와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달라집니다. 
여러분들은 만남에서 성공하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 어떤 만남보다도 중요한 만남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혹시 부모님을 잘못 만났고, 스승을 잘못 만났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만날 때, 우리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의 운명을 바꾸어 놓으며 삶을 변화시킵니다. 
이런 만남은 축복의 만남이요, 기쁨의 만남이요, 가치 있는 만남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만남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만남을 통해서 구원을 얻게 되며 축복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잘못되었다면, 어떤 사람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 아니라
궁극적인 만남, 즉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살피기에 앞서 야곱의 생애를 잠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의 생애는 그의 고백처럼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이삭은 나이 40세에 결혼을 했는데 20년 동안 아이가 없다가 
60세가 되어서야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리브가는 쌍둥이를 잉태했습니다. 이들은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웁니다.
형 에서는 아주 남성적인 사람입니다. 
온 몸에 털이 많이 났고, 들사람이라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언제나 활을 둘러메고 산에 가서 사냥을 해서 짐승을 잡아가지고 와서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아버지께 별미를 대접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여성적이면서도 집념이 강하고 야심에 찬 사람입니다.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나왔습니다. 
형을 이기고자 하는 야곱의 마음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통은 동생으로 태어났으면 그것을 숙명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둘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축복을 받고자 기회를 엿보았습니다.
야곱에 비해 에서는 너무나 장자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버렸습니다. 
야곱은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기도를 해 주려는 것을 알고서 
아버지를 속이고, 형, 에서를 속이면서 축복기도를 가로챘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곧 발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에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동생을 죽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야곱은 
이제 멀리 하란 땅 밧단아람에 살고 있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합니다.

그 길에 루스라는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는 처량한 노숙자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스산한 밤에 무슨 일을 당할지 모릅니다. 
땅을 요로 삼고, 하늘을 이불 삼아 누워 있는 노숙자 야곱을 상상해 보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만나주셨고 그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야곱을 인도하시고 축복하셔서 밧단아람에서 
많은 축복을 받고 20여 년의 세월을 지낸 후에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야곱은 이제 많은 가족을 거느린 가장이요, 큰 재산을 가진 갑부가 됐습니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야곱이었지만, 
이제 원한에 찬 형을 만나려하니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초조와 불안과 두려움 속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먼저 에서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예물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다녀온 사람이 말하기를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옵니다.’
창32:8 “에서가 와서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리라”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에게 속한 사람과 재산을 둘로 나눕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은 야곱과 같을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방법으로든지 어떤 속임수를 써서라도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과 초조 가운데 살아가는 야곱의 실존적인 모습
이것이 혹시 오늘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내가 목표로 하는 뭔가를 성취한 것 같기는 한데, 풍요로워지기는 했는데,
뭔가에 쫓겨서 안정을 잃어버리고 불안해하는 존재.

인간은 불안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정든 고향과 형제와 부모님을 떠난 야곱은 
불안과 두려움과 고독 속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죄책감 속에 싸여있던 야곱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창32:9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창32:11 “내 형의 손에서, 에서의 손에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내가 그를 두려워함은 
그가 와서 나와 내 처자들을 칠까 겁이 나기 때문이니이다.”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할 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실의와 좌절이 다가올 때 하나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때에도 고집을 피우며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겸손히 하나님께 꿇어 엎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겁이 난 야곱은 자기 소유를 여러 데로 나누어 에서에게 예물로 보냅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보낸 예물로 형의 감정을 푼 후에 대면하면 
형이 혹시나 자기를 받아주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예물은 앞서 보냈습니다. 
무리 가운데 지내다가 밤중에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도 보냅니다. 
오늘 본문 24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혼자서 주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 때가 중요한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의 만남은 아무도 남이 대신할 수 없는 만남이요,
여러 사람의 틈바구니에서 살짝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모두 각자 각자가 단독으로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부인이 신앙생활을 잘 하니 
자기는 그 틈에 끼어 천국갈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몰라도 정말 한참 모르는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런 식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부인이 밥 먹는다고 내 배가 부를 수 없는 것처럼 
아무리 부인이 신앙생활을 잘해도 내가 만나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내가 단독으로 하나님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만 되십니다. 
우리 아버지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을 할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각자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서 그의 자녀인 겁니다.

야곱은 단독으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과 씨름을 합니다. 
어찌나 붙잡고 늘어지는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쳤습니다. 
뼈가 어긋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32:26) 
역시 야곱은 물고 늘어지는 데는 전문가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창32:28)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를 하되 야곱의 씨름기도를 해 보기 바랍니다.
야곱의 씨름기도는 하나님을 이기는 기도입니다. 
야곱은 이제 하나님을 이긴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야곱이 이겼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져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만 그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우리에게도 져 주십니다. 
믿음으로 매달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때때로 져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길 힘이 없어서 지는 게 아닙니다. 겁이 나서도 아닙니다. 
이길 수 있지만, 사랑하기에 져 주시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마음을 체험해 보았습니다. 
제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쯤 되었을 때 같습니다. 
제 친구들 사이에서는 운동을 잘하는 축에 속하니까 최고인 줄 알아요.
한 번은 제게 와서 씨름을 하자고 해요.

우리 집에는 아빠와 저 둘이 남자니까 누가 챔피언인지 가려보자는 겁니다. 
그러면서 5판 3승제로 하재요. 
제 마음에 ‘요놈 봐라’ 하는 생각으로 우선 번쩍 들어서 쾅하고 놨죠. 
마치 하나님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신 것처럼요.

그러면 그냥 포기할 줄 알았죠. 
그런데 아니에요. 씩씩대면서 다시 하재요. 
그래서 다음에는 제가 져 줬죠. 1:1이 되었습니다. 
자기가 이겼다고 난리에요. 

그래서 다음에는 ‘네까짓 게 어떻게 아빠를 이긴다고 까부냐?’는 식으로 
번쩍 들어서 놨죠. 
그랬더니 이 아이가 심각해져요. 왜? 이제 한번만 지면 끝나거든요. 
그러니까 씩씩 대면서 대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이기는 척하다가 져 줬습니다. 이제 2:2가 됐습니다. 

누가 이기든지 이제 한 번만 이기면 챔피언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위통도 벗고 양말도 벗고 고함을 지르면서 대듭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참을 씨름하다가 제가 져 줬죠. 

그랬더니 자기 힘으로 이긴 줄 알고 ‘엄마’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부엌으로 달려가더니 “내가 챔피언이다”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제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 네가 이기길 잘했다.” 

여러분 제가 초등학생 아들 이겨 놓고 “여보 내가 이겼어. 내가 챔피언이다”
하고 소리를 지른다고 생각을 해 보세요. 
제 아내가 대견하다고 오른손을 번쩍 들어주겠어요? 그거 이기나 마나죠.
하나님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이길 수 없어서가 아니라 야곱의 씨름하는 기도에 져 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런 방식으로 우리에게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나름대로 계획을 세우시고 나아가시다가도 뜻을 돌이키십니다. 

히스기야가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의 생명을 15년이나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니느웨는 그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멸망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회개할 때에 
그 성을 멸하고자 하셨던 뜻을 돌이키시고 그들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요나는 불평을 했지만 하나님은 그 성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회개할 때에도 하나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반복되는 죄를 범할 줄 알면서도 마치 모르시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또 속아 넘어가 주십니다. 
그러나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 2장에 보면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이 나옵니다.
혼인집에 포도주가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마리아가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저희에게 포도주가 떨어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분명히 지금은 아직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결국 예수님은 그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처럼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 귀신들린 딸을 위하여 구할 때에 
예수님은 처음에는 이방 여인의 간구라고 외면하시다가도 
그 여인의 끈질긴 믿음의 간구를 들으시고 
뜻을 돌이키사 그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우리의 간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쳐주시고 용서해 주십니다. 또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까지 우리를 이렇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잘나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닙니다. 
잘못한 게 많이 있지만 져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깨닫고 감사하시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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