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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언약궤 우상 (삼상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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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궤 우상 (삼상 4:1~4) 
 
 
❚주지 목사님

어느 교회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절에 아주 오래 다니던 할머니 보살님이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다니다보니 좋기도 하고 신앙생활에 열심도 갖게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교회에서 헌금이라는 것을 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할머니는 정성껏 준비한 헌금을 가지고 담임목사님을 찾아가게 되는데 이 할머니는 담임목사에게 (동작을 취하며) 이렇게 합장하며 인사했답니다. “주지 목사님 참 법어(설교)가 좋으십니다. 그려. 제가 시주 돈(헌금)을 좀 가지고 왔는데요.”

저희 교회에도 이렇게 열심히 절에 다니다 예수 믿게 된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대개 예수를 아주 열심히 잘 믿습니다. 본디 종교적인 열심이 있는 분이라서 그러겠습니다만 전에 절과 부처에게 바치던 열심을 이제 예수님과 교회에 바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처음에는 율법에 열심을 가지고 목숨 걸던 사람인데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그 열심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목숨 거는 사람으로 바뀌게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다른 종교 열심히 믿다가 이제 예수 잘 믿는 분들은 마치 사도 바울 같은 믿음을 가진 분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교회 다니면서 처음에 조금 적응하기 힘든 일이 있다네요. 불교 믿을 때는 내가 필요할 때만 절에 가면 됐습니다. 1년에 한 번 초파일에만 절에 가든지 자녀가 대학입시 볼 때 불공 드리면 되는데 교회는 이상하게 매 주 일요일마다 나오라고 합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주일 저녁에도, 수요일도 오라지요, 구역예배에다가 매일 새벽에도 오라지 참 교회 나오라는 때도 많습니다. 그러고 보면 절에 다닐 때는 좀 편리했던 것 같습니다. 

나 필요할 때만, 내가 가고 싶을 때만 가면 되고 매주 안 나온다고 주지 스님이 뭐라고 하지도 않고요. 그런데 교회는 매주 교회 안 나온다고, 주일 성수 안 한다고 ‘주지 목사’가 만날 잔소리 합니다. 헌금도 그래요. 절에 다닐 때는 내가 가고 싶을 때 가서 시주하고 싶은 만큼 하면 되는데 교회는 십일조 하라지요, 감사헌금 하라지요, 그것도 매주 예배 때마다 헌금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니 처음에는 적응하기 좀 힘든 게 당연하지요.

❚하나님 중심의 신앙관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불교를 비롯해 세상의 모든 종교는 내가 필요할 때 찾으면 되는 종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거나 아쉬울 때면 절이든지 어디든지 찾아가서 시주하고 도움을 청하면 되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복을 빌러 찾아가는 종교, 이런 것을 기복(祈福)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빌 기(祈), 복 복(福) 자를 써서 복을 비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내 복을 빌고 복 받기를 바라서 찾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아닙니다. 기독교는 결코 기복종교가 아닙니다. 내가 복 받기 원하면 찾아가고 필요할 때만 하나님 찾는 그런 종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필요할 때 찾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는 분명히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나옵니다. 하지만 여기에 낱말 하나만 더 붙으면 문제가 됩니다.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 되면 안 됩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 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신앙은, 기독교는 기복신앙으로 전락한 것입니다. 타락한 것입니다.

그러면 “나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도 아니고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도 아니라면 도대체 뭐란 말이냐?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불교나 다른 종교에 익숙한 분들은 이 개념을 이해하기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인들뿐 아니라 기독교인들 중에도, 교회 오래 다닌 분들 중에도 이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아니, 나를 위해 존재하는,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구?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잘 이해를 못합니다. 그만큼 너무 오랫동안 기복신앙에 익숙해져 왔기 때문에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해를 하든지 못 하든지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씀합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7)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목적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는 우리는 결코 우리 삶의 목적과 존재가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내가 왜 사는지, 이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왜 지금 여기에 있는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 목적이 있어 나를 만드시고,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바로 지금 이곳에서 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교회 다니면서도, 교회를 제법 오래 다녀 직분까지 받았으면서도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성도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자꾸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내 맘대로 잘 안 된다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니까 왜 하나님이 내 소원을 안 들어주냐고, 하나님이 내 뜻대로 안 움직여 주내고 원망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끊임없이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한 까닭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출애굽 시키고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신 것이 모두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임을 깨닫지 못하다보니 왜 하나님이 우리 뜻대로 안 해주냐고 끊임없이 불평하고 원망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자기 취향대로 움직이려 한 것이지요. 

혹시 우리는 오늘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따라 가고 있지는 않은지요. 하나님을 내 맘대로 움직이려 하고, 내가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고, 내가 아쉬울 때만 요술램프에서 요정 지니를 불러내는 것처럼, 산신령을 찾는 것처럼 하나님을 불러내는 식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내가 필요하지 않을 때, 내가 아쉬운 것 없을 때는 하나님이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사는 것입니다. 뭔가 단단히 잘못 되었습니다. 어디서부터 잘못 된 것일까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나 중심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신앙이 바른 신앙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가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복과 은혜를 제대로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언약궤 우상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바로 이 기복신앙의 함정에 빠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살펴볼까요?

이스라엘에게 블레셋은 늘 눈엣 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수백 년 동안 바로 이웃에 살면서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괴롭힌 민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블레셋이 아주 힘이 센 나라였다는 데 있습니다. 블레셋은 무기도 이스라엘과는 비교가 안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경도 하기 힘든 첨단 무기인 철제 무기와 무서운 병거부대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탱크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에게 블레셋은 눈엣 가시 같은 존재요 공포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블레셋이 또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얼마나 걱정이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나가면 또 깨질 것이 뻔한데 말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2절에 보니까 이번에도 블레셋에게 패하고 맙니다. 패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박살이 났습니다. 참패를 당하고 진영에 돌아와 보니 앞이 캄캄합니다. 도대체 저 무서운 블레셋 민족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암담할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이스라엘의 장로들, 즉 백성을 이끄는 원로 지도자들이 좋은 아이디어를 하나 생각해 냅니다. 

지금 실로 성소에 있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다가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고 말입니다. 참 좋은 생각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힘을 지닌 성물(聖物)입니다. 언약궤는 ‘증거궤’라고도 하고 ‘법궤’라고도 부르는 일종의 나무 상자입니다. 광야생활 중에 하나님이 지시하셔서 만든 것인데 하나님은 광야에서 성막을 만들 때 이 언약궤도 함께 만들도록 지시하십니다. 

조각목, 일종의 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서 순금으로 안팎을 둘러싸고 금고리 네 개를 달아 움직일 때는 그 금고리에 조각목 채를 끼워서 레위 사람들이 들고 움직이게 했고 그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적혀있는 돌판 둘을 보관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는 단순한 나무 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였습니다. 마치 임금이 앉는 보좌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 언약궤는 항상 성막의 지성소 안에 보관해 두었고 오늘 이 사건이 일어날 당시에는 아직 예루살렘 성전이 생기기 전이므로 실로라는 성소에 보관해 두고 엘리 제사장과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이 관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영광이 임하는 언약궤는 도대체 무슨 힘이 있기에 그 무서운 블레셋 사람들과의 싸움터에 이 언약궤를 들고 나오면 틀림없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우선 언약궤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죄인인 인간이 만지면 즉시 죽게 됩니다. 그래서 움직일 때도 사람이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금고리 넷에 채를 꿰어서 들고 가게 한 것이고, 실제 나중에 웃사라는 사람이 언약궤를 실어 나르는 수레의 소가 뛰어서 궤가 떨어질까 봐 손으로 붙들었다가 즉사하는 사건(삼하 6:6~7)까지 있었고 심지어 언약궤를 함부로 들여다보다가 벧세메스 사람들이 오만 칠십 명이나 죽는 사건도 일어났습니다(삼상 6:19). 

그러니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언약궤를 들고만 오면 아무리 사나운 블레셋 사람들이 싹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이 언약궤를 이 때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기게 되는데 전리품으로 언약궤를 가지고 간 블레셋 도시마다 독한 병이 돌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그만큼 이 언약궤에는 사람들이 상상도 못할 무서운 힘과 능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보인 것이지요.

혹시 옛날 영화지만 인디아나 존스라는 영화를 보신 분 있습니까? 인디아나 존스 1탄 ‘레이더스’라는 영화에 보면 나치 독일이 이 언약궤를 찾아 전쟁에 이용하려 한다는 다소 황당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맨 나중에 이 언약궤를 열자 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다 이 언약궤의 무서운 능력에 대해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아마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 언약궤의 힘을 알고 이용하려는 마음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떻게 됩니까? 오늘 함께 읽지는 않았지만 10절과 11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앞세워 보무당당하게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섰지만 오히려 이전보다 더 크게 패하고 수많은 병사들이 죽고 언약궤를 들고 온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고 그 언약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마는 참담한 결과를 맞게 됩니다.

여러분,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만 하면 아무리 무서운 적이라도 반드시 이기는데 왜 졌을까요? 바로 생각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전쟁은 무기나 군인 숫자에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도와주시느냐 안 도와주시냐에 달렸습니다. 아무리 적군이 무섭고 강하더라도, 또 이스라엘이 아무리 약하더라도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반드시 이깁니다. 반대로 아무리 이스라엘이 강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지 않으시면 반드시 지고 맙니다. 

바로 이 점에서 이스라엘의 전쟁은 다른 나라의 전쟁하고는 달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 “만군(萬軍)의 여호와”라는 이름을 불렀습니다. 히브리말로는 “야훼 체바오트” 즉 큰 군대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큰 군대의 사령관이 되어 이스라엘을 위해 대신 싸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승리는 오직 이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손에 달렸다는 뜻입니다.

여기까지는 분명히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이 언약궤에 의지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3절에 나온 것처럼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게 하자”고 말한 것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언약궤 자체에 무슨 능력이나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언약궤 위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크게 착각하여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언약궤 자체를 의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언약궤가 무슨 부적같이 사용된 것이지요. 그래서 저는 이런 행동을 부적신앙이라고 이름 붙여 보았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집에서 보았습니다만 마치 미신 믿는 분들이 종잇조각에 붉은 글씨 써서 집안에 붙여놓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 그 부적이 나를 지켜준다고 믿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가 부적처럼 나를 지켜주고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기도록 도와준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이 부적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과 뭐가 다르다는 말입니까? 이 ‘부적신앙’을 다른 말로는 부적 우상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언약궤 우상인 것입니다. 

지난번 설교 때 제가 말씀드렸지요? 십자가도 우상이 될 수 있다고요. 십자가 자체가 능력이 있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능력이 있는 것인데 착각하고 마치 십자가 자체에 힘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면 십자가도 우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궤 자체가 적군을 물리칠 힘을 준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패하고 언약궤마저 빼앗길 수밖에요. 그러니까 인생에서 패배하는 것입니다.

❚언약궤 우상을 이길 믿음

사랑하는 여러분, 이 언약궤 우상은 부적우상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언약궤 우상이 널려 있습니다. 부적처럼 이것이 나를 지켜주고 도와준다고 믿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성수나 예배 열심히 드리는 것이 나를 지켜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상입니다. 왜냐? 물론 주일성수나 예배가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그 행위가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 예배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나를 도우시는 것이지 예배 안 빠지는 우리의 행위 자체가 무슨 효험이 있겠습니까? 큰 착각입니다. 

어떤 분은 헌금이나 봉사나 선행이 나를 돕는다고 생각하지만 분명히 아닙니다. 헌금도 봉사도 선행도 그 자체가 무슨 능력을 갖거나 나에게 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헌금이나 봉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때 복도 능력도 주어지는 것뿐입니다. 어떤 분들은 아예 교회 다니는 것, 신앙생활 자체가 나를 지켜주는 부적처럼 여기는 분이 있습니다. 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면 당연히 복 받고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런 분이 의외로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전형적인 기복신앙입니다. 불교나 다른 종교는 분명 이런 면이 많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그런 신앙이 아닙니다. 물론 교회 처음 나온 초신자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처음 교회 나온 분들 전도할 때 우리도 “교회 나오면 복 받아” 하고 전도하지만 교회 오래 다니고도 이런 생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큰 문제입니다. 부적신앙,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나아가 이보다 더 무서운 우상은 처음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을 언약궤처럼 마음대로 꺼내 쓰고 필요할 때 가져다가 쓸 수 있는 존재로 이해하는 나 중심적 신앙인 것입니다. 전쟁이 일어났다. “지금 언약궤 어디 있어? 빨리 가져다가 그 힘을 빌어 적군을 물리쳐야지” 하는 식으로 지금 내게 문제가 생겼다, 뭔가 아쉬운 일이 생겼다, 그제야 “하나님 어디 계셔? 지금 뭐하시는 거야? 나를 안 도와주고 뭐 하고 계시나?” 이렇게 된다면 이건 정말 심각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언약궤 우상은 만군의 하나님을 ‘나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하나님’으로 전락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우상에, 신앙처럼 가장하고 있지만, 우상 같지 않아 보이는 우상이지만 우리의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는 이 무서운 우상에 빠져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살다가 떨기나무에 임하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런데 이 때 모세가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합니다.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게 네가 만난 하나님이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요?” 좀 생뚱맞은 질문입니다. 아니, 이 순간에 하나님 이름은 왜 묻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이름은 또 뭐랍니까? 그런데 당시로서는 이게 당연한 질문입니다. 당시 애굽이나 모든 중동의 신들은 다 이름이 있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붙인 이름이지요. 그래서 신마다 이름이 다 있었고 신들의 왕은 엘 신, 엘 신의 와이프(wife)는 아세라 신, 비와 풍요를 주관하는 신은 바알, 세상 모든 것마다 주관하는 신이 따로 있고 이름이 다 따로 있어서 사람들은 필요할 때 그 신을 찾아가 제사 드리고 예배하면 되는 시스템이었다는 말입니다. 농사지을 때는 농사를 주관하는 신을 부르고, 비가 필요하면 비를 주관하는 신을 부르면 그만이었습니다. 이것이 고대 중동의 우상숭배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모세는 그런 생각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물은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나는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신들처럼 필요하면 만들어 내고 필요하면 찾는 그런 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종교는 우상숭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누가 만들어 낸 것은 물론 아니고, 또 네가 필요로 하든 말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존재하시고, 심지어 내가 세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살아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 스스로 존재하는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내가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부적이나 언약궤의 우상으로 전락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우리 개신교회의 교리를 모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07개 항목 중에 첫 번째인 1번 질문과 답을 인용하고 말씀을 마칩니다. 그 첫 번째 질문은 이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대답이 무엇일까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 사실 하나만 기억하신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믿음의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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