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리라! (롬 8:26~28)

  • 잡초 잡초
  • 385
  • 0

첨부 1


그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리라! (롬 8:26~28)

 
사람이 한 번도 화를 내지 않고 살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기 자신에게 화를 낼 때가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들과 이웃들에게 화를 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화라고 하는 것이 습관화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때때로 감정이 상해 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한 감정이 자신의 전 인격을 지배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화가 습관화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별 것 아닌데도 습관화되어 가지고 화를 냅니다.  상한 감정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래서 관계가 자꾸만 거칠어집니다.  성격이 자꾸만 비뚤어집니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섭섭해집니다.  도무지 용서하고 수용하고자 하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습관적인 분노, 습관화된 상한 감정으로 인한 쓴뿌리를 조심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습관적인 분노와 쓴뿌리로부터 해방되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말처럼 그렇게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삶의 모든 습관적인 분노와 쓴뿌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크고 작은 절망과 아픔을 안고 가슴앓이를 하면서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작은 절망과 아픔들이 습관화되고 쓴뿌리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환경적인 실망이 자신을 삼키지 못하도록 하늘의 능력으로 버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지극히 환경적인 존재입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환경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셔야 합니다.  이는 힘으로나 능으로 되지 않고 여호와의 신으로만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데 쉽게 넘어지면 안됩니다.
 
모든 사람들 속에는 실망과 분노가 파도처럼 몰려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내 눈으로 이해할 수 없고, 내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있다는 하나님의 믿음의 지평선을 바라볼 수 있어야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 믿음을 붙들어야 됩니다.  앞길이 칠흑같이 어두운 때일수록 더욱 내 영혼에 하늘의 생기를 채워야 됩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셔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여 지금 내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 때문에 도저히 수용하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내가 가는 길을 나도 알 수 없고, 내게서 일어나는 일을 아무리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  성경에 나오는 욥도 처음에는 자신에게 일어난 이 모든 극한의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말하기를 나는 지금 내가 가는 길을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그분,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아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올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참된 믿음의 사람이 하게 될 고백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모든 삶의 미완성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있습니까?  종교놀이와 가식을 다 벗어버리십시오.  내 눈으로 이해할 수 없고, 내 삶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전개될 때 그 모든 것들을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고 수용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믿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눈에 보이는 것, 그것을 가지고 비판하면 그것이 무슨 믿음입니까?

우리 모두는 목적지를 향해서 제 각기 다른 길로 걷고 있습니다.  때문에 모든 성급한 어리석은 비판과 판단을 뒤로 미루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길은 다른 사람의 길보다 더 험난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목적은 같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 땅에 우리의 생명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이 생명을 아름답게 살려나가는 것입니다.  이 소중한 생명, 이 하나 밖에 없는 천하보다 귀중한 생명을 사랑하며 가꾸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한 목적지를 향하여 제각기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길보다 더 위험하고 험악한 길을 갑니다.  그러나 이 모든 험난한 길을 서로 감당하고, 서로 위로하고 붙들어 주면서 역경에 부딪쳐서도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아름다운 생명을 살려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다.
 
교회가 어떤 곳입니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믿음의 형제들을 서로 붙들어주고, 넘어지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서로 세워주는 곳입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서로 힘이 되어 주고, 디딤돌이 되어 주는 곳,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입니다.  이곳에서는 서로를 향한 모든 성급한 비난과 판단을 멈추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는 것은 언제나 뒤죽박죽 울퉁불퉁 엉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 곳을 바라보면서 그 미래를 앞당겨 오늘 솜씨를 풀어나갈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야 됩니다.  그래야지, 지금 이 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 당신이 그랬느냐, 안 그랬느냐? ...  그렇게 서로 헐뜯고 싸우다 보면 너 죽고 나 죽고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다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이해되지 않고, 용납되지 않을 때 조용히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 기도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왜 기도합니까?  세상의 힘을 얻고자 함입니까?  세상의 잔꾀를 얻으려고요?  아닙니다.  나의 생명을 내신 여호와께서 나로 넉넉히 이기게 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내 안에 분노가 일어나고,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쓴뿌리가 내리려고 할 때 주 앞에 나아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넉넉히 이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편해지기를 원합니다.  더 편해지려고 합니다.  어쩌면 인간의 문화는 더 편해지고 싶어하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빨래하는 것으로부터 더 편하고 싶어서 세탁기가 만들어졌습니다.  매일 부엌에서 불을 지피거나 가스불에 밥을 해야 하는 이 고단함을 해결하고자 전기밥솥이 만들어졌습니다.  모든 인간의 문화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서 그대로 편해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사에게 편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나를 편하게 놔둬라!  사람들은 편안함을 위해서 끝없이 싸웁니다.  그러나 정말 목사가 사람들을 편하게만 하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거짓 목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 부모는 자기 자식이 편하기만을 원하지 않습니다.  자녀가 편하기만을 원할 때 "일어나라.  나가서 운동도 해라.  뛰어라.  공부도 하고 책도 봐라.  나가서 친구들과 놀아라."  끝없이 간섭을 합니다.  그런데 자기 집 아이가 아닌 사람은 가만히 놔둡니다.  사랑이 없는 것은 가만히 놔둡니다.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만족, 무사안일, 편안함.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음성은 변화가 없으면 얻을 것도, 기대할 것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모든 편안을 박차고 변화를 해라!  고통이 없으면 얻을 것도 없다!  21세기에는 지속적으로 변화와 개선의 습관이 몸에 밴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 시대를 주역으로 이끌어갑니다.  믿음은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성령은 변화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는 사람마다 오늘 변해서 이 성전을 나갈 줄 믿습니다.
 
내가 변하면 내 집안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내 자식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내 기업이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내 나라가 변합니다.  내가 변하면 내 이웃이 변합니다.  변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성공도 축복도 다 변화의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한 생애를 사는 우리 모두는 자기일, 자기의 삶이 변화 속에서만 기쁘고 즐겁게 살아야 할 권리가 있습니다.  변하십시오.  변하면 즐겁습니다.  변하면 좀 늦어도 따라갑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으면 결국 뒤쳐지고 힘들어지고 짜증스러워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참된 신앙의 길이라고 하는 것은 편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별히 지도자 여러분! 또 앞으로 미래에 하나님 앞에서 지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여러분!  지도자는 편 하려고 지도자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편리를 숭배하는 이 사회에서 자라난 우리의 희생자들, 불편함을 추방하기 위해서 자기생애를 통해 공격하고 있습니다.  정말 긴장이 없는 상태가 축복이겠습니까?  정말 불편함이 없는 상태가 축복이겠습니까?  정말 편안함과 쾌락이 축복일까요?  만족지향문화, 우리는 지금 이것에 희생자들입니다.]
 
온 세상이 지금 만족! 만족! 여기로만 가고 있습니다.  이 만족지향문화, 여기에 우리가 큰 피해자들입니다.  만족의 내일은 없습니다.  만족이라는 안전지대에 내일은 없습니다.  만일 편안함이 우리 생애의 최고의 덕목이고 목표라고 한다면 다음 세대를 위한 변화와 개혁의 틀을 누가 만들 것입니까?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붙들고 약한 힘이라도 합해지면 자신의 타락한 본능 속에 꿈틀거리고 있는 현상유지 본능에 맡기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헌신이라는 영역에는 편안함이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면 헌신하는 영역에 편안함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평등을 이용해서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동기부여를 하고 있습니다.  불편을 나쁜 것으로만 보지 마십시오.  모세는 왕궁을 뛰쳐나왔습니다.  느헤미야는 왕궁의 경호 대장직을 버렸습니다.  에스더도 왕비의 자리를 걸었습니다.  왜?  더 큰 삶의 헌신을 위해서입니다.  왜 우리가 편안함이라고 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하느냐?  편안함에는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큰 삶의 헌신을 위해서 편안함을 포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보십시오!  편안한 사람들이 헌신하던가요?  안 합니다.  이 편안한 삶에서는 절대로 헌신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더 높은 헌신입니다.  더 큰 헌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혼란을 감수합니다.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입니다.  편안하라고 그 자리에 앉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의 혼란 때문에 쓰러지지 마십시오.
 
왜 쓰러집니까?  왜 넘어집니까?  편안함 때문입니다.  편안함 때문에 쓰러지고 넘어집니다.  교회에 와서 위로 받고, 좀 더 편안해 지고 싶은 데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더 큰 삶의 헌신과 섬김을 요구합니다.  자기 육신으로부터 밀려오는 편안함과 헌신의 충돌!  그래서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런데 인간은 혼란할 때는 절대로 쓰러지지 않습니다.  무너지는 기업들은 사장이 편안할 때 무너집니다.  잘 되고 있지!  무너지는 나라도 편안할 때 무너집니다.  고난을 당하는 개인도 편안할 때 무너집니다.
"하나님이여! 이 혼란과 혼돈이 오히려 나에게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삶의 자리에서 결코 나 혼자서 편안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가 편안하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까?  그랬다면 그분은 저 높고 높은 하늘 보좌에 가만히 계셔야만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분은 결코 이 땅에 오시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편안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지만 우리 주님만은 머리 둘 곳이 없는 고단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땅에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땅에서 억눌리고 포로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죄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버림받은 영혼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의 길을 피 흘리시며 걸어가셨습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인류를 위해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편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 주님의 제자들, 그들도 결코 편안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그래서 이 땅에 죽어 가는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주의 몸된 교회가 세워진다면 그 어떤 고난도 기쁘게 받았습니다.  그들은 희롱과 채찍질뿐만 아니라 결박과 감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습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주님의 복음을 위해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이 주님이 걸어가신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가신 길이라면 그들은 아골골짜기라도 찬양하면서 걸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내 주님을 위해서라면 아골골짜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가시밭길이라도 감사하면서 걸어갈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주님의 제자들이 걸어간 길이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이 참으로 주님의 제자이기를 고백한다면 편안하기를 거부하셔야 합니다.  모든 삶의 자리에서 결코 나 혼자서 편안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편안하기를 요구할 때에라도 나는 주님을 따라 섬김과 헌신과 봉사의 길을 걸어가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아서 편안하고자 할 때에 나 혼자라도 무릎을 꿇고 섬김의 도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성도들이 압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우리 주님께서 보시고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주 앞에 섰을 때에 주님께서는 나를 맞아주시면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제가 교회에서 전도사로, 목사로 목회를 시작한지가 2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참으로 잘난 사람도 보았고 못난 사람도 보았습니다.  대단한 학식을 가진 사람들도 만나 보았습니다.  무식한 사람도 만나 보았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들도 만나 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도 보았습니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보았고 어린아이들과도 더불어 살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들 모두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인간의 연약함을 피조물다움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질그릇과 같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인간이 이렇게 허무하게 깨어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순식간에 무너질 수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일찍이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시다."(시 103:14)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체질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은 체질을 안다고 했을 때 그것이 지극히 제한적인 것임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의 체질을 알고, 부모님은 자식의 체질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는 온전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체질은 소음인이냐, 태음인이냐 하는 체질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인간의 연약성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넘쳐도 문제가 되고 모자라도 문제가 됩니다.  사랑이 너무 많아도 문제고, 사랑을 못 받아도 삐뚤어지게 됩니다.  돈이 너무 많아도 타락합니다.  반면에 돈이 너무 적어도 비굴해 집니다.  분수에 넘치게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아도 문제가 생기고, 은혜를 못 받아도 비참해 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 은혜가 필요하고, 언제 무엇이 필요하고, 지금 이 순간에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거기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체질을 가진 존재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 말 성경에는 '연약함'이 단수로 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연약함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연약함들."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많은 연약함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보면, 배가 금이 가기 시작하니까 쥐새끼들이 다 기어 나옵니다.  쥐는 벌써 배의 파선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은 얼마나 멍청한지 모두가 파티에 정신없이 빠져 있습니다.  그 재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쥐새끼들이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었을까?  개미는 홍수가 날 것을 미리 알고 집을 나무꼭대기로 옮긴다고 합니다.  인간이 홍수를 예측하지 못해서 큰 재난을 겪는 모습을 보고 개미가 얼마나 배꼽을 잡고 웃을까?  거미는 바람이 불기 전에 어디서 바람이 불어올 것인지 바람 부는 방향을 알고 거미줄을 친다고 합니다.  한 마리 미물만도 못한 것이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일을 모릅니다.  한 걸음 앞을 모르는 것이 우리들 인간입니다.

보십시오.  우리 인간은 육체적으로 아주 연약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병균 하나에 평생 병원신세를 지지 않았던 장정이 쓰러집니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연약한 존재들입니까?  누군가의 눈짓 한번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조그마한 근심 걱정들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합니다.  오히려 강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정서적으로 더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정복했던 나폴레옹이 집에 들어오면 그 고독을 견딜 수 없어서, 그 외로움을 참을 수가 없어서 아내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고 합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시험과 도전을 받지 않는 사람이 도대체 누가 있더란 말입니까?  그만하면 반듯한데 돈 앞에만 가면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시험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에는 아주 의로운데 이성 앞에만 가면 겉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성 앞에서는 깨끗한데 명예 앞에는 꼼짝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듯 보이는데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열심히 하는가 싶어서 쳐다보면 교만하기 짝이 없습니다.  충성하는가 싶은데 물질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는 노랭이입니다.  그만하면 풍성히 하나님 앞에 헌신한다 싶은데 언어생활에 있어서 날마다 실패합니다.  삶이 따라주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한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인간의 연약성을 나무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성을 통하여 오히려 더 역사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연약성을 대단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실패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연약하기 때문에 신앙생활에 실패자가 될 것이라고 낙담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연약하기 때문에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성을 통하여 자비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오히려 연약함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살 수가 있습니다.  연약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려고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우리를 어떻게 다루십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사람을 모두 영웅으로 만들어서 쓰시지 않습니다.  연약한 사람들을 천사로 만들어서 쓰시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도우시는 성령님 보혜사를 보내주셔서 우리를 도와주심으로 쓰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26절을 다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에서 '도운다'는 단어를 성경 본문에서는 아주 재미있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를 도우시는 그 도우심의 사건이 얼마나 신비한지 그 당시에 사용되어지는 단어들을 가지고는 표현이 안되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헬라어의 세 단어를 한 단어로 묶어서 성령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도우심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습니다.
"쑨안티람바노마이."

여기에서 '쑨'이라는 말은 '함께 내 곁에 계셔서 다정하게'라는 뜻이고, '안티'는 '반대편에서, 건너편에서, 내가 할 수 없는 곳에서,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람바노마이'라는 말은 '번쩍 들어 옮겨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 곁에서 나와 함께 다정하게 계시며,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저 건너편에서,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내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내가 안고 있는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신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것을 한번 상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 날 큰 통나무가 우리 앞에 가로놓여 있습니다.  이것을 치우지 않고는 우리가 한 걸음도 꼼짝달싹 할 수가 없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던 어느 날 거대한 바위가 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것을 치우지 않고서는 내가 어떤 일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인생의 중요한 문제에 부딪혀서 우리는 그 앞에서 안타까워합니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어서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내 힘이 도무지 미치지 못합니다.  능력의 한계 저 너머에 있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내가 당황하고 있을 때에 어떤 힘있는 분이 그 문제 저 건너편에서, 통나무 저쪽 끝에서, 바위 저쪽 끝에서 그 문제를 번쩍 들어서 옮겨 주셨습니다.  이제 갈 길이 보입니다.  다음 문제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님은 우리를 이렇게 도와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쑨안티람바노마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짐이 무거워서 쩔쩔매고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성령님이 옮겨 주실 것입니다.  영적으로 실패한 자리에서 안타까워하며 당황해 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날마다 반복적으로 똑같은 죄를 범함으로 실패의 언덕을 넘어서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쑨안티람바노마이.  성령님이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여기에서 "도운다"라는 단어의 시제가 현재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도우시나니."  과거에 도왔다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어느 날 어떤 문제에 부딪힐 때 도와주실 것이다는 미래의 약속이 아닙니다.  도우시나니, 현재형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은 과거에 여러분을 도와주셨습니다.  성령님께서는 미래에도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성령님은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도와주십니다.  매 순간 순간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도와주십니다.  가정에서 여러분이 괴로워하며 기도할 때 그 자리에서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직장에서 여러분이 괴로워하며 안타까워 할 때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여러분이 커다란 문제에 부딪혔을 때에 성령님은 바로 그 자리에 임재하셔서 여러분을 도와주십니다.

이 시간에 부족한 종이 말씀을 전합니다.  저 혼자 말씀을 전하는 것 같지만 성령님이 부족한 종을 지금 도와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종을 사용하시는 성령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저를 통하여 선포하는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성령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찬송할 때에 그 찬송이 여러분의 고백적인 찬송이 되도록 찬송 속에 성령님은 여러분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들을 때에 말씀이 치료하는 광선처럼 여러분의 심령의 아픔을 치료하도록 도와주십니다.  여러분의 연약한 믿음을 강력한 믿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믿으십시오.  성령님은 지금 이 시간에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도우신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기도를 돕는다고 말씀합니다.  왜 성령님은 여러 가지 도움의 길이 있을텐데 기도를 돕는다고 하는 것입니까?  기도는 만사를 해결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안에 모든 것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조금만 열을 받아 보십시오.  기도할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조금만 상심되는 일, 근심되는 문제에 부딪혀 보십시오.  기도할 생각을 갖지 못합니다.
 
영적인 실패의 가장 뚜렷한 징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도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심각한 문제에 부딪혔다고 할지라도 '내가 기도할 마음이 생겼다.  기도해야지.'  여러분이 지금 기도의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성령의 역사를 힘입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지 아니하고서는 성령의 어떤 도움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은 기도를 통하여 우리를 도우십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그 다음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마땅히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토록 인생의 무거운 짐 앞에서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인 줄을 뻔히 알면서도 왜 기도하지 않습니까?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기억하십시오.  기도도 성령님이 힘을 주셔야 가능합니다.

이제 기도하기로 결단했습니다.  작정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알지를 못합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성령님이 찾아오시면 우리에게 기도의 제목을 주십니다.  우리에게 기도의 마음을 주십니다.  기도의 능력을 주십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성령님이 우리에게 기도의 마음을 주실 때에는 이미 문제를 다 해결해 놓고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것입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하여 탄식하시는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가운데 탄식의 영을 회복시켜 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기도할 수 없을 때, 내 대신 탄식하며 기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엎드려 기도할 때마다 내 속에 탄식의 영을 회복시켜 주셔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울부짖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슴속에 한을 풀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울 때에 우리의 얼굴을 기쁨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앞에 나와 성령님과 함께 탄식하고 나면 여러분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 모든 문제가 해결 될 것입니다.  눈물이 변하여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실패가 변하여 승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넘어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멸망의 자리에서 천국으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탄식하게 할 때는 탄식하는 것이 성령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은 우리와 함께 탄식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울 때 함께 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괴로울 때 나보다 더 괴로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연약하다는 사실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했습니까?  내가 실패했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실망하며 좌절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야단치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연약함을 통하여 역사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연약함을 인정하기만 하면 주님께서 이 시간에 나를 찾아오셔서 도와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쑨안티람바노마이, 이 시간 번쩍 들어서 옮겨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자비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 오십시오.  그분께 당신의 인생을 맡기십시오.  인생 길 지치고 힘들 때 당신의 등 뒤에서 당신을 도우시는 손길을 한 번 느껴 보십시오.  당신의 한계를 느낄 때 힘있는 그 손길을 느껴보십시오.  쓰러져 일어날 수 없을 때 당신에게 힘을 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인생 길 험하고 마음 지쳐 / 살아갈 용기 없어질 때
너 홀로 앉아서 탄식치 말고 / 예수님 품으로 나오세요
예수님은 나의 생명 / 믿음 소망 사랑되시니
십자가 보혈 자비의 손길로 상처 입은 너를 고치시리"♬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