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하나님 아버지의 모성 (사 49:14~21)

  • 잡초 잡초
  • 516
  • 0

첨부 1


하나님 아버지의 모성 (사 49:14~21)


< 도 입 >

지금 시중에 절찬리 상영중인 김혜자, 원빈 주연, 봉준호 감독의 「마더」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조금 모자라는 바보스런 아들의 죄와 허물을 덮기 위해 살인자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왜곡된 모성애를 그려내는 영화입니다.

못난 아들 하나를 사랑하기 위해 머더(murder)가 되어 버리는 마더(mother)의 이야기입니다. 마더는 “어머니”이고 머더는 “살인자”라는 뜻입니다. 삐뚫어 지긴 했지만 그게 모성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성애가 바른 것일 때 엄청난 영향을 남기게 됩니다. 

시인 피천득씨의 글 가운데 아름다운 글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노래입니다. “30대의 세상을 떠난 내 어머니는 얼마나 젊고 아름다웠는지 모릅니다. 내가 새 한 마리도 죽이지 아니하고 살아온 것은 내 엄마의 자애로운 마음이요, 햇빛속에 웃는 나의 미소는 내 어머니한테서 배운 웃음입니다. 나의 간절한 희망이 있다면 내 어머니의 아들로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자녀들의 마음은 이렇게 어머니의 숨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풍요로운 사랑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 살아가며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며 살 수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에서 가장 고마우신 분은 우리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신 분입니다. 때문에 내 아버지 내 어머니는 이 땅에서 우리의 공경을 받아 마땅하신 분들입니다. 세상 최고의 스승이 있다면 아마 하나님을 가르쳐 주신 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어머니는 최고의 스승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머니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 귓전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음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 어머니요 가장 위대한 스승 아니겠습니까? 내 어머니는 우리 하나님을 보여 주시는 분이시오, 우리 하나님은 내 어머니 같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신 어머니

본문 주제 구절이 되는 이사야서 49장 15절-16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느니라.”

손바닥에 기록했다고 하지 아니하고 손바닥에 새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볼펜이나 연필로 새긴 것이 아니고 조각칼로 우리를 새기셨습니다. 하나님의 손바닥에는 우리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우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손바닥에 우리의 이름을 새기기 위해서 그분은 살이 떨어져 나가야 했고, 피 흘리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내 어머니 손바닥에는 내 이름이 있고 내 얼굴이 있으며 우리 하나님 손바닥에는 내 얼굴, 내 이름이 있더란 말이죠.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러 곳에서 우리 하나님을 내 어머니 같은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창1:27). 하나님 안에는 남성이 있고 여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부성이 있는가 하면 모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타락하고 범죄하여 벌거벗은 수치를 입고 있을 때에 양을 잡아 옷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손수 바느질하여 내 옷을 만드시던 어머니의 손길을 기억나게 해 줍니다.(창3:21)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이사야 49:15)

* 단비 임신 중 오토바이 사고
* 쌍고동이 울어도 

창세기나 출애굽기에서 “엘샤다이”라는 말은 주로 “전능자”로 번역됩니다. 그러나 구약성서 신학자들은 “두 개의 젖가슴을 가진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당신의 자녀를 낳고 그 자녀를 먹이고 양육하는 어머니 같으신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성은 피흘린 사랑이기 때문에 부성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 흘리시며 “암닭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눅13:34). 한탄하는 주님의 심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으로 표현했습니다.

내 어머니 우리 하나님의 그 사랑은 도대체 어떤 사랑입니까? 

1. 살려주는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가장 큰 역할은 살림하시는 일입니다. 살림이란 “살린다”는 말입니다. 어머니는 우리를 살려주신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어머니에게서 살려주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살려 주시기 위해 어머니를 먼저 보내주셨습니다. 내 어머니는 나를 얻기 위하여 피를 흘리셨습니다. 당신의 살을 찢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천국의 자녀로 얻으시기 위하여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 주셔서 그분의 피를 흘리셨고 그분의 살을 찢으셨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에 받은 사랑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아주 어린 나이에 숨을 헐떡거리다 마침내 숨을 멈추는 큰 고통의 시간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나는 그때 일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 졸이며 그 순간 나를 지켜 보셨을까요. 숨을 몰아쉬는 나를 바라보며 얼마나 발을 동동 구르셨을까요. 숨을 뚝 멈추고 마는 나를 바라보며 얼마나 우리 하나님, 우리 어머니 안타까와 하셨을까요.

내가 죄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에 우리 하나님은 나를 예정하시고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도망갈 때에도 우리 아버지 가슴에 못질하고 달려갈 때에도 나의 등뒤에서 언제나 나의 이름 부르며 나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요 내 하나님의 사랑뿐이었습니다.

유대인의 탈무드 가운데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내 대신 네 어미를 네게 보냈노라. 내게는 등이 없어서 너를 업어줄 네 어미를 네게 보냈노라. 내게는 손이 없어서 너를 붙들어 주고 어루만져 줄 네 어머니를 네 곁에 보냈노라. 나는 너를 품어줄 가슴이 없어서 어린 너를 품어줄 어미를 네 곁에 보냈으며, 내게는 젖이 없어서 생명의 젖줄을 너에게 보냈노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사랑의 손길로 어머니를 보내어서 우리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내 어머니는 이름조차 없습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이름이 없었습니다. 오직 “어머니”란 이름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류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어머니 품에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는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6.25때의 일입니다. 피난 행렬이 이북에서 구름떼처럼 남으로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한 어머니가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 품에는 조그마한 봇짐 하나를 짊어지고 피난 대열에 끼어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기관총 사격을 받았습니다. 개나리 봇짐은 집어던지고 등에 업었던 어린아이를 품에 안는 순간 총은 어깨 위로 스쳐지나가며 어머니는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서 피는 뚝뚝 떨어졌고 흐르는 피는 아이의 입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전투가 끝난 후 국군장병들이 시체를 검열하다가 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국군은 그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고 그 어머니의 무덤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아이가 맞아야 될 총을 어미가 대신 맞았습니다. 내가 써야 될 가시면류관 우리 예수님이 쓰셨습니다. 내가 찢겨져야 될 살 - 예수님 찢기시고, 내가 흘려야 될 피 - 예수님 흘려주시고,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내 어머니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2. 격려하여 주시는 사랑 - 보혜사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보혜사 성령 하나님을 만나 봅니다. 보혜사는 ‘곁에서 돕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파라클레토스 - 곁에서 돕는 사람입니다.

성령님을 보내 주신 하나님, 내 어머니를 우리 곁에 보내 주셔서 어린 나를 돕도록 해 주셨습니다. 내 어머니는 내 어릴 때 병들세라 내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밤이면 가슴에 안고 잠드셨고, 내가 걸음마 배우면 자랑스럽게 내 손을 붙들고 마을에 내려가셨는가 하면, 내 손 붙들고 학교에 가셨고, 내가 몸져 누운 날이면 내가 대신 아파줄 수 있다고 하면 내가 네 대신 아파줄 수 있다고 한다면 나를 품에 안고 발 동동 구르시며 병원을 향하여 달려가곤 하셨습니다. 

교회 여집사님 한분이 외동딸이 있었는데 그 딸에게 꾸중하면서 “나가!”라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순진한 딸이 집을 나갔습니다. 해가 석양에 지면 들어 오겠지! 그런데 딸 아이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창문 열어놓고 먼산 바라봅니다. 방문 잠그지 못하고 거실에 앉아 발자국 소리만 나면 벌떡 일어나 문을 열어 봅니다. 그러나 딸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골목 저 골목 딸애 이름을 부르며 이 골짝 저 골짝 밤새도록 새벽이슬 맞으며 어머니는 찾아다니다 새벽에 들어왔으나 딸 아이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날이 밝아 오자 초췌한 모습으로 딸이 들어옵니다. 왈칵 그 딸 아이를 끌어 안으며 “얘야 어디 갔다 왔니, 얼마나 추웠니?” 그러자 딸은 “엄마가 나가라고 해서 지하 대피소에 가서 밤새도록 앉아 있었어요” 어머니는 딸을 품에 안으며 “얘야, 돌마워 줘서 고맙다. 나가라고 한 말은 엄마의 마음이 아니란다.” 

이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리라. 선악과를 따 먹은 인류를,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한번도 눈을 떼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하나님을 묘사하기를 범죄하여, 타락하여, 멀리 도망가는 우리의 등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아직도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다. 여전히 너를 존귀히 여기고 있다. 나는 끝까지 너를 포기하지 아니할 것이다. 나의 등뒤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은 제2 이사야의 기록이라고 할만큼 전반부와는 문체도 내용도 많이 다릅니다. 왜요?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을 때 백성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습니다. 바로 이때 이사야는 하나님은 이 순간 채찍으로 때려 놓고 자식의 상처를 끌어안고 울고 계시는 어머니로 묘사했습니다. 그 자식의 상처를 치료하며 가슴 아파하시는 하나님으로 설명합니다. 

내 어머니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3. 구속하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끝까지 자녀를 구속해 주는 사랑입니다.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허물이 있어도 다 감추어 주는 사랑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내게 실망을 해도, 세상 모든 이웃과 친구들이 내게 손가락질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고 나를 구원해 주시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 값을 다 갚으며 살아야 한다고 하면 멀쩡한 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자리에 하나님의 자녀라 앉아서 예배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더란 얘기입니까? 대신 갚아주시는 사랑, 대신 치료해 주시는 사랑, 감추어 주시는 그 사랑이 있길래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부모님 돌아가시면 우리는 땅 속에 내 부모를 묻습니다. 그러나 자식이 먼저 죽으면 가슴속에 어머니는 자식을 묻습니다. 우리 모두 어머니 품에서 태어나 어머니 품에서 죽어 갑니다.

근간 가정 살림살이가 어려워진 사람들이 가끔 늙으신 어버이를 모실 수가 없어서 이름 설고 낮설은 땅에 갖다 버립니다. 경찰들이 와서 묻습니다. “자식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어느 마을에서 사셨습니까?” “어르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끝내 아버지 어머니는 벙어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자식의 이름이라도 대고 나면 자식에게 누가 될까봐.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사람으로 태어나 받은 최고의 은혜가 있다고 하면 내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그분들이 내게 물려준 유산이 많지 못해도, 그분이 내게 가르쳐 준 교육이 높지 못해도, 깊지 못해도, 그분을 세상에 내세워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자랑할 수 있는 내 부모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내게 생명을 주셨다는 한 가지 사실 때문에, 내게 하나님을 가르쳐 주셨다는 이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 부모님은 공경받아 사랑받아 존경받아 마땅하신 분이십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힘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내 부모, 내 이름을 부르며 손모아 기도할 때 하나님이 응답하십니다. 내 아버지, 손들어 축복할 때에 손 끝에 축복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눈물의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식은 망하지 않습니다. 자녀의 부끄러웠던 인생항로를 따라다니며 그 수치와 함께 하는 내 어머니, 고통에 함께 동참하시는 우리 하나님, 내 어머니 우리 하나님의 사랑 아니겠습니까?

내 어머니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4.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치마는 덮어주는 사랑의 보금자리였습니다. 내 어머니의 가슴은 우리를 안아 주시고 상처받은 내 상처를 치료하는 사랑의 능력의 품이었습니다. 추운 밤 나를 덮어주시던 그 이부자리는 이 세상 살아가며 고독하고 외로울 때에 나를 덮어주시는 하나님 사랑의 품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할 인류의 모든 허물을 덮어 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보자기였습니다. 내 몸에서 냄새가 날 수록, 내가 남들에게 내세워 당당하지 못할수록, 어머니의 품은 안타까이 눈물 흘리며 날 씻어 주시고 덮어 주셨지요.

내 어머니는 밤을 세우며 길쌈하여 내 옷을 손수 만들어 주시던 어머니이십니다. 옛날의 자녀들은 어머니의 땀과 눈물과 피로 얼룩진 사랑의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아름다운 삶으로 살아가지 못할 때에 우리 예수님 피 흘려 의의 옷을 지어주셨고, 우리 예수님 피 흘려 구원의 옷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 구속의 피로, 그 의의 피로, 우리의 허물을 덮어주셔서 이 세상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프랑스에는 역사상 69명의 왕이 집권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세 사람의 왕만이 백성들로부터 한없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들이 공통점은 모두 친어머니의 젖을 먹고 친어머니의 품에서 자라난 왕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체험한 왕은 그 사랑 때문에 백성들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지요. 그 왕의 마음에 어머니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 심겨져 있었기에 백성들을 사랑하는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여러분 무엇입니까?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땅에 가득해 지는 것입니다. 어머니로부터 용서받은 경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격려를 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세상 다른 사람들을 돌봐주고 세워줄 수 있는 아름다운 자리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로부터 존귀함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존귀한 존재로 성장해 갈 수가 없습니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외롭게 자란 사람들 가운데서도 얼마든지 그 사랑 이상으로 큰 은혜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들보다도 더 풍부한 사랑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특별한 은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들의 덮어주시는 사랑, 그것은 이 세상을 우리로 하여금 당당하게 살아가도록, 위엄있게 살아가도록, 품위있게 살아가도록, 날 덮어주시는 사랑의 보자기, 사랑의 옷입니다.

제가 일전에 섬기던 충신교회에 이화여자 대학교에 다니는 “조숙”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특별새벽기도 시간이 되어서 새벽에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숙이가 차를 타고 교회에 가고 있었습니다. 술취한 덤프 트럭 한 대가 새벽녘 비틀거리며 조숙이가 탄 이 승용차를 향하여 돌진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깜짝 놀라 “숙아 비켜!” 딸 아이를 품에 안고 비명을 지르는 순간 덤프 트럭은 옆구리를 치고 달아났습니다. 경찰들이 달려와서 찌그러진 차를 펼치고 가족을 끄집어 내고 보니 어머니는 산산이 부서지고 갈기갈기 찢겨져 피투성이가 되어 이미 숨을 거두었고, 어머니의 품 밑에 감추어진 숙이는 잠깐 기절했을 뿐 찰과상 정도로 목숨을 건질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 어머니의 사랑이요, 이게 덮어주시는 내 아버지의 사랑 우리 하나님의 사랑 아니었습니까?

내 어머니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요?

5. 그 사랑은 손해보고 좋아하는 사랑입니다. 
잃고도 행복해 하시고 손해보고 기뻐하시는 사랑이 모성입니다. 

박용성님의 ‘이야기꽃’이라는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날 저녁, 엄마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린 아들이 부엌으로 쪼르르 달려와서 메모지 한장을 내밀었습니다. 
엄마는 앞치마에 손을 닦은 다음 그것을 받아 읽었습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잔디 깍은 값 2,000원, 이번 주에 내 방 청소한 값 1,000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500원, 엄마가 시장간 사이 동생 돌봐 준 값 500원 
쓰레기 내다 버린 값 1,000원, 숙제 잘한 값 1,000원 
마당 청소한 값 1,000원 
합계: 6,500원 

엄마는 메모를 다 읽은 후 기대에 차 있는 아들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습니다. 
이윽고 엄마는 빙그레 미소 지으며 펜 하나를 들고 그 종이 뒷면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너를 내 뱃속에서 열 달 동안 키워준 값 무료 
네가 아플때 밤새워 간호하고 널 위해 기도한 값 무료 
너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힘들어 하고 눈물 흘린 값 무료 
너 때문에 수많은 밤을 불안으로 지새며 염려한 값도 역시 무료 
장난감, 음식, 옷 등 너에게 해준 모든 것도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엄마의 진정한 사랑 역시도 무료 

내 어머니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6. 내 어머님의 품은 하늘의 고향입니다.

어머니의 가슴은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고향입니다. 내 어머니의 가슴은 생명의 젖줄입니다. 내 어머니의 가슴은 사랑의 보금자리입니다. 내 어머니의 가슴은 피난처요 내 놀이터 였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은 평화의 동산이요 우리의 고향입니다. 우리가 고향에 가는 것은 어머니가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나를 버려도 오직 어머니 때문에 고향이 그립고 고향은 언제나 우리에게 소중한 자리로 남아 있습니다. 고향은 어머니의 가슴이요 하늘 고향은 어머니 같으신 내 하나님이 계신 곳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왜 고향에 갑니까? 기다리시는 부모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고향이 그리워 어머니를 찾아갈 때 문 밖에 서서 밤이 이슥하도록 ‘내 아들 딸 언제 오나’ ‘내 아들 딸 어디서 오나’ 날 기다려 주십니다. 나를 알아주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 고향에 갈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날부터 우리는 고향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죠.

저는 내 어머니를 제 집에 모신 날부터 고향이 필요 없습니다. 제 집이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먼 훗날 천국 문에 서서 나를 기다리실 하나님 아버지를 생각해 봅니다. 나보다 먼저 하늘에 서서 날 기다려 주실 내 아버지, 내 어머니를 상상해 봅니다. “아들아, 어서 오너라. 내 너를 얼마나 기다렸는가. 내 너를 한번도 땅 객지에 보내놓고 얼마나 오랫동안 너 돌아오기를 기다렸는가. 네가 외로워할 때에 너와 함께 살 집을 나는 지었노라. 네가 힘써 애써 눈물 흘리고 피 흘리며 날 섬길 때에 영광의 낙원을 준비하여 널 기다렸노라. 아들아 어서 오너라” 빈손 들고 주님 앞에 서는 그 시간 날 기다려 주실 내 부모님, 내 하나님 생각만 해도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밤을 세웠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 내 꿈이 있다면 나는 하나님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영광스런 내 아버지의 존전에 서는 그 순간 부족한 종의 꿈이 있다면 내 어머니의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한 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이 분이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주신 “내 어머니”이십니다. 제가 꿈이 있다고 한다면 내 어머니가 하나님 앞에 자랑스럽게 나를 내세우며 “하나님 아버지 내게 보내주신 나의 자랑, 나의 기업, 나의 상급 - 내 아들입니다.” 내 어머니는 나의 영광이요 나는 어머니에 영광의 면류관이 되고 싶습니다.


심순덕 님의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재미있는 글이 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하루종일 밭에서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 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 
엄마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수 조차 없이 닳고 문들어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끄덕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외할머니 보고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 인줄만..... 
함밤중 자다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