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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의 축복 (민 6: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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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축복 (민 6:22~27)


어거스틴의 글에 의하면 주후 1-3 세기까지의 기독교인들은 잔혹한 박해를 받으면서 역경 속에서
너무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만날 때마다 이렇게 속삭였다고 합니다.
"데오 그라티아스!" 이 말은 라틴어로서 [ 하나님 감사합니다. ] 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절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데오 그라티아스"라고 속삭일 수 있었는가? 
여기에 대해 어거스틴은 그들은 환경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하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앙의 삶은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발은 환경의 착고에 메여 있을지라도 마음은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도 이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데오 그라티아스」하나님 감사합니다! 의 고백이 나올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약 1 년하고 1개월이 지났을 때입니다. 
출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우상 사건으로 이스라엘이 홍역을 치렀고 다시 정비하여 인구조사도 마쳤습니다. 이제 막 가나안을 향하여 제 차 출발하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발걸음을 스톱! 멈추게 하고는 모세를 명하여 아론과 그 아들들, 즉 제사장들에게 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축복하라 합니다. 우리에게 얼굴을 향하여 그토록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 눈이 뜨여지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1. 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까?(22-23절) 

그런데 오늘 하나님 말씀은 우리의 상식을 뒤엎어 놓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복이란 무언가 복 받을 만한 신앙의 장점이 있어야 복을 주시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이렇게 축복하라합니다.
출애굽하여 1여년 동안 잘한 것이라곤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되레 마라에서 물 없다고 불평하고, 애굽의 종노릇 하던 근성 버리지 못하고 금송아지 우상 섬기다가 혼줄 난 일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까?
복 받을 자격도 없는 이스라엘에게 왜 이러한 축복의 명령을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 즉 축복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나와 어떤 관계입니까? 
축복의 관계라는 사실이 믿기워 집니까? 믿으시면 아멘 합시다 !
축복의 관계가 이뤄질려면 먼저 확신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민수기서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 백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민수기는 백성의 수를 헤아린 책이란 뜻인데 바로 하나님 백성의 수안에 들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하나님 백성의 수안에 들어와 있습니까?
신약적으로 말한다면 교회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 되는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 있습니까?

특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백성의 수를 헤아리라 할 때에 각 지파에 싸움에 나갈만한 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가? 헤아리라 합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지상 교회는 전투적인 교회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교회는 싸움에 나갈만한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 편에 서서 싸울 수 있는 사람 
즉 그 교회가 세상과 마귀와 대적하여 하나님 편에 서서 기도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 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우리교회에서 싸움에 나갈만한 군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과 축복의 관계라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먼저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제사장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는 하나님과 축복의 관계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단 싸움에 나갈만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교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지나온 길 돌이켜 보면 종살이하고  그리고 우상 섬긴 부끄러운 것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지 마는 눈에 보이는 것은 삭막한 광야 밖에 없습니다.  과거 돌아보면 귀 죽고, 현실 돌아보면 광야만 보이니 낙심되고 
그러다 보면 여차하면 불평이 터져 나오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너희를 인도한 여호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복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이란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약속만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은 바로 이런 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몇 년 전에 <엔돌핀 신드럼>의 주인공 이상구 박사의 글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가지되 <뻔뻔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 합니다.
왜? 복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 복 주실 줄 믿습니다 하려고 하면 이 <뻔뻔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도 이런 측면에서 좀 뻔뻔한 믿음 가지고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복 받을 자격 없는 이스라엘에게                   
네게 복 주시고 지키시기를 원하며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좀 뻔뻔스럽지마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과 보호하심과 은혜와 평강을 바라보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살후3:16절에 바울은 살 교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맺으며
[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너희에게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합니다.
우리는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오늘 말씀에 눈이 뜨여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이 네게 복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의 뿌리를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내려야 합니다.

하나님 백성에게 죄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복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께 삶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세상 다른 것에 복을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우상숭배 나아가 물질만능주의입니다.
렘2:13절 [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라. ] 합니다.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 성경에 보면 이런 표현들이 종종 나오지요
구멍 뚫어진 전대, 물 없는 구름이니, 열매 없는 가을 나무니 뭔가 될 것 같아서 자기 힘으로 살았지마는 
결국 터진 웅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복의 근원 되신 하나님께 삶의 뿌리를 내리지 아니하고
스스로 판 웅덩이는 물을 저축치 못한다는 사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럼 첫 축복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2. 여호와께서 모세를 통해 제사장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하라고 하실 때               
첫 축복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24절)

24절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 합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1:28절 [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십니다.
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삭막한 광야뿐이지마는 그러나 너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은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함께 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는 이미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어린이 재활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한 여자 집사님의 간증입니다. 
6살 난 소아마비 어린아이를 돌보게 됐답니다. 비록 몸은 부자유스러웠지만 그 어린아이는 아주 밝고 명랑했습니다.          
붙임성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금새 친해졌습니다. 어느 날 여자 집사님이 그 어린아이에게 
초콜릿하고 사탕이 든 작은 상자를 포장해서 선물했습니다. 
얼마나 좋아하든지 그 선물을 손에 꼭 쥔 채 그림책을 펼치면서 읽어달랍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가니까 그것도 싫증이 났던지 불쑥 그 여자 집사님 주머니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집사님은 주머니에 잇는 것들을 다 꺼내 보여줬답니다. 
열쇠, 지갑, 조그마한 전화수첩 그리고 동전 몇 닢, 어린아이는 동전을 만지막 거리면서 `이게 다예요?` 하고 묻더랍디다. 그래서 `그래 이것이 전부야. 나 참 가난하지?` 그랬더니 
그 아이는 집사님을 쳐다보면서 아주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줌마는 나보다 훨씬 부자야. 마음대로 걸을 수 있잖아요` 
여섯 살짜리 소아마비 어린애가 여 집사님의 마음을 새롭게 했습니다. 
지금까지 그 집사님은 자기가 부자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부자이면서도 부자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섭섭하셨겠습니까? 
예수 믿는 우리는 이미 복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것 모르고 살아간다면 하나님 얼마나 섭섭하게 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광야생활입니다.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켜주지 아니하시면 
단 하루라도 살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지 아니하시면 언제 어디서 대적 아말랙이 뛰쳐나오고 방해꾼 모압이 막아서며 유혹할지도 모르는 광야생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켜주실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창28: 일찍이 야곱이 형 에서의 칼을 피해 아비 집을 떠나       
외삼촌이 사는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에 루스라는 광야에서 돌을 베개삼아 잠을 자다가
꿈 가운데 하늘 문이 열리고 사닥다리 가운데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며
그 위에 여호와께서 말씀을 하시는데

[ 나는 네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니  네 누운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
이때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 과연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두렵건대 이곳이여 다른 것이 아니라  이는 하나님의 전이요 하늘의 문이로다 ] 라고 고백하며
[ 하나님이 나의 가는 길에서 지켜 주시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주신 모든 것에 십분 일을 꼭 드리겠습니다. ] 라고 서원 합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바로 야곱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보호해 주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비록 루스 광야 같은 세상에 살아갈지라도 눈이 뜨여져 하나님의 지켜주시고 보호하심을 확신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 확신 속에서 은혜에 보답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여호와의 얼굴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여호와의 얼굴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25-26절) 

25절 [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 
26절 [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당신의 얼굴을 비추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얼굴과 같은 모습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마는
얼굴이라는 표현은 그분의 전인격을 상징하는 것으로 마음이 제일 잘 나타나는 곳이 얼굴과 손입니다.
여호와는 얼굴로 네게 비추고 향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관심이 네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얼굴의 방향은 인간생존의 열쇠입니다.
창조주가 되시고 복의 근원이 되시는 여호와의 얼굴이 내게 비출 때 나의 삶에는 생명력과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철학자 <프로드리히 니이체>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은 죽었다 라는 말로 유명한 무신론자입니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니이체에게 물었습니다.
[ 자네는 무엇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 그토록 부정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는가? ]
그러니 니이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 내 부친의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즐겁게 지내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네 ] 
왜 그리스도인들이 생명력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잃어버리고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때 그토록 따분하게 생활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주위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고 신앙생활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크리스챤 여류 수필가의 글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수답 신앙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천수답 아시죠?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아니하면 곧 말라버려 농사지을 수 없는 천수답,
바로 성경이 배경 되는 팔레스틴 지방이 그러한 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면 적당한 때에 이른비와 늦은비의 은택을 내려 주시겠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천수답 신앙을 원하실까?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니 정직하지 아니할 수 없고, 겸손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천수답 신앙이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과 기쁨이 넘치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문제는 내가 여호와께 얼굴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얼굴을 들어 여호와를 바라볼 때 하나님은 그 얼굴을 내게 비취실 줄 믿습니다.
대상16:11에 다윗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 여호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그 얼굴을 항상 구할 지로다. ]      
그분의 얼굴을 구하라고 합니다.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얼굴의 빛이 비추는 곳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호와 하나님의 그 얼굴을 ‘네게 비추고, 네게로 향하여 드신다’ 는 표현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

4. ‘네게 비추시고’ ‘네게로 향하여 드신다’는 표현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입니까?(25-26절)

얼굴을 네게 <비추사>라는 말은 <영광스럽다>뜻을 나타내는 말인데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내게 비춰 은혜를 베푸시면 성도의 삶은 존귀케 된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세끼나 즉 영광이라고 하는데 
메투 헨리는 <후광>이라고도 합니다.  세상에서는 누구의 후광을 입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지요
하나님 백성에는 하나님의 후광을 입을 때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이곳에 비췬다면 오늘 우리의 삶이 달라질 줄 믿습니다.
문제는 내가 하나님께 얼굴을 돌려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의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형통합니다.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호의와 친절」이 다 은혜입니다.
그 중에도 대표적인 것이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선민 삼아주신 것이고 
신약에서는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사건으로 내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은혜란 바로 인간사에  하나님이 개입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 나의 삶은 변합니다.  나의 삶은 빛납니다. 나의 삶은 존귀하게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생애 복된 생애였습니다.
복된 생애라 해서 고난과 역경이 없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생명을 잃을 번 한 숱한 어려움도 있었지마는  하나님이 개입하셨기 때문에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고  신앙의 삶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얼굴을 내게 비추사 나의 삶에 개입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개입을 바라보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빛이 임하는 예배가 되시기 바랍니다.

 26절 [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                
<향하여 드사>라는 이 말은 ‘열정적으로 바라보다’ ‘계속하여 주시하다’ 라는 뜻입니다.
호크마 주석에는 [ 하나님께서 특별히 귀중한 대상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주시하신다 ]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표현입니다.

성도는 이 평강 즉 샬롬의 복을 받아야 합니다.
샬롬!- 하나님 백성이 그토록 원하는 복입니다.
왜 샬롬을 바랍니까? 이 샬롬 속에는「평안과 행복과 번영과 건강과 사랑」이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 샬롬은 하나님과의 화목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 되어질 때 세상의 모든 것과 화목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편한 관계가 생기거든, 먼저 하나님과 화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풀어 나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25-26절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여호와는 내게 아주 열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개입하셔서 
형통한 삶, 복된 삶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복된 삶을 누리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네게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이 은혜와 샬롬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입니다. 우리가 얼굴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즉 복된 신앙의 자세로 돌아와야 합니다.  
             
문제는 복을 누릴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5. 27절이 내게 주는 신앙적 교훈이 무엇일까요?
27절 [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라 합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한다면 대제사장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은 영적으로 오늘날 목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교회 안에서는 일부 목회자들의 역기능적인 면 때문에 목사의 권위를 부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자로 고통 당하는 가족들을 돕는 단체에서 아이들이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으로서 3가지 대처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1) 말하지 말라,  2) 신뢰하지 말라,  3) 느끼지 말라.
기독교 상담가들에 따르면 교회에서 이런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일부 목회자들의 역기능적인 면 때문에 교회생활 가운데 하는 수만 있으면 
조용히 예배만 드리고, 목회자의 말을 다 믿지 않고, 설교에 감동도 받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의 종들의 축복을 받고 못 받고는 내게 책임이 있습니다.  

이 책임이라는 말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가 책임이라는 말을 쓸 때 우리가 알고 있는 말은 누가 벌을 받아야 하느냐? 는 뜻에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책임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 뜻은 영어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책임-Responsibility  이것은 Responds +ability
즉 반응 + 능력인데 <반응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어떻게 반응하느냐? 가 내 인생의 갈림길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어떤 성도는 주의 종으로부터 축복을 받아야지 하고 이사를 한다든지 개업을 한다든지
아니면 자녀들 군에 갈 때, 혹은 결혼식을 앞두고 꼭 주의 종들을 모시고 축복 받으려고 간절히 바라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만인 제사장인데 내가 알아서 하면 되지 하고 자기가 알아서 하는 교인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목사가 진심으로 축복이 나가는 성도와 가정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아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인들의 책임입니다.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축복 임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한가지 덧붙여 말씀드린다면  믿음의 가장은 그 가정에 축복권이 있습니다.
롤프 가복(R. GarBorg)의 `하루에 한번씩 자녀를 축복하라` 는 책에 보면 
저자는 민6: 24-26의 말씀을 가지고 자녀들을 축복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녀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들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라는 
이 말씀에다 자녀들의 이름을 넣어 축복하고 마지막에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축복이 나가는 강단이 되고  축복이 나가는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야베스의 기도와 같이 24-26절까지 암송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는 네게 관심을 갖고 열정적으로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복된 삶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신다면 
먼저 하나님의 백성의 수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싸움에 나갈만한 자, 
즉 우리 교회 안에 기도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얼굴을 들어 여호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오직 주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종들의 축복이 나가는 복된 가정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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