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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향기로운 제물 (빌 4: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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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제물 (빌 4:14~20)


(14)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바울의 헌금신학

사람에게는 각자 민감한 것이 있습니다. 지식이나 학벌에 민감한 사람도 있고, 외모나 가족 사항에 대해서 민감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민감한 게 있는데 다름 아닌 물질입니다. 바울은 서신서 여기저기에서 물질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본 빌립보 서신에서도 4장 10절에서 20절까지 장황히 물질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피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비량 선교로 유명합니다. 선교지에서도 손수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았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9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바울의 직업은 천막 짓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이곳에서도 천막 짓는 일을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했으며 그 틈틈이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스스로 자비량하면서 복음을 전했을까? 사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그 지역 교회의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주님은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파송하며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눅10:7)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권이 없겠느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이 없겠느냐”(고전9:4-6)고 반문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꾼으로서 해당 교회의 섬김을 받을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비량으로 선교한 이유에 대해서는 고린도서에 보다 자세히 설명되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오랜 세월 목양하면서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로부터 일절의 급료를 받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서 고린도교회의 일부 성도들은 야비하게 바울이 정식 사도가 아니라서 그렇다고 이상한 비난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이에 대한 변명을 하면서 바울 자신이 자비량 선교하는 이유를 밝힙니다. 첫 번째 이유는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을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

복음에 장애가 된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는 철학자들이나 궤변가들이 이곳저곳을 방랑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한 지역의 유지나 공동체가 그 사람의 가르침이 훌륭하고 교사로서 탁월하다고 생각되면 급료와 먹을 것을 주고 그 지역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심지어 마술사나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먹을 것을 얻고는 하였습니다. 결국 진리를 주고 대신 물질을 얻는 방식이 보편화된 시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이 이처럼 싸구려 진리 취급을 받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복음의 은혜는 값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값없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얼마 되지도 않는 급료를 지불하며 행세하는 것을 사도 바울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복음 앞에서 우리는 그저 그 놀라운 은혜에 감사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어야 하는데 정말 하나님 보시기에 작은 물질을 드리고 잰 체 합니다.

우리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값없이 우리 죄를 용서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비하면 우리가 드린 물질이나 헌신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대단한 것이나 되는 것마냥 교회에서 행세하고 주인노릇하려 합니다. 목회자들도 복음의 은혜보다는 많은 헌금을 바치는 사람들을 더 대접하고 심지어 그 눈치까지 봅니다. 적게 드리는 자는 무시하고 섭섭해 합니다. 세상의 서열이 교회에도 그대로 연장되어 나타납니다. 이 모든 것이 물질 때문에 일어난 현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인간의 공로를 조금도 내세우지 못하도록 하고 자신도 이처럼 세상의 권세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아예 물질을 전혀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정말 복음답고 하나님의 은혜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자비량 선교하는 이유는 복음 전하는 것이 마땅히 해야 될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9장 16-18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 내가 내 임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을 맡았노라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이 부득불 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전파 사역은 주님이 자신에게 맡긴 직분이라고 합니다. 자신이 마지막 날 받을 상급은 복음을 값없이 전한 것, 곧 급료를 받을 수도 있지만 받지 않은 것이 자기 상급이요 자랑이라고까지 합니다. 바울은 스스로를 죄인중 괴수라고 고백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고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죄인이었던 자신을 은혜로 구원받게 해 주신 것도 황송합니다. 거기에 복음을 전하는 직분까지 맡기셨으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런 고백이 있습니까? 하나님 주신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아무리 봉사하고 헌신해도 부족하다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이런 감사보다는 내가 드린 만큼 얼마나 돌아올까를 계산하고 내게 주어지는 혜택을 따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사도 바울의 경우를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분명히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먹을 권리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권리를 사용했습니다. 모든 것은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와 목회의 상황에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복음의 효율적 사역을 위해서 자비량이 좋을 때도 있고 급료를 받는 것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요즘도 어느 선교단체는 전임 사역자들이 자비량 선교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자비량 한다고 하지만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후원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단체가 떠맡아야 할 짐을 개인에게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면 복음 사역에 전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전혀 물질을 받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 15, 16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번 두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립보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그리스의 마게도냐 지역에 처음으로 세운 교회였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빌립보 다음에 세운 교회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갓 세워진 어린 교회였지만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바울을 도왔습니다. 마게도냐 지역을 떠날 때도 도왔습니다. 이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히자 에바브로디도를 통해서 돕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바울이 꼭 자비량 선교만 고집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하고 있던 지역에서는 받지 않았지만, 그곳을 떠나서는 선교 헌금식으로 지원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9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성숙하지 못한 고린도교회에서는 특별히 물질 문제에 대해 사도 바울은 조심하였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성숙한 마게도냐 교회, 아마 빌립보교회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성숙한 공동체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원을 해주면서도 마음 편하게 지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나 친척 관계에서나 또 사회에서도 도움을 주면서도 불편하게 하고 자랑하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움을 받는다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불편합니다. 소리 없이 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더 테레사의 어머니는 자녀들에게 늘상 이런 교훈을 주었다고 합니다. “얘들아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할 때는 말없이 하여라. 바닷물 속에 돌을 던지듯 말이다.” 

또 바울은 부유한 교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모교회를 지원하도록 헌금을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일찍부터 헌금을 모아놓으라고 강하게 권면하기도 했습니다. “혹 마게도냐인들이 나와 함께 가서 너희의 준비치 아니한 것을 보면 너희는 고사하고 우리가 이 믿던 것에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하노라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고후9:4,5) 이 연보는 가난한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한 연보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다른 형제 교회를 돕기 위한 연보에는 열심을 내고 책망을 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향기로운 제물

헌금이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바울 사도의 말씀을 통해서 좀더 깊이 묵상하기를 원합니다. 14절에서 바울은 헌금을 보낸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라고 칭찬합니다. 바울이 지금 감옥에서 괴로움을 겪고 있는데 이를 돕기 위해 보낸 헌금은 곧 자신 고난에 동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석합니다.

물질이 그런 효과가 있습니다. 우리가 직접 어려움을 나눌 수는 없지만 물질을 대신 보냄으로써 그들의 어려움을 덜고 또 간접적으로 고난에 동참합니다. 멀리 아프리카나 동남아에서 굶주리고 고통을 받고 있는 이웃들에게 물질을 보내는 것도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지진과 해일, 기근으로 피해를 입는 세계의 이웃들에게 물질을 보내는 것은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고 인권이 유린되는 곳에 격려의 편지를 쓰고 물질을 보내는 것은 옥에 갇히고 포로 된 자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북한당국이 핵과 미사일 개발, 개성공단 위협 등 여러 강경책을 사용하며 남북관계를 힘들게 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많은 수의 북한 주민들이 굶주림에 처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물질로 돕는 것은 그들의 고통에 함께 동참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마지막 날 우리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면하게 될 것입니다. 이 굶주린 형제의 고난을 외면했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아직까지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또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멀리서 또는 가까이서 도와주시는 많은 분들의 후원과 사랑이 없었다면 매우 힘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분들은 우리 교회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 교회가 겪는 어려움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 여러분들도 드리는 물질로 저의 어려움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바로 이런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18절에서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향기로운 제물이란 것은 제물을 태워서 드리는 번제와 같이 그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처럼 땅에서 하늘로 바로 올라가는 향기와 같은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입니다. 요한계시록 5장 8절입니다.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다른 하나는 바로 헌금입니다. 헌금은 교회에 바치는 것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을 향한 모든 선행과 구제가 모두 헌금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면 기도를 많이 하든지 아니면 구제를 많이 해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하나님은 작은 소자들을 사랑하시고 매일같이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들이 굶지 않나, 그들이 고통당하지 않나 하나님은 안타까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런 소자를 돕는다면 하나님은 매우 기뻐하시고 그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사도 바울이 작은 소자가 되어 있고 빌립보 교회가 그를 돕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향기로운 제물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말씀합니다. 

요즘은 옛날보다 기부문화가 활성화 되었습니다. 연예인들 중에도 몰래 엄청난 액수를 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문근영 씨가 10년 동안 익명으로 8억이 넘는 물질을 기부해 온 사실이 밝혀져 화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기부로 또 유명한 사람이 가수 김장훈씨입니다. 김장훈 씨는 지금까지 40억이 넘게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수입의 거의 대부분을 기부하면서 자신은 보증금 5천만원 짜리 월세 아파트에 산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대출을 받아서 약정한 기부금을 내기도 하고 해서 신용카드도 없고 통장 잔고가 제로가 된 적도 많다고 합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기가 행복한 것은 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내가 벌어서 좋은 일에 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내게 물질에 대한 소유욕이 있다면 그것은 나누기 위함입니다. 나눔에는 버는 기쁨, 쓰는 기쁨, 웃는 기쁨, 가슴이 따뜻해지는 기쁨이 따라옵니다.” 김장훈 씨는 많은 돈을 기부하였지만 그것을 결코 자랑하거나 자기 이름을 내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기부는 내가 한 것이 아니고 공연을 보러 온 팬들이 나를 통해 기부를 한 셈입니다. 텔레뱅킹, 인터넷 뱅킹처럼 저는 휴먼뱅킹에 불과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작은 소자들을 돕는 선한 일을 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십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에게만 머물지 않고 도움을 받는 자나 도움을 주는 자에게 기쁨으로 임합니다. 도움을 받는 자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며 기쁨으로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도움을 주는 자는 사람의 영광과 감사를 받으려 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바울은 헌금을 기쁘게 받았지만 계속해서 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18절입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 말씀은 빌립보 교회가 보낸 헌금이 자신에게는 과분할 정도로 풍성하다는 감사의 인사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제 풍성하니 다시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질에 초연하고 자존심까지 센 사도 바울의 태도를 볼 때 그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사실 계속해서 도움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은 못됩니다. 자립해서 오히려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좋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우리 교회의 형편을 생각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지난 주로 3주년이 되었습니다. 3주년이 되면서 한편으로는 감사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여전히 자립을 하지 못하고 다른 교회나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1주일 동안 오늘 전할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제 우리 교회도 재정적으로 자립해야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이제는 ‘재정적으로 속히 자립하게 하옵소서’ 라고 바꾸었습니다. 항상 통장 잔고를 보며 ‘주님 채워주십시오.’ 하고 기도하였는데 이제는 옳은 기도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비유에서 3년이 되도록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찍어 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눅13:7)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되면 열매를 맺고 자립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렵겠지만 우리가 재정적으로 자립하도록 성도님들도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실 그동안 감사했던 것은 우리도 어려운 형편에서 몇몇 선교 단체와 선교사, 구호단체와 북한을 위해 적은 양이나마 도움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2년 넘게 이 일을 해오다가 우리도 자립하지 못했는데 다른 곳을 돕는 것이 주제넘은 것 같아 몇 곳을 취소하였습니다. 이것이 좀 안타깝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히 재정 자립을 이루어 계속 선교와 구제에 힘쓰는 교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렇게 넘치도록 많은 은혜를 받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영적인 축복의 기도일 것입니다. 19절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도록 기도합니다. 나누고 바치면 가난해질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부요해질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도 부요해집니다. 어느 복음성가 가사처럼 “쓰고 빌려주면 풍성해져 땅위에 가득”하게 됩니다.

잠언서 11장 24,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구제하면 가난해질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 부하게 됩니다.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자신도 윤택하여진다고 말씀합니다. 끌어안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끌어안고 있다가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은 돕고 베푸는 자에게 더 많은 물질로 채워주십니다. 우리 모든 쓸 것을 채워주시겠다 약속하십니다. 먹고 입을 것뿐만 아니라 우리가 소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것도 풍성히 채워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 풍성한 은혜를 맛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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