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기념비를 세우라 (수 5:1~15)

  • 잡초 잡초
  • 559
  • 0

첨부 1


기념비를 세우라 (수 5:1~15) 


오늘은 우리교회 설립 33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저는 교회는 길갈에 세워진 기념비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강을 건넜을 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하여 요단강 중앙에 있는 돌 열두 개를 취하여  요단 강 언덕 길갈에 기념비를 세워라고 했습니다.
왜 기념비를 세우라 했습니까? 말 그대로 기념하기 위하여 즉 교육용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래서 수4:21절-에 보면 
[ 후일에 너희 자손들이 그들의 아버지에게 묻기를 이 돌은 무슨 뜻이니이까? ]
하거든 24절 
[ 이는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며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라 ] 교회는 여호와의 손이 강하심을 나타내는 기념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나타내는 장동의 기념비입니다.
문제는 33년간 지금까지만 아니라  앞으로 더 크신 여호와의 강한 손길을 나타내는 우리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들어가려고 할 때 
가나안 땅의 첫 번째 성인 여리고 성 정복을 앞두고,  직접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을 통해 천국과 축복의 상징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하여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 교회 설립 33주년을 맞아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약속을 축복으로 누릴 줄 아는 우리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가나안 땅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는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왜 이 말씀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들려줍니까?
1. 5:1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가나안 땅 정복의 관문인 여리고성 정복 사건을 잘 압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도 총력 전도주일을 앞두고 여리고 작전을 전개합니다.
여리고 작전 이란 성을  하루에 한 번 6번 그리고 마지막 날 7번 돌면서 고함을 지르게 한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여리고는 고함만 지르면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을 봐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의 강한 손길로 요단강을 건넜고
길갈의 열두 돌의 기념비를 세우므로 그 소문을 들은 가나안 땅 사람들은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마른 땅으로 건넌 것은 요단 서편의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최후의 방파제가 무너진 사건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전쟁이 시작되지도 않았지만 이미 마음이 녹아 정신을 잃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참가하고 있는 영적 전쟁의 전황을 잘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 원수 사단의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것뿐입니다. 수세에 처한 것은 사단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데 어떤 교회는 주여! 하고 고함만 지르면 무너지는데 어떤 교회는 새가 빠지도록 고함질러도 안 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차이가 무엇이냐? - 길갈 사건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길갈 사건의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
2. 길갈 사건의 첫 번째가 무엇입니까?(2-9절)
1. 할례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2절 [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
3절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
할례가 무엇인냐? 남자의 양피를 베는 것으로 지금의 포경수술입니다. 
할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양피를 베는 의식 그 이상으로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1) 할례는 하나님 백성의 표식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먼저 회복하기 위함입니다.
`할례`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신 언약의 증표입니다. 
그 믿음의 흔적을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인생의 성패는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적인 관계가 어떤지에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 진군이라는 중대 문제에 앞서  하나님과 언약적인 관계부터 회복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군대인 것을 먼저 확인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의 백성만이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하므로 하나님 백성임을 확신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친 백성입니다. 어디 가더라도 하나님 백성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라는 확신만 있다면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리고 성 앞 길갈에서 할례는 하나님 백성의 표식의 차원을 넘어 
2)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6절에 보니 출애굽한 이스라엘 장정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치 않았기 때문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리고 7절에 새로운 새대는 광야의 노중에서는 할례를 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할례 없는 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할례 없는 자가 무엇입니까?
물론 여기에서는 단순히 환경상 할례를 받지 못했다는 말이지만 
성경에 할례 없는 백성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할례의 의미는 구약에서도 신10:16절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목을 곧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롬2:29절에
[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하느니라 ]고 합니다.
그러므로 할례의 신령적 의미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행7:51절에 보면 스데반이 순교 직전 공회 앞에서 설교할 때에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러 너희 조상과 같이하는 도다 ]고 질책을 합니다.
우리가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하면 항상 성령을 거스립니다.
성령을 거스리는 것이 무엇입니가? 바로 육신입니다.
그래서 할례시 남자의 양피를 베어내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표식이기도 하지만 
내 속에 육신적인 것을 제하여 버린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예민한 살점을 베어 버린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바로 내 속에 가장 고질적인 완고함을 베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8-9절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온 백성에게 할례 행하기를 마치매 백성이 진중처소에 처하여 낫기를 기다릴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날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 떠나가게 하였다 하셨으므로 
그곳 이름을 오늘까지 길갈이라 하느니라. ]  
이스라엘이 할례를 행한 장소를 길갈이라고 불렀습니다.
길갈은 <떠나가게 했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는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고 합니다. 애굽의 수치가 뭡니까? 
말로는 하나님 백성이지만 삶 속에서 애굽의 노예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 보세요. 출애굽 하고도 광야생활 가운데 여차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곳에서는 생선 부추 마늘 등을 실컷 먹을 수 있었는데
하면서 아~ 옛날이여 하는 습성들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나안 땅에 들어와도 애굽의 습성 즉 육신적이고 세속적 근성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가나안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으면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 옛사람 벗어 버리지 못하면 꼭 옛사람의 습성이 튀어 나오는 것입니다.
김경일 교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  이 땅에 고질적인 사람, 
나아가 골동품 같은 사고가 깨뜨려져야 나라가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도 이런 사람 없습니까?  교회 봉사 하면서 나름대로 충성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 고집을 꺾지 못하고 꼭 자기 주관대로 해야 되는 교인들 있지요.
양피를 베어내면 얼마나 고통이 있겠습니까? 마는 그래도 베어내어야 하듯이  
내게 결정적인 애굽의 수치 이것 잘라 버려야 합니다.

본래 이 땅의 이름은 `기브앗 하아랄롯 산`(할례산)이라고 불리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행하자 그곳의 이름을 길갈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떠나가게 하였다. ]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설립 33주년 기념 주일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길갈 사건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언약의 백성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우리의 삶에 애굽의 수치 즉 노예 근성과 불신앙적인 습성들이 다 떠나가 버리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지금 할례를 어디서 행하라고 합니까? 길갈입니다. 길갈은 바로 여리고 성 앞입니다.
그렇다면 할례와 여리고 성 정복과는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
3. 할례와 여리고 성 정복과 무슨 연관이 있습니까?(9절)
2절에 <그 때에>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때란 요단강을 건넌 후 이지만  또한 굳게 닫힌 여리고 성 앞에 도착했을 때입니다.
지금 여리고 성 정복이라는 전쟁을 앞두고 남자들이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이것은 도무지 병법은 말할 것도 없고 상식에도 맞지 않는 말입니다.
아마 이스라엘은 다 기억할 것입니다. 창34:에 딸 디나의 사건 후 
야곱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 사람들에게 할례 받으면 동생 디나를 주겠다고 해 놓고 
제일 고통스러운 3일째 세겜 성 남자들을 다 죽여버렸던 일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할례를 받는 다는 것은 도무지 상식에도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 할례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남자들은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할 때 나온 20세 이상 남자들은 
광야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하다가 다 죽었습니다.  이제 광야에서 태어난 새 세대는 
광야생활 노중에는 할례를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의 땅 주인공인 새 새대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했던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는 금성철벽 여리고 성이 문제인 것 같지마는 환경이 나를 가로막고 있는 것 같지마는 그러나 정작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애굽의 수치 즉 나의 못된 습성, 내 속에 불신앙적인 요소입니다.
교우 여러분 ! 앞으로 나와 우리 교회의 앞날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이 되기를 바란다면 
먼저 나의 고질적이고 못된 습성 즉 애굽의 수치를 물리치시기를 바랍니다.
엡4:25절 이하에 보면 이 우리가 베어 버려야할 양피는  
어떤 이에게는 거짓이 될 수가 있습니다. 혈기가 될 수 있습니다.
도적질이 될 수 있읍니다. 더러운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고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 가지고 있으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조롱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합니다. 
나를 육신적으로 이끌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의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앉은 이 자리가 바로 나의 길갈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고질적인 육신적인 습성과 고집들이 굴러 가버릴 때 나를 가로막고 있는 여리고 성이 하나님의 역사로 무너질 줄 믿습니다. 

길갈 사건의 두 번째가 무엇입니까?
4. 길갈에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10-12절)
10절 이하에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진입하자마자 두 가지 의식을 행합니다. 한 가지는 할례의식이고 한 가지는 유월절 절기를 지킨 것입니다.
둘 다 그때에 상황으로 봐가지고는 아주 위험한 일입니다.
언제 기습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 가운데 이런 축제행위는 무모한 것같이 모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1)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출애굽한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송축하는 절기입니다.  신약적으로 말한다면 바로 구원의 감격을 말합니다.                  
지금 이스라엘 앞에 여리고 성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는 대책이 없습니다. 
대책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백성의 저력은 바로 구원의 감격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최대의 영광은 바로 구원의 감격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는 이상  그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이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십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문제 앞에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 머리를 짜내는 것보다
먼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구원의 감격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부흥의 역사입니다.
앞으로 비전의 30년이 축복의 가나안 땅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은혜 받아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여리고 성 정복을 앞두고 할례만 하더라도 병법상 완전히 작전 미스인데
왜? 유월절 절기를 지키게 했을까요? 요단 강 도하로 말미암아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은 여리고 성 사람들이 볼 때 금성철벽 여리고 성 앞에서도 잠잠하기는커녕  축제 분위기 속에 절기를 지키니
야~! 뭔가 굉장한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러니 더 문을 꽁꽁 닫고 떨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항상 축제의 사람, 감격의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사실은 예수님도 항상 축제의 사람이었습니다. 로리 베리 존스의 <최고 경영자 예수>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 예수님은 항상 축제 분위기 속에 사셨다 ]고 하면서
한번은 열 살짜리 아이가 저자에게 이런 질문을 하더랍니다.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와서 최초로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아느냐? 모르겠다고 하니 아이가 손을 벌리고 뛰면서 하는 말이 [ 짠~! ]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에피소드지마는 예수님은 항상 축제 분위기 속에 사셨다는 것입니다.
마귀와 세상이 가장 우리를 두려워 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하나님 백성이 바로 구원의 감격 속에 살아갈 때입니다.

미국의 위인으로 꼽히는 조지 워싱톤 카버 박사는 흑인 노예 식모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백인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평생 몰랐습니다. 
16살 때에 그 카버는 대학에 들어갈 결심을 하게 됩니다. 
약 750Km를 걸어서 웨스트 버지니아의 햄프턴 대학에 도착하게 됩니다. 
백인 학장은 이 더럽고 많이 야윈 흑인 소년을 보았을 때, 입학에 대한 허가보다는 마치 일 자리를 찾고 있는 사람처럼 강당 청소를 하루 종일 시켰습니다. 
하지만 카버는 학교 청소 시켜주는 것만도 해도 감사해서 신나게 열심히 넓은 강당을 닦고 있었습니다. 
오후 늦게 학장이 나타나서, 청소를 안 했을 거라고 짐작되는 부분들 구석구석을 조사했으나 
완전무결한 청소였습니다. 그날 카버는 기도하면서 강당전체를 두 번이나 닦았던 것입니다. 
학장은 그날 학생의 정신을 테스트하였던 것입니다. 그날로 카버는 입학허가를 받게 되고 열심히 공부해서 결국 그 대학의 학장이 됩니다. 그리고 후에 두 개의 대학을 더 세우게 됩니다.
조지 카버가 땅콩박사로 불리기까지 그의 곁에는 늘 하나님이 함께하셨다. 
그는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몸과 마음으로 보여준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사탄은 똑똑한 사람, 돈 많은 사람, 외모가 출중하다고 겁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 백성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지킬 때12절 [ 그 땅 소산물을 먹은 다음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
할례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실을 선포한 것이라면 유월절은 이 사실을 가나안 전 지경에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잔치에서 먹고 있는 곡식은 
가나안 사람들이 농사 지어 놓고 버리고 간 것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으로 무교전병을 굽고, 
곡식을 볶아서 유월절과 무교절 잔치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신령한 양식인 만나를 먹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만나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만나를 대신할 양식을 가나안 땅에서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가나안은 만나를 대신할 풍부한 곡식을 내어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만나가 내리지 않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광야의 떠돌이가 아니라 가나안의 주인이 되었음을 
유월절 잔치를 통해서 가나안 땅에 선포한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은 바로 하나님 백성의 저력으로서 이 땅의 주인공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의 주인공일 뿐 아니라 이 땅의 주인공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길갈에서 할례를 시행하고 유월절 절기를 지킨 후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 가까이 이르렀을 때입니다.
5. 길갈 사건의 최종 목적이 무엇일까요?(13-15절)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들고 마주 서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대적을 위하느냐? ]고 물으니             
 [ 나는 여호와의 군대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그러니 여호수아가 땅에 엎드려 절하며
[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하니
여호와의 군대대장이 [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합니다.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준비되기만 하면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특히 당신의 힘을 필요로 하는 백성들에게 능력이 되어 주십니다. 
사43:2절에 물 가운데 지날 때도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하도록  불 가운데로 행할 때도 타지 아니하도록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심지어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 던져졌을 때도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당신의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전쟁에서 승리케 하십니다.
단 우리가 그분 앞에 신을 벗는다면 어떤 곤경 가운데서도 우리의 구원자가 되어 주십니다.
어떤 대적의 화살 가운데서도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여호와의 군대대장 앞에선 여호수아의 이 장면은                       
모세가 시내산 불붙는 가시떨기 가운데서 소명을 받을 때 장면과 같습니다.
이때에 나타난 여호와의 사자는 바로 구약에 나타나신 예수님이십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는 말씀은  종의 자세 즉 복종의 자세를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 대장이고 너는 졸병이 되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단순해야 합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면 신앙생활은 더 어려워집니다.
가나안 정복의 승리의 비결 즉 능력있는 삶의 비결은 바로 예수님 대장 삼고 나는 졸병이 되어 따라가면 됩니다. 항상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자면 비결은 한가지입니다.
예수님 앞세우고 우리는 뒤 따라가면 됩니다. 예수님 대장 삼고 나는 그 분의 졸병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의 여리고 성은 무너질 줄 믿습니다.   

우리는 문제 앞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전에 눈을 들어 군대대장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장벽 앞에서 장벽을 바라보기 전에 눈을 들어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우리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결론>
교회 설립 33주년 기념 주일과 그리고 내일부터 부흥회를 앞두고
우리는 길갈 사건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니 나에게 길갈 사건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앞으로 우리의 삶이 바로 축복의 삶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1. 마음에 할례를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 고질적인 애굽의 수치를 버리세요
2. 유월절 -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세요.  
3. 예수님 대장 삼고 나는 졸병이 되는 복종의 자세로 서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