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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라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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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라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2:20)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마지막 공생애를 끝내시기 위해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종려나무를 꺾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거리에 깔아드리고, 그 나무 가지를 흔들며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교회는 이날을 기념하여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종려주일과 함께 이날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수난의 길을 걸어가신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믿음의 중심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십자가만을 자랑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입성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고난주간을 지내야 합니다. 고난주간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럼 우리는 고난 주간을 어떻게 지내겠습니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고난주간, 우리는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야 됩니다. 곧,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환호하였던 군중들은 예수님과 함께 죽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죽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는 성난 군중으로 돌변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죽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흩어져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그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죄로 죽을 내가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사람이 예수와 함께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려 함이 아니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롬6:6-7)   
  우리는 죄인인 내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의로운 새 사람으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계속해서 매일매일 주님과 함께 죽어가는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거룩함을 이루고 기쁨과 평화를 간직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겜버스’라는 사람은 “모든 일은 십자가 위에 있다. 매일 십자가에서 죽지 아니 하고는 생명과 평화를 얻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그 속에 생명과 평화가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죽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고 했습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이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육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일들을 만들어내는 내가 죽어야 합니다. 우리의 심각한 문제는 죽어야 할 것이 죽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죽지 못하는 모습은 미완성된 모습입니다. 죽지 못한 모습은 수치와 추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죽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못하면 바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로 죽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능력입니다. 
  
고난 주간을 맞이하여 우리는, 죄인인 나, 옛사람의 품성, 육의 정욕과 탐심과 함께 나쁜 감정의 노예로 있는 나 자신이 죽어야 합니다. 죽어야 할 모습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은혜의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스스로 죽지 못하지만 십자가에 달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 능력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성도의 모습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된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결과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관하는 예수 성품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나의 죄의 힘이 만든 성품이 죽고 예수의 성품으로 다시 사는데서 나타납니다. 
  
무엇이 내 마음속에 주인이냐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주인은 무엇이고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신 주(Load) 가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귀신이 우리의 마음의 주인이 된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마12:43-45)
  
예수님은 악한 세대에 귀신들이 사람의 주인이 되어 있을 것에 대하여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 무엇이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 주위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님처럼 살겠다고 화가 나도 참고 기쁘지 않은데도 억지로 기뻐합니다. 감사하고픈 마음도 없는 데, 감사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속으로는 미우면서도 사랑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믿음인줄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지만, 결과는 그와 전혀 다른 자신에 대하여 당혹해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훌륭한 일이지만, 그러나 온전한 신앙의 삶은 아닙니다. 이것은 거짓된 행위가 되기 쉽습니다. 화를 안내고 참는 것,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사랑하고, 감사하지 아니하면서 감사하고 기뻐하지 아니하면서 기뻐하는 것,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나의 주인이 되도록 하십시오. 예수님이 내 안에 주인이 되셔서 만드는 역사가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주인이 되셔서 내가 화가 날 때, 그 화를 기쁨으로 만들어 주시고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러기에 사랑하게 되는 것이지 마음속은 미워하는 데, 겉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해 보십시오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 주인에게 기도해 보십시오. 그곳에 사람이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돈 바꾸는 자,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쫒으시며 성전을 정화시키셨습니다. 성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며 그 집은 만인이 기도하는 집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 도다 하시니라”  (마21:13)

예수님을 믿고 영접한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성전과도 같습니다. 우리 마음의 성전을 정화시키시고 우리의 심령의 주인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고 예수님의 의도입니다.       
  
스펄죤 목사님의 글 가운데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작년에 이탈리아 전도 집회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아내와 함께 알프스를 넘어가고 있는 데, 태양 빛이 어찌나 따갑게 내리쬐는지 얼굴에 화상을 입을 정도였습니다. 아내는 견디다 못해 약을 발라야겠다고 호소했습니다. 그때, 그 교회 목사님이 아내의 말을 듣고 시내 약국에 나가 넓은 잎 딱총나무 꽃의 꽃물을 사서 바른다면 낫는다고 했습니다. 이윽고 우리는 집회가 끝난 후 돌아가는 길에 시내에 나갔지요. 약국에 들어가 약병들을 훑어보았으나 그곳 언어를 알지 못한 나는 어느 것인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못하는 언어를 조금이라도 해보려 시도했으나 그 주인은 전혀 알아듣질 못했습니다. 우리는 약국을 나와 시냇물을 따라 걸어갔지요. 그 때 마침 넓은 잎 딱총나무를 발견하여 부랴부랴 그 꽃을 따서 다시 약국으로 향했습니다. 그 약국에 들어서자마자 그에게 쳐들어 보이니 그 사람은 즉시 넓은 잎 딱총나무 꽃물을 내 주었습니다. 
  
나는 그 작은 사건을 통하여 커다란 교훈 하나를 얻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단순히 말로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내가 신앙이라는 것을 나타내기는 어려운 듯합니다. 구체적인 생활 가운데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기쁨입니다.’ 라고 전할 수 있다면 이처럼 더 효과적인 전도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의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하십시오. 내안에 그리스도가 주인이 되셔서 나를 만드시고 나를 주관하시는 모습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성도의 삶을 이루십시다. 고난 주간, 우리는 죽어야 할 모습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우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인이 되셔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주관하시는 은혜롭고 아름다운 성도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믿음을 위해 사는 성도의 모습을 이루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지금 내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랑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위해 산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서머나 교회 감독인 폴리갑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는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도록 충성한 제자였습니다. 주후155년 빌라델비아의 성도 11명과 함께 불에 타 순교했습니다. 
순교당시 폴리갑은 로마의 황제 가이사는 ‘주님이다’ 라는 고백을 강요당했습니다. 폴라갑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투기장에 끌어다 놓고 많은 군중이 모인 가운데 서머나 총독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단 한번만,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를 모른다고 하라 맹세하건대 그러면 너를 좋아 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폴리갑은 의연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86년 동안 나에게 한 번도 나를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고, 한 번도 나를 배신하신 적이 없는데 내가내가 어찌 그 분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느냐“ 
그리고 폴리갑은 그들을 위해 기도한 후 장작더미 불길위에서 장렬하게 순교했습니다.
  
폴리갑은 폴리갑을 사랑하사 그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위대한 순교적신앙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죽어주신 그 십자가를 분명하게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죽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믿으시는 그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자신이 죽어야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이셨습니다. 
  
이 일을 이루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그 예수님과 함께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사랑에 겸손히 순종하며 그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죽어야 할 나를 죽게 하시고 내안에 계시면서 주인이 되어 다스리시는 그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 살아가야 합니다. 이 모습을 찾는 고난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모든 역사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는 역사로 이루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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