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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약 5: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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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 (약 5:7~11)


우리는 불신자들도 가끔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정확하게 인용하지 못하든지 아니면 인용은 바로 하더라도 적용이 전혀 엉뚱하게 되기 마련입니다.
불신자들이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아마도 "참아라.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기독신자들 중에서도 이 말이 성경에 나오는 구절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을 것입니다.
물론 '인내하라', 혹은 '참으라'는 내용의 말씀들은 성경에 자주 나타나며 또한 그런 인내에 따라오는 축복도 여러 가지로 약속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무슨 '팔복'의 한 구절처럼 "참아라.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문장으로 성경에 나타나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꽤 흔히 돌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불신자의 눈으로 볼 때에도 기독신자라면 당연히 발휘할 줄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 중에 하나가 바로 '인내'라고 여겨지기 때문일 것 같습니다.
사실에 있어서, '인내'란 비단 불신자들이 신자들을 향하여 예상하고 기대하는 바일 뿐 아니라, 성경에서 신자에게 명백히 명하는 대표적인 자질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은 '바른 신앙에 일치되는 온전한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이 야고보서도 그 '인내'에 대하여 여러 차례 반복해서 교훈하고 있는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서두에서도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1:4)는 말씀이 있었지만 이제 이 야고보서의 결론에 도달하는 부분에 와서도 또 한 번 같은 주제의 말씀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적어도 예수님을 믿는 신자라고 한다면 이 '인내'라는 것은 그야말로 전공필수과목이라 할 만한 생활의 덕목인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기독신자들의 '인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하여 참고 기다리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반드시 '길이 참아야' 할 사실이 무엇이며 또한 그 인내의 결과로 주어지는 축복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신앙생활의 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인내'를 굳게 지켜야 합니다. 

그 사실을 두고 본문 7절과 8절에 "7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8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선 이 인내라는 덕목에는 항상 따라붙는 조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길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참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한순간뿐이라면 이미 그것은 인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덕목에 내포되어 있는 본성입니다.
즉 일초 혹은 일분 혹은 하루를 참았다고 해서 그 시간이 지난 후에 그동안 참았던 인내를 터뜨려 버리면 이미 그것은 인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내라는 단어 앞에 '길이' 혹은 '오래'라는 수식어가 없다 하더라도 이미 그 단어 자체에 그 뜻이 자동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도의 인내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여기서도 "길이"라는 수식어가 두 번이나 반복되었으며, 나중에 10절에서도 "오래 참음"이라고 똑같은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길이"라는 말을 좀 더 구체적으로 "주의 강림하시기까지"라고 또 두 번 반복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의 "강림"이란 그 유명한 헬라어 '파루시아'란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임재'라는 뜻과 '오고 있음'이란 뜻이 동시에 내포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초대교회에서 곧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일종의 기독교 전문용어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도 영원히 참을 수는 없습니다.
오래 참으면 참을수록 좋지만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에 따라 그 정도에는 역시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성도라 할지라도 역시 참는 데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라고 본문 말씀이 정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인내한다고 할 때 예수님 재림까지의 시간이 바로 그 '최소한 참아내어야 할 기간'인 동시에 또한 '더 이상은 참지 않아도 될 최대한의 기간'이 됩니다.
만약 이때까지 참지 못하면 인내 자체가 성립될 수가 없고, 이때까지만 참으면 그 이후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인내는 그 무엇이든지 그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그 기간은 무조건 '예수님 재림하실 때까지'라는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즉 성도의 인내는 예수님의 재림을 그 종점으로 삼고 있는 것이며, 바꾸어 말하자면 예수님의 재림을 진정 소망하고 기다릴 줄 아는 신자만이 제대로 인내할 수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이처럼 인내는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우리 신앙생활의 최고 정점, 그 대단원의 막과 직결되어 있는 덕목입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은 성도의 인내를 농부의 인내와 비유하고 있습니다.
농부가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모내기와 김매기를 하고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등 온갖 고초를 다 겪으면서도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그가 장차 "귀한 열매"를 반드시 거둘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농부라면 자기가 수고하며 작물을 심은 "땅에서" 장차 열매가 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며, 또 만약 그런 희망이 없다면 그런 뼈 빠지는 수고를 사서 할 농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도의 인내가 적어도 그런 농부의 인내보다 못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신자라면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이 엄청난 추수의 때만큼은 정말 '떼놓은 당상'처럼 기다릴 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처럼 예수님의 재림을 확신 중에 소망한다면, 그때까지 길이 참고 기다리는 것 쯤이야 농부가 추수를 기다리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인내는 이미 얻은 신앙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영적 자질입니다.
여기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즉 인내란 우리의 신앙을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마음속에서 굳게 지키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시는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인내 없는 신앙생활이란 '다 된 밥에 재 뿌리기'가 될 위험이 지극히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인내할 줄 모르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 재림 직전에라도 그만 파선해 버릴 가능성도 아주 농후합니다.
끝까지 참고 기다릴 줄 모르는 신앙생활이란 예수님 재림을 통해 그 동안 쌓여 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모아서 상급으로 받을 수 있는 그 최고의 자리를 딱 한 발 앞에서 스스로 걷어차 버릴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대로 재림하시고 성도들이 그 기다려 왔던 상급과 영광을 받게 될 그날이 오기까지 그 무슨 시험이 닥치더라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함으로써 십자가 고백으로 시작한 신앙생활을 저 천당입성의 구원으로 꼭 완성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참된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는 인내'가 필수적입니다. 

9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9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원망"이란 말은 영어의 'grumbling'에 해당되는 단어로서 '투덜거림'이라고 직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즉 남의 뒷전에서 불평한다든지 혹은 매사에 불만에 차서 툴툴거린다든지 또는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경우들이 다 포함되는 말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서로 원망하지 말라"고 밝히고 있듯이 특히 세 번째의 경우 즉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불평하는 투덜거림입니다.
더구나 그 앞에 "형제들아"라는 말이 먼저 나오고 있으므로 본문은 특히 교회 안에서 같은 성도들끼리 원망하는 경우를 두고 경고하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내용의 말씀이 여기서 갑자기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그 앞절을 보나 뒷절을 보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주제는 분명히 '인내'인데, 왜 그 중간에 '원망'이라는 내용이 일견 부자연스럽게 끼어 있는 것이겠습니까?
하지만 조금만 본문의 내용을 숙고해 보면 이것은 지극히 문맥에 맞는 말씀임을 곧 알게 됩니다.

'원망'이란 사실상 '인내'와 지극히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나 그 압박감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할 때 잘 터져 나오는 것이 바로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자주 겪지 않습니까?
부부지간에도 어떤 다른 일로 큰 압박감이나 고통을 받게 되면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하찮은 일에도 상대방에게 짜증을 내게 되고 바가지를 긁게 되어 결국 큰 싸움이 되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회사에서도 상사의 기분이 무언가 저기압이다 싶으면 눈치 빠른 부하 직원들은 '아하, 오늘 같은 날 잘못 걸렸다가는 괜히 저 사람의 화풀이감이 되기 십상이겠구나.'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지적거리가 되지 않으려고 무척이나 신경을 쓰게 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똑같은 일이 한 교회 안의 성도들끼리도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큰 일,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었을 때 자기부터 먼저 잘 인내할 줄 모르는 목사는 그것이 심리적으로 주는 부담감을 견디지 못하고 괜히 자기 교인들을 향해서 믿음이 없다느니 하면서 화풀이를 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교인 중에서도 사업이 잘 안되거나 집안에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에 인내심을 발휘할 줄 모르는 사람은 그런 불만감을 교회에 가져와서 폭발시키면서, 목사님에 대해서 이래저래 불평한다든지 다른 성도들에 대하여 구시렁구시렁하는 비난의 말을 늘어놓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 가서 눈 흘기는'식입니다. 
인내할 줄 모르는 교인은 이처럼 성도들끼리 서로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투덜거림'을 통하여 결국은 교회 내에 큰 분쟁을 일으키는 도화선에 불을 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내가 성도의 교회생활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것은 어떤 상대방 교인이 잘못했을 때에도 적용됩니다.
어차피 피차 완전할 수 없는 사람인데도 서로의 잘못에 대해서 좀 참아 줄 줄 모른다면 그것 역시 교회가 원망과 싸움의 도가니로 이끌어가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눈 속의 들보는 보이지 않고 그 대신에 서로 상대방의 눈 속에 있는 티만 잘 볼 줄 아는 이상한 시력을 가진 교인들로만 가득 찬 교회는 그야말로 '바람 잘 날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절에도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고 한 것입니다.
인내 없이는 용서를 발휘할 수도, 사랑을 나눌 수도 없으며 물론 화목한 성도 교제란 결코 성립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도가 결코 그런 꼴을 보여서는 안 되는 이유는 바로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교인들이 피차 인내 없는 까닭에 화목하지 못하고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서로 원망과 분쟁만을 일삼고 있을 때, 갑자기 예수님께서 '도적같이' 찾아오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같이 예수님 믿는다는 사람들이, 같은 예수님 보혈로 '형제'가 되었다는 사람들이, 똑같이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면서 기다린다는 사람들이 정작 그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서로 치고받으면서 싸우고 있다면 도대체 그 꼴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본문 말씀은 분명히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고 했으니, 그처럼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과 화목할 줄 모르는 교인은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교인은 '문밖에 서 계시는 심판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즉 실제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성화 단계에 있는 까닭에 여러 가지 부족한 점, 약점이 피차 남아 있는 성도들 사이에서 서로 조금씩 더 인내하여 오로지 용납하고 사랑함으로써 '반드시 속히 오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그 주님의 몸 되신 교회 안에서 진정으로 화목하게 교제하고 있는 좋은 모습을 보여 드릴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최고 엘리트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고난 중에도 주님의 인자하심을 의지하는 인내'를 꼭 발휘해야 합니다. 

10절과 11절에 "10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11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은 예외가 없이 다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이 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란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 특히 유대인 출신의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최고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본문은 그처럼 그 이름도 찬란한 선지자들, 구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그 훌륭한 선지자들 중에서 '인내'라는 덕목을 발휘하지 않았던 사람이 누가 있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없었습니다.
모세는 그 좋은 애굽 왕실의 왕자에서 정처 없는 도망자의 신세로,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최악의 팔자로 뒤바뀌었지만 그 40년이라는 긴 연단의 기간을 오직 인내로 버티었습니다.
엘리야는 스스로 죽기를 하나님께 간구했을 정도로 역경의 기간을 거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여금 편히 죽게 하는 대신 사십 주야를 강행군하게 하신 후에 '세미한 말씀'의 계시를 통하여 새 힘을 얻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자기 백성을 향하여 저주와 멸망의 예언을 해야만 하는 그 심적인 고통과 동시에 자신의 몸은 토굴에 갇혀 지내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동시에 감내해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다 "주의 이름으로 말하던" 선지자들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에 충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고난이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고난조차 오로지 "오래 참음"만 가지고 이겨냄으로써 오고 올 모든 신앙의 후손들에게 "본"이 됨으로써 그야말로 '인내의 역할모델(role model)'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역시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격려하면서 말씀하시기를 "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본 받을만한 선지자들 가운데서도 '인내' 하면 역시 욥을 최고로 손꼽게 된다는 사실에 이의를 가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그 숱한 명성 높은 선지자들 중에서도 유독 욥만 그 이름을 상기시켜 주면서 인용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사실 엄격히 따져 보면 욥도 그 고난을 통과하는 기간 내내 완벽한 인내를 보여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때로는 의문도 가지고 갈등도 있었다는 사실을 욥기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욥은 끝에 가서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그 신앙의 마지막 줄만큼은 단 한 번도 놓지 않았으며 바로 그런 인내의 결과 그는 문자 그대로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욥은 그처럼 '고난도 인내로만 통과하면 곧바로 축복의 길이 될 수 있음'을 생생하게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성도가 그 어떤 환난을 당하더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자비하시고 긍휼하신" 분이심을 뚜렷이 증거해 준 인물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같은 값이면 톱클래스에 속하는 신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기왕에 주님을 섬긴다면 최고의 수준에 도달한 교회에서 엘리트 일꾼으로, 그야말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정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이 '인내'만큼은,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완전히 떼어야'만 합니다.

바로 우리 민족의 신앙 선조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습니까?
그들은 일제치하와 6.25전쟁을 통과하면서 배고픔이나 추위 혹은 가족 간의 생이별 따위는 물론이며 죽음, 아니 죽음보다 더한 고통까지도 인내했던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인내의 결과 그들 자신은 '순교자'라는 최고의 영예를 얻었으며 그분들의 흘린 피로 인하여 조국의 기독교는 겨우 100년이라는 짧은 역사 속에서도 이처럼 놀라운 성장과 부흥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인내란 이처럼 톱클래스의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점을 받아야 할 필수과목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최상위 랭킹에 속하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애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찾아오는 시험도 잘 견디어야 하고, 언제 끝날지 잘 보이지도 않는 막막한 상황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참아야만 하며,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 싶을 정도의 고통까지 당하더라도 절대로 죽지 말고 이겨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은 그런 성도를 결코 망하게 하실 리가 없는 '자비와 긍휼'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목사, 충성된 장로와 집사와 권사, 신실한 성도라는 이름은 온갖 환난과 시험에도 끝까지 참고 견딘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명예인 줄 알고 오로지 주님의 인자하심만을 끝까지 의지함으로써 그 복스러운 '결말'을 꼭 체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악마의 여단(旅團)'(The Devil's Brigade)라는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 여단장은 적군을 기습하기 위해서 얼음 같은 강물에 몸을 담그고 장시간 행군하여 적진 배후로 깊숙이 침투하는 작전을 세웠는데, 그 계획을 듣던 고위 장성들은 그런 무리한 행군을 감당해낼 병사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다들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단장은 "내 부하들은 그 정도는 견딜 수 있도록 훈련되어 있습니다."하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면서 그 작전을 강행합니다.
그 결과 그 무리하게만 보였던 작전은 아군 피해라고는 경상(輕傷) 몇 명에 불과한 가운데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고, 그 이후로 그 부대는 '악마의 여단'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적군들이 붙여 준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런 별명은 그 여단의 장병들에게는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었습니다.
한 마디로 '인내' 이것 하나로써 그들은 기적적인 승리를 얻게 되었으며 끈끈한 전우애를 나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최고의 '엘리트 부대'라는 명성을 누리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군사인 성도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시편 37편 7절로 9절에서도 "7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8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9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인내하는 자는 바로 "여호와 앞에서" 기다리는 자입니다.
우리 그 어떤 경우에도 '주의 강림 때'까지 끝까지 하나님 경외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잠잠하게 참는' 신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내하는 자는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여 말하지 않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래야만이 우리는 이웃과 가족과 그리고 누구보다도 성도와 진정 화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인내하는 자는 결국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행악자는 그저 잠시 형통해 보일 뿐이지만 결국 이 땅에서의 궁극적인 축복도, 저 천국에서의 영원한 면류관도 역시 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참고 기다리는' 성도의 몫인 것입니다.

제가 서론에서 '참아라.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은 성경에 없다고 했지만, 오늘 본문의 "인내하는 자를 복되다 하나니"라는 말씀이 사실상 그 뜻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길이 참아 기다리는 자'에게는 "주께서 주신 결말"이 복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인내하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복이란 바로 우리 주님께서 약속해 주시는 것이니 그야말로 100퍼센트 보장되어 있는 복인 것입니다.

인내는 신자로 하여금 주님을 만나게 될 그 최고의 순간까지 우리의 신앙을 지켜 줍니다.
인내는 신자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한 몸 이룬 형제자매들과 항상 화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줍니다.
인내는 각 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특별히 빼어나게 돋보이는 별과 같은 이름을 남기게 해 줍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정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습니까?
오직 '길이 참고 오래 기다리는' 인내로써 주님 재림하실 때까지 신앙의 완성에 이르고 교회를 중심으로 성도들과 천국의 교제를 나누며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최고의 축복과 영광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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