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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거룩을 향한 몸부림 (시 1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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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을 향한 몸부림  (시 101:1~8) 
 
1. 거룩합니까?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거룩”이라는 말에 대한 거부감이 없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을 말하면, 거부감을 갖거나 부담스러워합니다. 그 이유는 “거룩”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신들이 정죄당하는 느낌, 즉 ‘부정하다, 불결하다, 부도덕하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말을 들으면 크리스천들이 위선적이고 이중적으로 보여서 싫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거룩”이라는 말은 성도들 사이에서도 어느 정도 부정적인 어감을 갖고 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서조차 “거룩”이라고 말하면 거부감을 갖는 이유는, 누군가 이 말을 하면 그 사람이 왠지 ‘격식과 법과 규칙을 따지는 것 같고, 무정해 보이고, 냉정하게 느껴지며, 다른 사람들을 엄격하게 판단하고, 또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도 거룩은 부담스러운 것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에게 이 거룩은 너무나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입니까? 

오늘 본문은 다윗이 거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거룩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2. 거룩을 추구하는 삶

1) 거룩해야할 이유(1~2a)

오늘 본문인 시편 101편은 다윗이 기록한 것으로 그 기록 시기가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다윗은 이 시를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을 때, 혹은 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 온 후에 기록했다고 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죽은 후 처음에는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만의 왕이 되었습니다(삼하2:4). 칠 년 반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전 이스라엘의 왕이 됩니다(삼하5:1~4). 그러고 나서 다윗은 당시 여부스 족이 점령하고 있던 시온 산성을 정복하여 예루살렘, 즉 다윗 성이 되게 했습니다. 그곳이 이스라엘의 새로운 수도가 된 것이죠(삼하5:6~10).

그러고 나서 곧바로 다윗이 착수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알레유다에 있던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일이었습니다(삼하6:1~5). 그런데 언약궤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웃사가 실수로 인해 바로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두려워하면서 이렇게 말했지요.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삼하 6:8)” 그래서 다윗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지 않고, 오벧에돔의 집에 두었습니다.

그러고 난 후, 세 달이 지났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언약궤로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역대상 13장 14절에 “여호와께서 오벧에돔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은 기쁜 마음으로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왔습니다. 다윗이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에 가져온 후에 예루살렘은 여호와께서 계시는 “거룩한 성”이 되었습니다. 즉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 다윗 성, 혹은 옛 여부스 족의 도성이 아니라,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하나님의 도성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변화는 예루살렘의 책임자인 왕의 변화도 요구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오기 전까지는 다윗 왕은 단순히 한 국가의 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궤가 들어옴으로 인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성을 지켜야 하는 임무를 지닌 특별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해 계신 성읍의 책임자’이자, ‘거룩한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는 자’라는 새로운 삶이 그에게 요구된 것입니다. 

이것은 이후 이스라엘 왕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왕들은 왕으로서 선정(善政)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임재해 계신 하나님 앞에 선 자이자, 그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다윗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거룩한 성을 지키는 자, 그리고 그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로서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말한 이 시편 101편을 “왕의 거울”, 혹은 “왕자의 시”, 또는 “군주를 위해 쓴 다윗의 시”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왕과 왕자들은 이 시를 거울로 삼아 늘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신이 하나님께서 임재 하여 계신 성읍을 지키는 자라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의 종으로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 등을 배우고 닦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보여주는 삶은 어떤 것입니까? 2절에서 다윗은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라고 합니다. “완전한 길”에서 “완전한”은 ‘온전한, 흠없는, 건전한’의 뜻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출애굽기 12:5, 29:1, 레위기 1:3, 3:1, 4:23 등에서 하나님께 드릴 희생 제물로 쓰일 ‘흠없는 동물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말입니다. 그리고 “길”이란 ‘태도, 방식’을 뜻합니다. 즉 그는 하나님이 임재 하여 계신 도성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그리고 도성에 사는 사람으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의 도성(都城)의 시민다운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다윗은 “완전한 길로 행하는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모습은 2절 하반 절부터 5절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2) 개인적인 거룩(2b~5)

먼저 거룩한 삶은 성도의 개인적인 삶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① 그래서 다윗은 2절 하반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내 집 안”이란 어떤 곳을 말합니까?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인 집, ‘마음대로 자유할 수 있는 집’이라는 공간을 말합니다. 긴장을 풀고, 마음대로 해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으며, 눈치 볼 필요도 없는 곳, 그래서 심하면 폭군이 될 수 있고 사악한 범죄자가 될 수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이처럼 개인적이고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비밀스러운 자리에서 다윗은 어떻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까? 그는 거기서 “완전한 마음으로 행하리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완전”은 ‘청렴, 무결, 순결’ 등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공간인 집, 마음대로 자유할 수 있는 곳에서도 순결하고 거룩하게 살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② 둘째로 그는 “비천한 것을 내 눈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천한 것(벨리야알)”은 ‘무가치함, 무익함, 파멸’, 즉 가치가 없고, 무익한 것을 뜻합니다. 다윗은 이러한 것을 “내 눈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바라보지 않겠다’, ‘쳐다보지 않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눈에 띄는 곳에 두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눈길에 머물 수 있는 곳이라도 거기에 “비천한 것”, “비루한 것”, 즉 신앙생활과 경건에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을 두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거룩을 방해하거나, 조금이라도 지장이 될 말한 것은 아예 눈길이 닿는 곳에조차 두지 않겠다는 결단의 표현입니다.

③ 셋째로 그는 “배교자들의 행위를 내가 미워하오리니 나는 그 어느 것도 붙들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배교자”는 신앙을 져버리는 사람을 말하기보다 환경과 이익에 따라 믿음이나 신의를 버리는 자를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이익을 위해 하나님과 진리, 또는 친구를 배반합니다. 다윗은 그런 사람을 ‘미워할 것이다’라고 하는데요. 이 말은 ‘증오할 것이다, 아주 적대적이며 혐오할 대상으로 여길 것’이라는 뜻이며, 나아가 이 “미워한다”는 말은 적대적이며 혐오스럽고 경멸스러운 사람과 사물에 대해 ‘아예 어떤 접촉이나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태도가 들어있습니다. 

④ 넷째로 다윗은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악한 마음”은 ‘비틀어진, 그릇된, 사도(邪道)에 빠진’이라는 뜻도 있지만, 여기서의 의미는 ‘하나님이나 인간에게 신실하지 못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안과 밖이 다르고요, 말과 행동이 다릅니다. 그들은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하며,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배신하고, 또 이익에 따라 사람을 배신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이중적이고, 위선과 외식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이지요. 다윗은 이런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떠난다”는 말은 ‘옆으로 빗나가다, 고개를 돌리다’를 의미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윗은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신실하지 못한 이중적인 마음과 태도, 이익에 따라 하나님도 사람도 제 마음대로 배신하는 것은 ‘고개를 돌려 아예 바라보지도 않겠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⑤ 다섯째로 다윗은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4b). “악한 일”이 무엇입니까? ‘나쁜 것, 해로운 것, 불행, 재난’ 등을 의미합니다. 즉 “악한 일”이란 도덕적으로 악한 것,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잘못된 마음,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마음, 그리고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다윗은 도덕적으로 악한 것,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을 향한 잘못된 마음, 다른 사람을 해하려는 마음, 그리고 우상숭배와 관련된 것에 대해서 ‘그게 뭐냐?’하는 일말의 호기심조차도 갖지 않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⑥ 여섯째로 다윗은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은근히”는 ‘덮개, 은밀한 곳, 비밀’이라는 뜻인데요. 이것이 “헐뜯다”는 말과 어울려 ‘은근히, 비밀스럽게,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비방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비록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비난하고 욕하지는 않아도 은근슬쩍 비난하고 욕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그런 것조차도 철저히 끊어버릴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⑦ 마지막으로 다윗은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5b).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고 무시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중상모략하거나 해칩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곁에 이런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되지요. 성도의 곁에는 오직 겸손한 사람, 다른 사람을 높이는 사람만 있어야 합니다.

이상이 다윗이 하나님이 임재 하여 계신 거룩한 도성에 사는 사람으로서 개인적인 거룩을 어떻게 이루어나갈 것이냐는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의 태도가 얼마나 단호한지 그것이 느껴지십니까? 제가 오늘 설교의 제목을 “거룩을 향한 몸부림”이라고 했는데요, 그 표현이 적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을 향한 몸부림”, “거룩을 향한 싸움”은 어디서부터 시작됩니까? 자신으로부터, 자기 집이나, 자신의 개인적인 공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개인적인 거룩을 위하여 그렇게 힘쓸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거룩을 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습니까?

세계적인 커피 전문점인 스타벅스는 “세계 경영에서 승리의 비결은 차별화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스타벅스는 10년 만에 세계적인 체인으로 급성장한 커피 전문점이지요. 스타벅스 커피는 일반적으로 가격이 비쌉니다. 미국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면 보통 1, 2 달러 정도의 커피를 마시는데, 스타벅스 커피는 3, 4달러나 합니다. 그래도 장사가 아주 잘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잘 되는 비결은 ‘하워드 슐츠’라는 스타벅스 회장의 경영전략 때문입니다. 그 경영전략이 바로 “차별화”입니다. 값도 비싸고 맛도 좋아야 되겠다고 해서 일반 사람들이 잘 마시지 않는 차별화된 ‘에스프레소’도 개발해서 팔고 서비스도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요셉을 보십시오. 그는 생각과 마음과 눈길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처신했습니다. 신분은 천한 노예였지만 생각과 사고와 바라보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주 차별화된 삶을 살았습니다. 또 다니엘은 어떻습니까? 그는 아예 먹는 것에서부터 남달랐습니다. 차별화된 삶, 즉 거룩을 향한 몸부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요셉이나 다니엘을 그렇게 위대하게 쓰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홀로 있을 때, 개인적인 공간이나 아무도 없는 곳에, 가장 흐트러지기 쉽고 함부로 행동할 수 있는 바로 그곳에서 다윗처럼 거룩하게 살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주변의 거룩(6~8)

그런데 여러분, 거룩을 향한 다윗의 싸움은 개인적인 차원으로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6절부터 8절을 보면, 다윗은 자신의 거룩을 위하여 자기 주변, 이웃, 삶의 환경까지 거룩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나 혼자 거룩해도 곁에 있는 사람이나, 주변 환경이 거룩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다윗은 뭐라고 말합니까? 

① 6절에 보면, 다윗은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자기 곁에 충성되고, 신실하고, 성실한 사람들만 있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② 둘째로 다윗은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주변에 거룩하고 경건한 신하들만 둘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렇게 성도의 곁에는 거룩하고 순결한 사람들만 있어야 합니다. 
③ 셋째로 다윗은 “거짓을 행하는 자는 내 집 안에 거주하지 못하며 거짓말 하는 자는 내 목전에 서지 못하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안과 밖이 다른 간사한 자나, 거짓을 말하는 자, 그리고 신실치 못한 자들이 성도의 곁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④ 마지막으로 다윗은 “아침마다 내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멸하리니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에서 끊어지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곁에서, 거룩한 도성에서 매일 아침마다 악인들을 제거해 나갈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일을 어쩌다 한 번, 잠시 하다가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추진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예루살렘 성에는 악인들은 점점 사라지고, 거룩한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곁에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늘 자녀들에게 “친구를 잘 사귀어라”고 강조합니다. 자녀들만이 아니라 성도도 친구를 잘 사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친구로 인하여 자신의 거룩을 더럽힐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낸시 레이 드모스’가 지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성품, 거룩함」이라는 책에는 다음과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곰 전문가’인 티모시 트레드웰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매년 비무장 상태로 알래스카 회색 곰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곰들의 생태를 촬영했습니다. 그는 곰들에게 다가가 곰들을 만지기도 하고, 또 이름을 지어 주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미국에서 유명한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했는데, 그 자리에서 그는 “곰은 대체로 무해하고 사교적인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2003년 10월 6일, 트레드웰과 그의 여자 친구의 시신이 알래스카 반도의 카트마이 국립공원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곰의 공격을 받고 죽은 것입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주는 교훈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짐승은 짐승일 뿐이다.”는 것이죠. 길들인 짐승도 한 번 씩 야성이 드러나는데, 야생에서 살고 있는 동물을 믿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그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정말 위험한 생각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이 충고를 무시하는 것은 마치 아이들이 폭탄을 갖고 장난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야생 동물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고 위험한 죄에 가까이 가면서도 자신의 거룩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마치 이 곰 전문가처럼 몇 년 동안 죄와 함께 놀았지만 한 번도 심하게 물린 적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한국 CCC 대표인 박성민 목사는 “거룩은 전염된다”고 했습니다. 그 반대도 가능한 말입니다. 즉 세상의 죄악과 더러움도 성도에게 전염된다는 것입니다. 강의 상수에 오염원이 있으면 그 강은 오염이 됩니다. 어느 지역에 오염물질을 내뱉는 공장이 있으면 그 지역은 오염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의 주변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성도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로 인하여 오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무시했던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무분별하게 처첩을 거느렸고, 대부분 이방여인인 그들을 사랑한 나머지 그들이 시집오면서 가지고 온 그들의 신과 신앙까지 사랑하여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기 위하여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으로 가거나 세상과 분리되어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악한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기 위하여 다윗처럼 노력하고 애쓰는 것은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살 되 지혜롭게 처신하여 순결을 유지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전염되기보다 거룩함을 ‘전염’시키는 사람, 바로 여러분의 삶이 그와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3. 거룩은 성도의 필수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15절에서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고 말씀했습니다(벧전1:15). 여러분, 거룩이 무엇입니까? 살아계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셀 수 없는 사랑을 받은 백성,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녀로서 ‘하나님의 백성다움’,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즉 거룩이란 하나님을 닮아 거룩한 사람으로 사는 것,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거룩한 생각을 가지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거룩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보여준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는 거룩한 하나님의 궤가 있는 성읍에 거주하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거룩하기를 결단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더불어 주변에서 죄와 악인을 제거할 것을 결단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와 타협하거나, 악인의 말을 좆아 그릇된 일을 하게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더욱 더 적극적으로 자기 곁에 선을 추구하고 거룩을 사모하는 사람들을 두려는 노력도 기울일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임마누엘 주님이 함께 하시는 자로서 다윗처럼 그 하나님에 합당한 삶, 즉 거룩한 삶을 결단하고 있습니까?

1984년에 세상을 떠난 프란시스 쉐퍼 박사, 그는 <라브리>로 대표되는 현대 기독교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적인 사고와 성경적인 가치관, 성경적인 철학을 가지고 살 것을 가르친 스승입니다. 쉐퍼 박사는 그 말년에 암으로 투병 생활을 했는데요. 암과 혹독하게 싸우면서도 그는 그 아픈 몸을 이끌고 캠퍼스 사역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인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사랑하는 젊은 크리스천들에게 최후로 남긴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가 피를 토하듯 마지막으로 남긴 메시지는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지 마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행복은 구하지만 거룩함은 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 시대의 크리스천들이 꿈과 비전은 구하지만 거룩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 되었다고 그가 마지막으로 외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거룩한 삶을 추구할 때 비로소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거룩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거룩하기 위하여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거룩을 잃은 성도, 성도(聖徒)의 앞 자(字)인 거룩할 성(聖)을 잃은 성도는 더 이상 성도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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